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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2

“그 쪽 학교 선생은 진짜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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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창락

(한신대학교 교수)


길가던 어떤 청년이 우물가에 드러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면서 이 청년을 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다. 부유한 늙은 상인 내외는 마차 바퀴를 수리하느라고 잠시 우물가에 멈추었다. 그들은 평화롭게 잠든 이 청년의 준수한 얼굴에 감명을 받아서 그들의 재산을 상속할 양아들로 삼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막 깨울까 하는 순간에 마부가 마차 바퀴를 다 수리했다고 해서 그냥 떠났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부잣집 아가씨가 다가왔다.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젊은이의 용모에 빨려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왕벌 한 마리가 젊은이의 눈가에 앉으려 했다. 위험하다 생각해서 벌을 쫓으려고 손수건을 내저었다. 손수건 끝자락이 젊은이의 얼굴을 스쳐서 하마터면 젊은이가 깨어날 뻔했다. 아가씨는 아차! 하면서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험상궂은 노상 강도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젊은이의 보따리를 훔쳐 가려고 한 사람은 칼을 젊은이의 목에 들이대고 한 사람은 베개 삼아 자는 보따리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에 사냥개가 한 마리 나타났다. 그들은 사냥꾼이 가까이 이른 줄 알고 도망쳤다.
이것은 나타나엘 호손의 어느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잠깐 사이에 이 젊은이에게 인생의 운명이 판이하게 여러 갈래로 바뀔 뻔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실제로 이러한 운명의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1967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대광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학교에 문리대 종교학과 출신으로서 독일어를 담당하시는 선배 한 분이 있었다. 그는 내가 한 때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학과 과목을 열심히 수강했으나 지금은 포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그는 나더러 중요한 곳이 있으니 같이 놀러 좀 가 보자고 제안했다. 독일에서 공부하신 유명한 분들이 와 계신다고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세운 상가 3층인가 4층인가에 자리잡은 중앙신학교였다. 야간 신학교인지라 그 때 마침 이 교실 저 교실에서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는 어느 교실에 나를 밀어 넣으면서 한 번 들어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당시에 중앙신학교에는 안병무 교수, 허혁 교수 두 분이 계셨다. 내가 처음 들어간 강의실이 안 교수의 교실인지 허 교수의 강의실인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강의 내용에 완전히 도취했다. 신학이 이런 것이라면 신학을 다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날 밤에 당장 입학 수속을 했다. 이렇게 하여 나의 인생의 방향이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길로 굳어진 것이다.
나는 극보수적 근본주의적 신앙을 물려받고 자라났다. 일찌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신학에 관심을 두었다. 그렇지만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타락이라 생각했다. 신학을 연구하되 세속 직업에 종사하면서 교권과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신학을 연구해야 올바른 신학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격식에 매이기 싫어하는 내 성격 탓인지 혹은 함석헌 선생의 어느 글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교육을 망치는 것은 사범 교육이라고 하신 어느 구절 말이다. 한국의 신학을 망치는 것은 신학 교육이다라는 식으로 그 말씀을 내 멋대로 신학에 적용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교수가 되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다고 일찍부터 진단을 내렸다. 문리과 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1학년 때부터 전공 이외에 신학 연구와 관련되는 모든 과목에 열중했다. 신학 연구의 기초 과목으로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학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흐뭇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재학 중에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내 신앙과 진로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목숨을 걸고 고수하려 했던 보수주의 신앙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영문학의 전공자로서 내가 문학에 별다른 소질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 영문학 교수가 되어 봤자 3류 교수밖에 될 수 없지 않는가. 궁여지책으로 영어학의 길도 생각해 보았다. 영어학과 국어학을 접목시켜 한글의 문법을 완전하게 정립하는 것도 역사에 공헌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언어학과 계통의 과목을 부전공처럼 많이 수강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도 일생을 걸기에는 아쉬운 데가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 2년 동안 교육에 열심히 투신했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의 허전한 공간을 메울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교에는 사표를 냈다. 그 시대의 유행이기도 하고 또 내 개인적 고민과 관련도 있어서 실존철학에 매혹되었다. 모든 문제가 다 철학으로 해결되는 듯 느껴졌다. 학업에만 열중하고 싶었지만 생계 문제로 다시 고등학교 교단에 서야 했다. 여기서 만난 나학진 선배(나중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은퇴하심)가 나와 안 선생님 사이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이다.
중앙신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문리대 영문과 후배 K씨(현재 인하대 철학과 교수), 문리대 독문과 출신 L씨(현재 한신대 기교과 교수)도 나보다 먼저 학생으로 출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 선생님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놓고 독일어 문헌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에 사실로 내 독일어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독일어를 모른다고 대답하기에 창피하기도 하고 또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공부하면서 해 낼 요량으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독일어 고전 한 권을 꺼내 주시면서 세 사람이 나누어서 읽고 와서 매월 번갈아서 발표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고문장과 같았다. 짧은 독일어 실력에 무슨 내용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면서 무식을 유감없이 폭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중앙신학 시절의 안 선생님의 신학은 독일의 비평적 방법론과 불트만의 실존신학에 바탕을 두었다. 그 당시에 나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던 터라 역사비평적 분석이나 실존신학적 해석은 신앙에 대한 지적 번민으로부터 나를 구출하는 속시원한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불트만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흠모했다. 나는 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안 선생님의 강의는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매번 속 시원하게 날카로운 송곳으로 핵심을 꿰뚫는 것이었다. 군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었다. 어떤 해석이든지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여서 전달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예리한 통찰력은 이론의 요점을 파헤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속마음까지도 환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 앞에 있으면 그분의 수정같은 맑은 마음 거울에 내 마음속의 모든 너저분한 것까지 비추어져서 남김 없이 폭로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의 약점을 빌미로 해서 남을 무시하는 사디즘적 도덕론자가 아니었다. 누구의 약점이건 그것은 인간 공통의 약점으로 보고 함께 괴로워하는 다정다감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고고히 떨어져 있었다. 안 선생님은 민중신학을 하신 이후부터 이 싸늘한 위엄과 점잖음이라는 장벽을 스스로 철폐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파격적인 유머도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의 유머에서는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격식과 허울이 통쾌하게 허물어졌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단 한 가지 한계선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감히 안 선생님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는 것이었다. 모든 권위가 허상으로 폭로되는 그 자리에서도 당신 자신은 투명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권위의 휘장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중앙신학교 시절에 안 선생님과 나는 수유리에 살았기 때문에 수업이 끝난 후에 택시를 같이 타고 귀가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는 터인지라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안 선생님은 단 한 번도 내가 차비를 부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안 선생님이 학생들과 더불어 혹시 다방이나 음식점에 가는 경우에 언제나 당신이 부담하지 학생들이 내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1973년 가을, 나는 신학 수업차 독일로 떠났다. 거기에는 꿈에도 예측하지 못한 많은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3년이면 국내에서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해가 아닌가. 유학생들과 교포들은 해외의 자유로운 여건 하에서 국내의 정치적 문제를 활발히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실존주의 신학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이 정치와 같은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신앙의 타락으로 여기던 참이었다. 독일에는 먼저 온 대학 시절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국내 문제로 자주 모였다. 처음에 나는 정치적 의식은 전혀 없으면서도 친구의 권유로, 또는 다른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그들의 모임에 끼어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현실 문제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 때까지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던 실존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과 같은 진보적 신학의 물결이 도도하게 파도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내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70년대에 국내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나는 실존주의 신학의 범주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학생활을 통해서 얻은 가장 귀중한 자산은 나의 신학적 입장이 탈바꿈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 신학에서 민중해방의 진보적 신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로부터 내가 사는 기숙사로 전화가 왔다. 안 선생님이었다. 아마 70년대 중반 어느 해인 것으로 기억된다. 안 선생님은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도 있지만 하이델베르그를 구경도 할 겸 당신이 계신 곳으로 내가 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나는 곧바로 하이델베르그로 달려갔다. 선생님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유서깊은 건물들, 궁성의 유적들을 설명해 주시고 시내 관광을 마친 후에 그 유명하다는 철학자의 길을 거닐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작별할 때에 내 손에 무엇인가 꼭 쥐어 주셨다. 나는 길게 사양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돌아오는 즉시로 마인츠 대학의 한국 유학생 몇 사람을 불러 모았다. 나는 그들을 시내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근사하게 저녁을 한턱 내면서 “우리 선생님이 오늘 나에게 300마르크 주셨다. 그래서 한턱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 쪽 학교 선생은 진짜 선생님입니다”라고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응답했다. 사실 모교의 교수들이 유학생을 찾아 와서 숙식이며 관광이며 선물이며 등등의 일로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짐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제자에게 이렇게 도움을 주는 선생을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안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그는 나에게 지식만을 전한 분이 아니시다. 그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신 분이다. 나로 하여금 신학을 새로 시작하게 했으며 독일 유학의 길을 터 주었으며 한신에 몸을 담고 신학이 나의 최후의 생업이 되게 하신 분이 안선생님이다. 안선생님과의 해후가 없었더라면 내 인생 행로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며 나는 섬뜩한다. 나는 아마 실존주의 철학이나 요즈음 그 유행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을 떠벌리면서 역사니 사회니 하는 인간 공동체에 관한 문제에는 눈과 귀를 막은 채 삭막한 관념의 숲 속을 거닐며 알량한 도사 행세나 어설프게 흉내내는 하찮은 지식 소매상 인의 하나쯤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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