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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3

〈들의 소리〉 心園 안병무 박사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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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완상

(한국방송대학교 총장)


내가 대학 입학해서 새로운 지식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듯 흡수하고 있을 때, 나에게 깨달음을 준 분은 내 전공과는 전혀 다른 신학분야의 長空 김재준 목사님이었다. 그의 글을 모은 『낙수』와 『낙수 이후』는 한국 교회와 신학에 새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글 모음이었다. 나는 그 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때 슈바이처의 『생명의 경외』가 나를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흥분시켰다면, 長空의 글은 나의 영적 감수성을 높여 주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 YMCA강당에서 새로운 신학(新神學)의 중요성을 갈파하는 長空의 강연을 들었다. 그때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조용한 강론 속에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원고를 한 번 쳐다보고 천장을 또 한 번 쳐다보는 長空의 강연 스타일도 인상적이었다. 메시지 내용과 메시지 전달 방식은 무엇인가 잘 맞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분의 인품에 끌리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 때(1950년대 초) 서울대학교를 갈 것이 아니라, 長空 같은 분이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갔어야 했는데 … 라고 아쉬워 해보기도 한다. 사회학을 전공하면서도 신학 울타리를 계속 엿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다.
여하튼 내 젊은 시절 나에게 영향을 끼친 잡지 중에 『야성』(野聲)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이 잡지는 안병무 박사가 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잡지의 힘도 長空의 글이 주는 힘과 비슷한 것이었다. 안 박사께서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셨고,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실 때에는 기독학생운동에 앞장섰다는 것을 대학 입학한 뒤 알게 되었다. 그도 사회학과 신학 사이를 방황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신학을 선택했으니, 나의 경우보다 나은 것 같다. 여하튼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생 중에도 이런 선배가 계시는구나’라고 나는 속으로 되뇌이며, 나의 실존적 몸부림을 누구보다 이 선배는 잘 이해해 줄 것으로 여겼다. 언젠가 이만갑 선생님에게 안 선배에 대해 물었다.
“대단히 진지하고 엄숙한 학생이었지요. 나이도 지긋한 듯 했고 너무 엄숙 했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안 박사에 대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心園 선생을 뵌 것이 언제인지 확실치 않다. 70년대 초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어느 대화 모임에서 독일 신학자의 강연을 통역했을 때였다. 검고 굵은 테의 안경을 쓴 모습은 이만갑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모습이었다. 그 뒤 나는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교수로 바쁜 생활을 했다. 마침 우리 집이 수유리에 있었기에 우연히 퇴근 때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있던 心園 선생과 함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그때 그의 집에 들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그도 수유리에 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참으로 엄숙하고 지나치게 진지한 신학자로만 보였다.
지금 나의 뇌리에 아직까지도 강력하게 남아있는 그에 대한 몇 가지 이미지를 얘기해야겠다. 시간의 순서는 뒤죽박죽 되겠으나, 강렬한 인상부터 얘기해야겠다.
우리는 암울했던 유신시절, 기독자 교수협의회라는 멋진 공동체를 갖고 있었다. 정말 서로 보고 싶었다. 우리를 감시하고 따라 다니는 경찰을 뿌리치고, 가까스로 우리끼리 모였을 때는 진한 동지적 감동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1970년대 한국식 〈카타콤〉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때 心園은 학교에서 추방당했던 몇 분 동지와 함께 갈릴리 교회를 만들어, 초라하지만 정답고, 소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내 교회일로 바빴다. 성가대도 지휘하랴, 또 교회 장로가 되어 주일이면 정신없이 바빴다.
헌데 어느 주일 나는 오후 시간을 짜내어 갈릴리교회에 갔었다. 마침 心園이 말씀 증거를 했다. 그는 해학의 자유로움과 함께 엄숙함의 진솔을 모두 담아내는 독특한 증언을 했다. 그날도 그는 그러했다. 해학과 엄숙함은 물과 기름인데, 그것이 그에게 와서는 이상하게 하나의 조화를 이루곤 했다. 그날 그는 모세 이야기를 했다.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도 그곳에 그 스스로 가지 못할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린 장면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설교 도중에 울었다. 心園은 모세와 교감(交感)하고 있었다. 그는 모세의 울음을 울고 있었다. 민주화, 인권,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광야생활〉을 하고 있던 우리 처지에서 우리가 과연 민주화의 꿈이 실현되는 그날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을까를 진심으로 염려했기에, 우리는 모세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의 심정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솔하게, 거침없이 울었다. 나도 찡함을 느꼈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
心園은 理性의 사람이면서, 또한 지독하게 감성의 사람이다. 그만큼 그는 순수하다. 그의 순수함이 너무 깊어, 그의 헤픈 듯 보이는 야한 농담들이 그 순수함을 조금도 훼손시킬 수 없었다. 그때 울면서 말씀을 증거했던 心園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1974년이였던가. 우리의 신앙동지, 김찬국, 김동길 교수가 2월 중순 경에 석방되었다. 그들의 석방을 환영하는 군중집회를 기독자 교수협의회가 주동이 되어 열기로 心園의 집에서 결의했다. 그때만 해도 이같은 모임은 영락없이 정치적 모임으로 찍혀 지독한 곤욕을 치러야 했기에, 우리의 〈모의〉는 심각하고 진지했다. 나는 마침 그때 기독자 교수협의회 총무였기에 이 모임을 주선하는데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이 모임의 주제강연 제목을 “민족과 교회”로 정하고, 연사는 心園이 맡기로 했다. 기도는 서남동 목사님이, 성명 낭독은 내가 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해프닝이 일어났다. 마침 그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이 터져 언론자유를 바랐던 국민들이 백지광고에 뜨겁게 호응했다. 우리도 이 집회광고를 내기로 했는데, 백지로 하지 말고, 당당하게 우리 조직의 이름과 중앙위원들의 이름 및 소속을 당당하게 밝히기로 했다. 백지광고는 익명의 광고였다. 이름이 밝혀지면 혹독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당당히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중앙위원 중 유일한 국립대학 교수여서 속으로는 ‘큰일났구나!’ 하고 염려했지만, 우리는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는 그 어떤 힘의 임재를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이 역사를 올곧게 이끄는 성령의 힘일 것이다.
여하튼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이었던 이문영 교수와 나는 수유리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동아일보사로 가면서 내가 차 안에서 心園의 강연제목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 박사도 흔쾌히 응했다. 그래서 “민족과 교회”를 “민족·민중·교회”로 바꾸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광고란에는 민중이 들어가는 제목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心園은 동아일보 광고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기 강연제목이 바뀌어진 것을 알고, 민중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첨가한 것이다. 이것이 민중신학이란 말을 쓰게된 최초의 단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날 모임은 대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나지만 성명서 5개항 중 하나는 참으로 대담한 요구였다.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최 교수가 안기부에 끌려가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모두가 겁이나서 감히 공론화하지 못했다. 바로 최 교수의 사인(死因)을 밝히라는 당당한 요구였다. 또 하나는 광주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선생이었던 양성우 선생이 “겨울공화국” 시 발표로 추방된 일이 있는데, 그의 복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제3세계의 신학으로 자리잡게 된 민중신학이 이렇게 뜨거운 실천현장에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중신학 얘기를 하니까, 안 박사와 관련된 또 다른 삽화같은 얘기가 생각난다.
나는 7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를 쫓겨나서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개발위원(CCPD)이 되었다. 이 위원회에 참석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1977년인가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열린 회의는 가까스로 갈 수 있었다. 귀국길에 제네바에 들러 하루는 그곳 공원에 갔었다. 공원에서 신사 한 분을 만났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WCC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여기 들렀지요.”
그랬더니, 이 분이 눈이 둥그레지면서,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안병무 박사를 아십니까?”
“예, 잘 알지요. 너무 잘 알지요. 그런데 왜 안 박사에 대해 물으십니까?”
그의 대답은 대충 이러하였다. 자기도 신학자요, WCC에서 일하는데 얼마 전 독일에서 안 박사의 강의를 들었단다. 거기서 그는 전혀 새로운 얘기를 듣고 민중신학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안 박사는 예수 당시 예루살렘 중심 세력과 갈릴리 세력간의 대결을 언급하면서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사람을 〈오클로스〉로 규정하고, 이 민중이 바로 예수께서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었음을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민중 역시 오늘의 〈오클로스〉임을 깨우쳤다고 한다.
“안 박사는 대단한 제3세계 신학자지요. 세계적인 신학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침이 마르게 제네바 공원에서 우리의 안 박사를 칭찬했었다.
70년대 후반 대학에서 추방당한 뒤 재야인사들은 자주 그의 수유리 집에서 만났다. 어렵고 침울할 때일수록 그는 우리를 농담과 해학으로 즐겁게 해 주었다. 때로는 너무 야하고 직설적인 농담도 했으나, 조금도 천박하게 들리지 않았다. 항상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의 인품에서는 이같은 인간적인 향기가 나왔고, 인간적 향기는 또한 그의 인격의 향기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실존이, 고상한 인격의 현존과 함께 있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공교롭게도 중국 땅이었다. 그러니까 1996년 여름이었던가. 중국의 연변대학교와 한국방송대학교는 자매결연을 맺고있는데, 북한의 방송대학교와 함께 사회교육과 원격교육에 대한 심포지움을 열기로 했다. 나는 심양에서 연변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행장에 갔다.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그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훑어 보고 있는데,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기에 뒤돌아봤더니 거기 안병무 박사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지 않는가!
“어떻게 된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옛날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지요.”
나는 그 순간 心園이 죽기 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옛 간도 고향으로 가는 길이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 어린 꿈이 있던 곳,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많은 애국자들이 살았거나 지나간 그곳이 자기의 고향이었으니, 얼마나 가고 싶었겠는가. 지난날에는 몸이 편치 못해 못 갔던 것이 아니라, 정치 상황이 갈 수 없게 했었다. 지금은 갈 수 있지만, 몸이 병들어 자유롭지 못했기에 못 갔었다. 그러다가 그해 그는 단단히 작심하고 연변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고향순례가 되고 말았다.
마침 연변에서도 우리는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는 안 박사, 그리던 옛날 고향을 보고 그의 동심(憧心)은 되살아 난 것 같았다. 하기야 늙었어도 언제나 아이 같은 분이었으니, 되살아날 동심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몸이 불편한데도 마음은 자유로워 그의 고향 간도 땅 한 호텔 라운지에서 활짝 웃던 그 모습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귀국 후 얼마 지난 뒤, 나는 그의 소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죽기 전에 고향을 꼭 보고 싶어 갔구만. 내 예감이 맞았어 …” 라고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이제 그의 들판의 소리, 아이 같은 맑고 깨끗한 소리가 그리워진다.
함석헌 선생이 떠나시고 난 뒤 허전하다 했더니, 서남동 목사님과 문익환 목사님이 가신 뒤 더욱 허전해졌다. 이제 心園마저 가고 나니, 광야의 외치는 그 깨끗한 소리는 끊어진 듯 하구나. 아직도 한반도에는 광야가 넓은데, 광야의 외치는 소리, 〈野聲〉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구나. 이 안타까움이 안 박사를 더욱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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