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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9

안병무 교수의 삶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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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홍근수

(향린교회 담임목사)


안병무 교수는 1년 전인 1996년 10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급작스런 일이거나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실은 그는 20년 전 유신독재와 투쟁 시에 감옥에서 얻은 심장병으로 계속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고 여러 차례 입원을 했었고 사경을 헤매었던 때도 몇 차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향년 74세면 향수하신 것이다. 그래도 그의 죽음의 소식은 그를 가까이서 잘 아는 많은 분들에게 뿐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충격적인 비보로 전해졌다.
안 박사는 그의 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것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그랬기에 죽기 두어 달 전인 작년 여름에 생전에 꼭 할 일로 믿었듯이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 그의 어릴 적의 마음의 고향인 만주 용정을 다녀왔다. 걱정했던 대로 그것이 무리였다. 그 여행의 여독으로 그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해외로 전해져 미국의 동부인 뉴욕과 LA, 캐나다의 토론토 등지에서 안 박사 추모예배가 열리었다.
고인이 없는 역사를 살면서 이제 우리는 차분히 고인의 삶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생각을 집중할 때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소시적 시대로 돌아가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은 소시적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한 마디로 고난으로 가득 찬 그것이었다. 먼저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청소년 시절은 민족사적으로는 줄곧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고난의 시대였다. 이것이 그의 오늘의 생을 특징짓게 된 결정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두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가 태어난 평남 안주군 신안주를 떠나 간도로 이주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의 생은 조국땅을 등지고 이방 땅에 가서 유랑하는 나라 잃은 유민의 길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운명을 어릴 때부터 실감하였고 일제에 합병된 후에는 그가 살던 만주에는 민족해방을 위한 무력항쟁으로 독립군과 빨치산들의 투쟁이 일상적인 삶의 상황이 되었다. 아침에는 일본군의 세상이 동텄고, 해가 지면 독립군과 빨치산의 세상이 시작되는 혼란 속에서 사는 현실이었다.
그의 가정적 환경은 불행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조국땅을 등지고 만주에 온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때때로 한학을 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술에 취해 있을 정도로 거의 매일 과음을 하였고 거기다가 소실을 두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가정을 가진 남자가 소실을 둔다는 것이 그리 큰 도덕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던 시대라 하더라도 조국땅을 떠나 나라를 빼앗긴 유민의 가난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실을 본가에 끌어들이기까지 하여 소년 안병무와 그의 어머니에게는 참기 어려운 큰 시련이었다. 안병무 교수가 오랫동안 독신주의를 관철하려고 했던 배경도 어느 정도 여기에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민족적, 가정적 불행은 아직도 어린 소년 안병무로 하여금 고뇌케 했고 야곱이 했다는 얍복 강에서의 영혼을 건 씨름을 하게 했던 것 같다. 이는 그를 남달리 조숙하게 하였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만든 근본 동기도 된 것으로 보인다.
영혼의 씨름을 하고 있던 소년 안병무는 이 때 처음으로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해서 저기 달려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이상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었다. 그후 도시로 나와 그는 다시 그 십자가의 상징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그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술도, 첩질도 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의 마음은 결정적으로 움직여 마침내 그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것이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 안병무 신앙의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참석할 정도로 그의 신앙은 뜨거웠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 신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유교만 알던 봉건적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고 박해하게 된다. 그것이 성경책과 찬송가를 아궁이에 처넣고 교회에 못 가게 막는 것으로 나타났을 때 안병무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집을 떠나 분가하게 된다. 여기서 신앙과 정의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권위와도 맞서고 거역하는 안병무의 결연함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믿은 예수가 그 이후의 그의 전 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끌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영접한 예수에 대하여 회의가 없었고 일생 동안 그 예수에 대한 신앙에 변절이 없었다. 그는 신학자이기 이전에 철저한 신앙인, 종말론적 신앙의 특징을 가진 진지한 신앙인이었다. “친구여! 가자, 십자가의 길을”이라는 다음의 그의 신앙 시가 그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친구여! 가자 하늘나라로 향해 가자
그 길이 좁으면 내 가진 것 버리고 가자
그래도 좁으면 알몸으로 가자
그래도 안 되면 내 사지를 찢고라도 가자


가자, 친구여! 고독한 이 길로 그대로 가자
이 길은 남이 걷지 않는 길
때로는 나와 내 그림자만이
걸어가야 하는 길


가다가 가다가 심장이 터지면
목은 십자가에 깔리면서라도
눈은 그 나라로 향하고 가자”


이 시에서 안병무의 순수한 신앙, 뜨거운 신앙인의 정열을 볼 수 있지 않는가? ‘안병무는 신앙이 없던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자 그 누구인가? 그에게 위의 안병무의 시를 읽어 주리라.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고 성수주일도 하지 않았으며 종종 ‘반교회적’ 발언을 하여 ‘과연 그는 신앙이 있는가? 과연 신학교 교수가 될 수 있는가?’ 하고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진지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그가 ‘반교회적 발언’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도적 교회에 대한 비판일 뿐 교회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병무는 소년 시절에 야학교 선생이었고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위해 젊음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것을 모두 교회 울타리 안에서 전개했다. 그는 일생 동안 복음의 증언자요 전파자였다. 젊어서부터 ‘부흥강사’란 칭호를 들었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권위있는 성서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장성하여서는 이것을 교회란 좁은 공간에서 전하는 제도적 성직자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 세계를 그의 교구라고 외쳤던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처럼 그는 일생 동안 교회 밖의 넓은 세상에서 예수운동과 교회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중단한 일이 없었다.
안병무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시절에 기독학생회를 조직, 초대 회장이 되었고 서울대 기독학생회 총연합회 회장이 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대학 시절 기독학생운동을 통해 얻은 신앙동지들을 중심으로 일신회(一信會)란 신앙동지회를 조직하여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가 6·25 중 전주에 머물고 있었을 때는 신앙동지회인 일신회의 동지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각 교회에서 기독청년들의 의식화 운동을 전개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갱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누가 그를 가리켜 비교회인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향린교회를, 후에 갈릴리교회와 한백교회 등을 창립하였고 그 교회들을 중심으로 설교와 성경공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교회갱신을 위해 노력해 온 사실을 아는가?
그는 향린교회를 창립하였다. 가까운 신앙동지들과 함께 6·25가 끝나기도 전인 1953년 5월에 서울로 잠입하여 서울 남산에 향린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은 교회 개혁운동의 깃발을 높이 쳐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회는 초교파교회, 평신도 교회, 입체적 교회, 공동체적 교회 등을 특징으로 하고 창립된 새로운 교회였다. 이 교회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현실의 제도적 기성교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인, 개혁적인 교회로 창립된 것이었다. 동시에 이 교회는 가정이기주의를 넘어 공동체운동 실천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가 주동이 되어 두번째 세운 교회였던 갈릴리교회는 어떤 교회였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세웠던 지하교회였다. 당시 이 교회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교회로서 해외 기독교 지도자들이 순례하던 로마제국하에서 지하 카타콤 교회로 존재했던 초대 기독교교회와 같은 정신과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올바른 복음을 증언했던 교회였다. 그 교회는 마치 나찌 시대 본회퍼가 주동하였던 지하신학교와 비슷한 교회였다.
한백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민중교회이고 또한 민족교회였다. 특히 민족통일을 관심하고 통일을 위해 선봉대가 되고자 하는 정신으로 출발한 교회이다. 한백교회란 이 교회의 이름이 ‘한라산’과 ‘백두산’의 두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데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리라.
그뿐인가? 그는 목포에 개신교의 수녀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라는 수녀원적 공동체를 창립하였다. 그것이 광주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5월의 초하루의 일이었다. 개신교회에서는 최초이고 유일한 수녀원인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창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선교회 봉사를 바탕으로 복지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와 복지 사회건설에 기여하고자 함”이었다. 목포로 들어가는 초입인 왕산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지금도 창립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하는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으면서 밖으로 결핵환자들과 장애인 등을 위한 사업과 각종 복지 활동을 통한 선교활동을 수행하고 있고 여러 가지 교양과 영성 프로그램 등을 개발, 운영하고 있으며 또 그 시설의 개방을 통해 지역의 교회들과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이러한 안병무 박사를 안다면, 그가 신앙이 없다거나 반교회적이라고 비난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철저한 신앙인이었던 고 안병무 박사의 일생은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은’ 투사(엡 6:10-20)의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결코 현상질서에 만족한 일이 없었고 언제나 개혁과 변혁을 통한 새로운 교회와 세계를 창조하고 변혁하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이를 위해 그는 언제나 투쟁의 생을 살았다. 그가 투쟁한 대상은 주로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가정이기주의이다. 그는 오랫동안 독신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례를 하지 않는다는 ‘고집’을 관철했다. 그러나 며느리와 손자를 보게 해 달라는 사랑하는 노모의 간곡한 ‘마지막 소원을 거역할 수 없어 장남인 그는 결국 40대 후반에 독신주의를 굽혀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가정이기주의를 비판, 경계하고 여성의 해방과 평등한 남녀 관계를 위해서 투쟁했다.
둘째로 그는 교권주의와 투쟁했다. 그는 교회를 불신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교권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던 현실의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그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가 후에 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 교수가 되었지만, 기어이 고집스레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이유는 ‘예수를 팔아 밥을 벌어먹지는 않겠다’는 것이었고 목사가 될 때 어쩔 수 없이 가식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보다는 종교적 교리와 권위를 옷입는 위선자가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교권주의와 교파주의, 그리고 직업적이고 위선적인 성직자 제도에 있다고 단정한 그는 그러한 제도적 교회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흔히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앞에서 열거한 그가 세운 향린교회, 갈릴리교회, 한백교회 등은 모두 예외 없이 철저히 교파교회, 성직자 중심 교회, 제도적 교회가 되지 않도록 경계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로 그의 투쟁의 대상은 반민주-반민중-반민족 세력이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게 하였고 이 결과 그는 두 차례 교수직에서 추방되었고 그의 잡지가 폐간되는 수난을 당하게 했다. 그 절정은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3·1구국선언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1년 여간의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고 이번에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심장병도 바로 그때 얻은 병이다.
이때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투쟁의 길로 나서게 된다. 주로 그의 글과 강연과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재야세력에 합세, 또는 조직하는 등 모든 수난을 통해 반민주-반민중-반민족 세력에 항쟁하는 운동을 벌여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일관되게 줄기차게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생을 회고하면서 그가 성취한 일들을 여기 낱낱이 다 나열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발간한 잡지와 관련하여 말해보려 한다. 예수의 복음의 확산과 교회개혁운동에 정열을 쏟았던 그는 6·25 전쟁 중 피난지인 전주에서 『야성』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그야말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들판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 잡지는 주로 제도적 교회에 대한 비판과 교회개혁의 필요를 부르짖는 ‘과격한’ 내용의 글들이 실렸다. 그때는 그가 아직 신학을 하지 않았던 젊은 평신도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는 참으로 선구자적 정신과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 다음으로 그가 발행한 잡지는 『현존』이다. 그것은 향린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운동과 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하다가 느낀 바 있어 독일 유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후에 착수한 잡지였다. 113호까지 꾸준히 나온 그 월간지는 실존주의와 역사적 예수 추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의 표출이었고 동시에 민주화와 민족, 민중에 대한 탐구의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그 잡지는 결국 군사독재권력에 의해 폐간조치를 당할 만큼 민주화를 부르짖는 대담한 필봉을 휘둘렀다.
그후 그는 본격적인 신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중앙신학교에서 한신대 교수로 전임하면서 한국신학연구소를 창립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그것은 『신학사상』(계간지)의 발간으로 시작된다. 이 잡지는 본격적인 전문적 학술지로 한국 신학운동의 매체로 자임하여 출발하면서 맑스주의와 기독교와의 대화, 한국 신학의 정립을 위한 신학운동을 내세운다. 『신학사상』은 참으로 한국 민중신학의 태동과 성장의 마당이 되었다. 이 굴지의 한국 신학운동의 전문학술지는 지금까지 96호를 내고 있다.
이어서 그는 『살림』 지를 월간으로 창간한다. 독재자에 의해 폐간되었던 『현존』의 뜻을 살리는 의미에서 월간으로 창간한 것이지만, 제목이 말하는 대로 생명운동과 환경운동, 그리고 기독교 신앙적 이해와 운동을 기층인 평신도들 사이에 확산시키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잡지다. 그것이 이미 90호를 넘어서게 되었다.
안 박사의 생을 말할 때 그가 일생을 바쳐 살아왔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일을 하면서 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직책을 가지거나 자격을 갖춘 것보다도, 갖추지 않고서 한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것은 첫째 그는 직업적인 목사가 아니면서 목회를 훌륭히 해 왔다. 그는 교회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그는 여러 교회를 창립하고 또 목회를 했다. 그 자신은 목사가 아니면서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의 교수로 후진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 자신은 목사가 아니었으되 그는 많은 목사들의 스승이고 사표로 널리 존경받았고 또 존경받고 있다.
둘째로 그는 민중이 아니면서 민중해방을 위해 그의 생과 학문을 바쳤다. 특히 민중신학계에는 고 서남동 교수와 함께 대부적 존재였고 민중신학을 세계신학의 무대에 등장시켰으며 세계적 민중신학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특히 독일에서는 그의 민중신학을 주제로 신학박사 학위논문이 쓰여지기도 했다. 그는 민중신학회를 조직하고 그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부단히 민중교회 목회자들과 교류를 계속해 왔다.
셋째로 민족주의자나 정치지도자가 아니면서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해 일생을 살았다. 그는 민족통일을 위해서 통일헌법을 기초할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의 대화에도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북한의 학자들을 만나 대화하려고 했다.
세계적 신학자인 안병무 교수의 유산으로 세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 민중,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그의 고희기념논문집의 제목으로 붙여지기도 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이 땅 위에서 예수, 민중, 민족을 찾아 하늘을 우러러 순례하는 한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끝내지 못하고 남긴 미결의 사업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성서 사역이다. 그는 그 동안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들이 모두 제도권의 교리적 배려에 의한 번역인 것을 통감한다. 이 말은 우리말 성서가 원문의 정신에서 동떨어지고 왜곡된 것들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이것들을 시정하고 일반 평신도들이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희랍어 원어에서 직접 알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신약성서 사역이다. 그것이 골로새서까지 진척이 된 채 그의 죽음으로 중단이 되었다.
둘째로 유관순의 만세운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천안 아우내 마을 건립이다. 그것은 한국신학연구소의 새 보금자리도 되지만, 그보다도 민중신학연구의 ‘하이마트’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 본격적인 한국신학연구, 특히 민중신학연구센터를 지어 학문활동을 위한 강의실과 세미나실, 도서실과 숙박 시설 등 일체를 갖춘 ‘민중신학연구센터’로 삼으려는 꿈이 서려 있다. 이것을 시작하여 거의 완성했지만, 아직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셋째로 민족통일공화국헌법 초안 작성의 과업이다. 민족통일헌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제안에 따라 기독교장로회 총회 내의 통일헌법연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초대 위원장직을 맡아 수고했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있다.
이것들은 고 안병무 박사가 착수하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는 미결의 사업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다. 이 미결의 과제들은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지만, 동시에 이제 살아남은 우리 후진들이 지고 가야 할 과제로 남겨진 것이다.

 

* 필자는 안 박사가 별세했던 1996년 동안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나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 체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린 장례예배에는 참석 못했으나 토론토에서의 추모예배에는 직접 참석하여 추모사를 했고 뉴욕 추모예배를 위해 노력하였다. 필자는 그와 동년배의 친구나 신학교에서의 동료도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아니었다. 그런 행운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필자는 10년 전부터 그때로부터 33년 전에 그가 신앙 동지들과 함께 교회개혁의 의지를 담고 창립한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목회하면서 그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고 배움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글은 1996년 11월 7일 오전 11시에 토론토의 온누리교회에서 열렸던 “고 안병무 교수 추모예배”에서 행한 필자의 추모사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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