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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28

아듀, 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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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볼프강 크뢰거

(Wolfgang Kroeger, 전 재한 독일선교사)

 

독일개신교와 한국장로교의 교회 파트너의 영역에서 과제를 알아보기 위해서, 가족(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과 함께 한국에 간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었던가? 1980년 우리는 이 물음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이것 저것을 생각해 보고서 우리의 학생 동료들 중에 있는 몇 명의 한국 학생과 튀빙겐 개신교 신학부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고 있던 몇 명을 찾았다. 우리는 로이트링겐의 에큐메니칼 교환목사인 박종화 목사와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고 그의 가족과 그리고 친구인 강돈구 씨 가정과 접촉을 가졌다. 1981년 우리는 안 교수가 독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했고, 그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의 물음이 가장 분명해질 수 있었다.

 

첫 번째 만남


우리는, 그 당시 심하게 아파서 치료를 하기 위해서 독일에 왔던 안 교수를 에스릴겐에서 만나서 그와 함께 튀빙겐 근처의 우리의 건물로 향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얘기를 듣고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관찰하고서 우리에게 한국으로 가는 것에 대한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는 우리의 과제가 어떠한 것이 될지 이야기하고자 했다. 한국의 군사독재의 날들을 생각해 볼 때, 절박한 과도기 속에서 외국의 손님으로서, 증인으로서 그리고 비판적인 대화파트너로서의 우리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가 ‘올바른 선교사’를, 완전히 확신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지 않는가? 반대로 우리는 여러가지의 회의와 자기 비판적인 의심을 당연히 가지지 않는가? 나의 이런 생각에 안 교수는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웃음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한국에 충분히 많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선교사들 역시많습니다. 우리의 열광주의에 대해서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비판과 회의적인 목소리를 필요로 합니다.” 가르칠 곳이 없는 교수, 친절하고 확고한 남자, 편안한 손님, 훌륭한 충고자. 안 교수는 이 대화에서 그렇게 보였다,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떠남의 첫 출발은 생각치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 문부성(Kultusbehorde)이 그러한 외국 일에 개입하는 것을 일단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비자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떠나는 대신에 내가 먼저 1982년 봄에 혼자 한국으로 방문여행을 했다. 홍익대학과 연세대학의 몇 번의 강연 후에 나는 수유리에서 다시 안 교수를 만났다. 나의 일기에는 1982년 4월 18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때로는 성공했던 이야기들을 나눈 다음에, 나는 안 교수와 그의 부인과의 만남을 마치 하나의 해방처럼 느꼈다. 안 교수의 거실로부터 아름답게 단장된 뒷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돌들, 작은 나무들, 약간의 잔디들. 평온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이날 밤 안 교수는 나와 함께 근처의 4·19 묘소에 갔다. 무덤에는 슬퍼하는 가족들, 그들에게 공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어디서나 비밀경찰들이 그들의 워키-토키를 숨긴 채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이 안 교수 앞에서-얼굴을 붉히면서-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안 교수 집을 감시하고 가끔 그 가택을 침입해야 하는, 전직 안 박사 담당 경찰이었다. 나는 1982년 4월 18일을 정치적 긴장이 최고점에 달한 놀라운 봄의 저녁으로 기억한다. 계속된 안 교수의 집에서의 식사 때 그의 부인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한국의 여인들이 항상 봉사하는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 교수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루이저 린저와 위르겐 몰트만의 한국 이해에 대해서, 한신대학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그의 좌절된 공동체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그의 이전의 학업친구가―그 사이 그는 서울의 지위 높은 대학 총장이 되었는데― 나에게 웃으면서 며칠 전에 안 교수에 대해서 이렇게 넌지시 이야기했다: “오 나의 친구여, 그는 요즈음 너무나 많은 고민을 갖고 있다네.” 이제 그 “문제아”가 내 맞은 편에 유쾌하고 느긋하게, 여유로움을 가지면서 맑은 정신적 상태로 자의식적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방문하는 것조차 걱정한다네.” 이것은 그래서 기회주의자로 여겨진 신학동료에 대한 경멸적인 판단이었다. 안 교수는 1975년도에 대학으로부터 쫓겨났고 1976년에 정치적 이유 때문에 체포되어 몇 달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어떤 흔들림도 그리고 어떤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본회퍼와 같았다: “… 당신은 종종 나에게 말했다 / 나는 나의 감시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 자유롭게 친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 마치 내가 기도해야하는 것처럼.”

 

몇 년 동안의 협력과 대화

 

우리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놀랍고 강렬한 시간을 체험했다. 우리는 독재 정권의 몰락도(그리고 체류탄가스도)열광적으로 함께 경험했으며, 그리고 1988년 야당과 교회 안의 분열에 실망도 했다. 한국에 4년 체류하는 동안 우리는 안 교수와 그의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신학과 정치-경제적 발전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 독일에서의 경험과 한국적인 개념 그리고 사고구조에 대한 교환, 공동번역,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작업 그리고 강연에서의 공동작업, 이 모든 것이 거기에 속한다. 그러나 역시 공동의 식사, 다시 아픈 안 교수에 대한 방문, 유쾌하고 침묵 속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것(억지로 대화를 계속하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그는 새로운 주제나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안 교수가 우리를 4월 19일(1960년 이승만에 의한 학생 학살의 날)에 그의 정원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의 아침식사에 초대했을 때, 우리는 만남의 기쁨을 맛보았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한다.

 

대학원에서 인기 있는 시간

 

1984년 안 교수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로 되돌아 왔고, 한신대 대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우리가 1984/85 겨울에 한국에 다시 왔을 때, 안 교수는 나를 자기의 대학원 세미나에 참여시켰다. 어느 수업 시간이 무엇보다도 나에게 오늘날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기꺼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에 대해서 강연하려고 시도했다. 동시에 “비-동일성(Nicht-Identitat)”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대량학살(Holocaust)에서 발생한 것을 “동일성의 이론”에서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그래서 신학적인 실존은 비-동일성과 고통스러운-물음에 열려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했다. 안 교수는 이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영어로 된 설명에 제대로 된 이해없이 뒤따르고 있는 학생들을, 몇 가지 질문, 즉 도대체 기독교가 “동일성의 이론”인지 “비동일성의 이론”인지를 가지고 심문했다. 학생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화해”, “구원”, “구제”와 관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동일성”에 대해서 변호했다. 안 교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동일성의 이론과 실제”로써 열렬하게 변호하고자 하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주었다: 십자가의 볼품없는 자는 그리고 안 교수는 자기의 팔을 쫙 폈다―비동일성의, 찢어짐의, 침묵할 수 없는 고통(한)의 표현이다.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고통의 소리를 질렀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찢겨짐 속에서 구원과 해방을 갈망한다. 거기에 대한 반대로 스스로 낮아지고 친절하게 웃는 부처는 최후의 동일성의 상징이다.

 

안녕!

 

많은 것을 기억하고 종이 위에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백을 없애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1988년에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7년 후에 나와 나의 안사람은 2주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1995년 가을 우리는 안 교수를 서울의 남쪽에 있는 그의 새로운 집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가 들어갈 때, 그는, 한국의 교수는, 정원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우리는 그의 연구실에서 함께 정치, 신학, 친근한 주제들에 대해 논했다. 우리는 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죽음이 가까왔음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저술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여인이 아들에게 인간성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민중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로 멸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곁에 머무르고, 그 다음에는 아들과 함께 도망하면서,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어떻게 희생했는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가르쳤는지를. 물론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자립한 이 여인이 자기 아들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의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말했다. 우리는 함께 침묵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자신을 자율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하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때 그때의 우리 문화의 전통 속에서 마지막으로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등등의 물음이 우리에게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감사가, 우리가 안 교수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집 앞의 작은 도로에서 아주 뜨거운 마음으로 그는 우리를 껴안고 이별했다. 우리는 그와 그의 부인에게 “안녕”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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