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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0

안병무 박사의 지성과 인품을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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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문규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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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함께 존경하고 사랑하던 안병무 박사께서 작고하신 지가 벌써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요즘의 한국은 지난 60년대 이후 줄곧 그러했듯이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 속에서 그때 그때를 땜질하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지난 2년 여는 어제 같기도 하고 아득한 옛날 같기도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이같은 착각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고 우리들 모두의 생활 사이클인 것 같다. 이같은 생활습성 속에서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쁜 버릇으로 하여금 우리가 아끼고 존경하는 사람들까지도 쉽게 제쳐 버리거나 잊어버릴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나 그와 같은 버릇이 모두는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의 삶이 새로운 문제에 부딪혀 방황할 때면 으레이 생각이 나고 그리움이 새로워지는 인품들도 있다. 그와 같은 인품 중의 한 분이 나의 경우에는 안병무 박사를 들 수 있다.
내가 접하고 교류한 안 박사님의 경우는 나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밀접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은 나보다 우선 10여 년을 앞서가는 선배 세대였고, 또 활동무대에서도 안 박사님께서는 정통 신학자로서의 길을 걸어왔으나 나는 YMCA를 중심한 청년학생운동 영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들 모두에게 밀어닥친 유신정치문화는 우리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의 각자가 지닌 학연이나 지연 그리고 영역별 활동 분야별로 지탱되던 모든 인간관계들이 각자의 시국관과 기독교적 신념 내지는 신학적인 자기성찰에 따라 재편되어 간 것을 기억한다. 말하자면, 시국이 개발독재체제로 옮겨가면서 이를 액면 대로 지지하는 기독교 세력과 이를 비판하면서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을 통한 선교운동 등을 전개해 가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갔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나는 종래의 막연한 선배 신학자 안병무 박사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새삼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당시의 시국 속에서 신념과 용기가 없이는 이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기독교 안에서도 당시의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편승하는 교회성장 제일주의가 겹쳐서 성장위주의 목회자들과 기복적 교회 대중이 수량적 우위에 서 있을 때였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신체제가 정면으로 등장하면서 반신반의의 많은 지식인들이 의외의 빠른 속도로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그로 편입되어 갔다. 그것은 필경 당시의 권력이 모든 정치적 대안세력들을 체계적으로 해체해 갔고 이를 효율적으로 가속화시킨 데는 당시의 분단논리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활용한 것과 또 국가 통제 하의 개발 논리가 “잘 살아보세”의 국민적 바닥 정서와 UN을 위시한 국제적 기류가 개발우위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이 뒷면으로 밀려나는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에 신학자를 포함한 기독자 교수들 소수와 양심적인 목회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해 온 기독교 운동가들은 소수에 정비례하는 정예부대로 그 동지 의식과 결속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신학자 안병무, 민주화 운동가 안병무는 당시의 우리들이 엮어 가는 민주화 운동 속에서 주옥같은 주도자였다.


II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안병무 박사의 인품과 기질을 몇 마디로 요약 서술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독일인의 빈틈없는 지성적 기풍과 한국 문화 속의 풍류와 멋이 보기 좋게 어울려 빚어낸 인품이라고 평하고 싶다. 안병무 하면 대충이라도 그를 알고 생전에 접해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안병무 이미지를 가질 것이다. 나는 그분을 접해온 단면적인 제한 속에서 세 사람의 안병무를 이해하고 회상한다.
그 첫째의 얼굴은 신학자 안병무 박사다. 그는 서울대학교 학부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한 후 15년의 세월이 흐른 1965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신학부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다. 물론 유학 이전에도 당시의 중앙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 후에는 월간 『현존』지를 발행하면서 예수 이해와 당시의 긴박한 한국 역사 속에서 현존하시는 예수를 간증하면서 그의 기독자의 양심과 예언자적 외침이 시작되었다. 그후 1970년 중반부터 한국신학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의 개성에 넘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신약학 강좌를 통해 펴나갔다.
나는 당시의 안 박사가 한국신학대학에서 펴나간 신약학 강의를 풍문으로 들은 바도 없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한 일도 없다. 그러나 몇 가지의 예증은 들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신학자가 되기 전에 역사학도였고, 그후 먼날에 무르익어 간 “민중신학”의 방법이 철저한 역사고증에 의한 예수와 민중(오클로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민중신학이 체계화하기 전 단계의 그의 논문(“한국 교회의 예수이해”, 1984, 삼민사)을 보더라도 한국 교회가 지닌 초월적 예수상(보수계)이 지닌 비역사적 예수 이해에 대비 예수의 역사적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는 초월적 예수를 잘못되었다고 단죄하지는 않는다. 그는 지적하기를 “한국 교회의 보수계가 이해한 예수의 상은 그리스도이지 역사에 실재한 예수는 아니기 때문에 그는 따르거나 배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배의 대상이다”라고 구분한다. 그리고는 지적하기를 “그러한 초월적 그리스도 이해가 절대로 일정하지는 않지만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상의 일부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문적 추구에 있어 안병무는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서구 신학자들처럼 어떤 방법으로 적용에 실패하거나 역사의 예수 추구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거나 아니면 방법론이 주변에서 맴도는 데서만 어떤 결말이 오리라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의 예수 추구의 노력과 예수를 따르겠다는 정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남을 위한 삶에 엄숙한 한 어떤 방법론에 의한 한계선에서 정지하고 이른바 학문적 유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평신도 신학도의 한계 속에서 안병무의 학문적 태도와 방법,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교훈과 생애를 한국 교회와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따르려는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 구체적 실천이 그의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되어 갔다고 믿는다. 이와같은 신학자 안병무의 삶은 초지일관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그 대가로 1975년 6월의 제1차 교수강제해직 때의 표적이 되었으며, 5년 후에 복직이 되었음에도 굽히지 않는 그의 신념으로 같은 해에 다시 제2차 무더기 강제해직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해인가 분명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80년대 중후반이었던가. 한국 NCC 관련 회의 참석차 같은 비행기로 10여 시간을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안 박사를 옆자리에 모시고 여행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이미 안병무의 이른바 민중신학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나같은 비신학자와의 격의 없는 대화였기에 서로 부담이 없었으나 당시의 열세시간여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긴 시간이였기에 민중신학의 방법론과 그것이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그때 나의 신학적 관심은 예수의 초기 선교시대에 예수를 따른 무리(오클로스)와 하나님의 백성(라오스)에 대한 신학적 구분논쟁에 초점이 가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고 또 지루한 여행 중의 대화였으니 이를 체계적으로 회상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때 나는 그에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대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라오스 이전의 오클로스의 성서신학적 구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렇게 생각한 현실적 이유는 내가 당시 종사하던 한국 YMCA 전국연맹 산하 회원들을 어떻게 하면 각성된 하나님의 백성 즉 라오스(laos)들로 묶어 하나님의 백성운동과 함께 교권적 기독교가 아닌 신도들의 신학(Theology of Laity)과 신도운동(Laity Movement)을 엮어내느냐 하는 과제와 논쟁은 구체적인 운동을 엮어가는 데 필요한 선택된 정예부대(라오스) 동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술적 전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 박사께서는 설익은 후학 평신도 신학도와의 논쟁을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흥분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지나가듯 한마디 하기를 강 총무는 왜 오늘의 한국 YMCA를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으로 교육하면서 구약 시대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한 대목이 기억난다. 그러면서 그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어려움은 서구 신학의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방법을 부정해가야 하는 것임을 비쳤다. 아무튼 유럽행 젯트항공기 상에서의 안 박사와의 긴 신학적 대화는 내게 있어 퍽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자신의 학문적 정열과 노력으로 후학들과의 대화를 소중히 하던 그의 인품의 경의로운 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안 박사가 지닌 두 번째의 얼굴은 민주투사 안병무의 모습이다. 신학자 안병무와 민주투사 안병무를 구분하여 접근하는 일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공정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안병무의 민주화운동은 바로 그의 신학의 연장을 행동으로 옮긴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 “어떻게 살 것인가─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어떻게 살 것인가』, 1984, 삼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역사라고 쓴 말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대명사다. 그 이름으로 나를 비추어 주고 보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현실에서 나에게 명령하는 바를 회피할 도피구는 없다는 신앙을 총체적으로 나타낸다. 민중(이웃)도 물론 바로 ‘역사’의 실체다. 그러므로 민심은 나를 비추는 가장 구체적 거울일 것이다. ‘민중과 더불어’는 그런 뜻에서 ‘역사 앞에’와 동의어일 수 있으나 ‘앞에서’와 ‘더불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주객의 어느 한 입장에서는 안 되고 역사적 연대성과 책임성에서 ‘나’라는 달팽이집 같은 것에 칩거해 버릴 수 없고 오직 행동만이 있는 숙명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명사이고 민중은 역사의 실체”라는 데 그의 신학과 사상이 담겨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그분은 그대로 믿고 살았고, 그렇게 행동하다가 가셨다. 끝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 수절하신 몇 안 되는 선배 지도자의 한 분이다.


III


끝으로 내가 아는 인간 안병무를 회상한다. 그 분은 자신의 신학을 논할 때는 우회하는 일없이 명쾌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교류의 자리에 앉으시면 언제나 우리가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남녀관련 덕담을 터뜨려 좌중의 여성들을 쑥스럽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즐겁게 만들곤 했다.
내가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제네바 본부에서 근무를 마치고 유신체제가 정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1974년에 귀국하여 한국YMCA전국연맹의 사무총장으로 취임해 보니 안 박사께서는 나의 오랜 친구 박영숙 여사와 결혼해 있었다.
박영숙 여사와 나와의 교우관계는 1950년대 초의 부산 피난민 시절로까지 소급한다. 박 여사와 나와의 만남은 당시의 피난 수도 부산에 역시 피난가 있던 연세대 피난학교(명도)에서 전국대학 YM-YWCA 하령회가 개최되었을 때가 시작이다. 그후 우리는 다 YMCA와 YWCA에서 학생부 간사로 일하게 되어 학생 때의 기독교운동 동지로서 각 기관에서 일하며 협력이 오래 계속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후 박영숙 선생은 YWCA연합회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하여 당시의 연합회 사무총장이며 지금의 대통령 영부인이신 이희호 여사의 후임으로 피택되어 1969년까지 7년 동안 YWCA연합회에 봉직했다.
군사독재정치 속에서 박영숙 여사는 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고 그후 당 부총재가 되는데, 1992년 5월에 명동의 서울 YWCA에서 박영숙 의원의 『녹색을 심는 여인』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독서평을 부탁받은 내가 단상에 올라가 보니 운집한 청중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안 박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듣기로는 부인 박영숙의 정치참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꼭 그렇게 사생활도 없는 정치생활을 해야 되느냐는 의견을 들은 일이 문득 회상되어 나는 독서평도 중요하지만 안 박사님께 약간의 아첨을 해드려야 하겠다고 결심하면서 나와 박영숙 여사와의 교우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좌중의 웃음을 유도하려 했다.
나는 말하기를 안 박사께서는 신학적 선견지명뿐 아니라 여인을 보는 눈도 앞서 우리들 학생운동가들의 공동의 짝사랑 대상자인 박영숙 씨를, 지난 30여 년 간 그 누구도 손목 한 번 못 잡아 보았는데, 그만 안 박사님께 빼앗겼다고 하여 웃음이 넘쳐 흘렀다. 나는 안 박사님 위로에 성공한 독서평 역할을 내심 기뻐했다. 식순이 끝나고 다과회 시간에 접어들자 그분이 내 가까이 오셔서 한술 더 떠서 이야기하기를, 너희들 학생운동가들이 박영숙을 가지고 놀다가 쓸모가 없어지니 내게 퇴출시킨 것이 아니냐 하여 더욱 폭소가 일어났다. 때로는 원색적으로, 때로는 지성적으로, 그러면서도 한국적 풍류와 멋을 언제나 지닌 안 박사님의 인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면서 사람을 흡입해 가는 구인력의 소유자였다.
안병무 박사가 지금 살아 있다면 지금의 세상만사를 어떻게 대하고 무엇을 외칠까? 우선 그는 그렇게도 갈망하던 민주화 세력에 의한 정권교체를 기뻐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꼭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지난 날 민주화 투쟁 시대에 함께 싸웠던 유수한 인사들이 더러는 입각도 하고 더러는 그외의 요직에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도 보람으로 여기고 기뻐할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개혁이 이런저런 이유들로 지지부진한 것을 안타까워 할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IMF 사태와 그것을 대응하는 정부의 대책과 국민들의 대응이나 정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분께서도 당혹스러워 하겠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오늘의 시장경제의 세계화 시대가 종래의 주권개념을 크게 바꾸어 가고 있으며 또 시장경제의 실내용도 지금까지의 전통적 실물경제가 주류이던 시대로부터 금융투자가 오히려 주류가 되어가는 오늘의 시대에 크게 당혹해 할 것이 예상된다. 그리고는 국제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금융투자가 갖는 윤리성, 특히 선진 부유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빈곤하거나 개발도상에 있는 약체 자본국가에서 단기자본으로 들랑날랑하는 금융투기들이 수십 년의 피땀흘린 노력으로 건설한 민족경제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때 이같은 경제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어떻게 내릴까?
그분은 학자적 양심에서 이같은 상황에 문제제기는 하면서도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하면서 단정적 입장을 피하려 할 가능성도 예상된다. 이같은 짐작이나 예상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예상에 그친다.
그러면서도 오늘을 바라보는 안 박사의 예상에서 확실하게 느껴지는 예상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거품경제의 붕괴와 그 속에서 희생이 가장 큰 저소득층이나 노동자들의 실업으로 나타나는 고통의 불공정 분담에는 크게 노여워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 거품 시대를 그리워하기만 하는 천민적 민심에는 크게 노여워 할 것도 분명하다.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경제적 사정이나 형편을 크게 벗어나는 대형 교회 건물들이, 지금에 와서 거품 경제에 편승한 일부의 교권적 목회자들의 허명이 오늘처럼 극명하게 드러난 이 시점에 안 박사께서는 얼마나 노여워할까를 생각도 해본다. 한국 교회가 수량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그 선교적 기능보다 교권적 체질로 굳어가는 것을 보고 본인께서는 끝끝내 안수받은 목사되기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끝까지 평신도 신학자들의 모습으로 그 생을 마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
IMF구제금융 이후의 오늘을 공론하는 언론이나 식자들은 건국후 6·25 이래의 최대위기라고들 한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위기를 얼마나 빨리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조급하게 알고 싶어한다. 안병무의 지성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리고 오늘의 경제위기 극복은 지난날의 GNP 일만 불 시대로 돌아가고 나아가서는 어느 전직 대통령이 그렇게 단언하듯이 십여 년 안에 세계의 중심 경제 국가로 부상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탈출하던 롯의 일가족 중 롯의 아내만이 과거에 대한 미련 속에서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한국의 교회들은 이 교훈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안병무의 서거 후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늘의 혼란스러운 세태 속에서 나는 그분을 잃은 지 20년이 되는 듯한 허탈한 심정에 빠진다. 나는 일부러 이 회고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 언급을 피하였다. 왜냐하면 그 대목은 필경 그쪽을 전공하는 후학들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6월 제네바에서 가졌던 어느 조그마한 에큐메니칼 모임에서 좌장을 맡았던 전 WCC의 총무 필립 포터가 내게 물었던 질문을 여기에 소개하면서 그 후학들에게 전한다. 그가 묻기를 “안병무 서거 후 한국의 민중신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느냐”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기 때문에 그 답을 지금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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