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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7

예수의 얼굴을 닮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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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경호

(강남향린교회 담임목사)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와 교회.” 그리 썩 어울리지 않는 주제라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민중신학이 신학의 영역을 교회 밖의 민중해방의 사건, 역사의 현장으로 확대시키면서 기성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진행되었기에 일반의 의식 가운데는 안 박사님은 교회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박사님께서 향린교회와 한백교회를 설립하셨고, 말년에는 강남향린교회를 설립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강남향린교회는 향린교회의 창립 40주년 기념교회로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향린교회의 설립 당시부터 안 박사님을 비롯한 창립 동지들께서 가지셨던 ‘분가선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향린교회는 설립 당시(1953년)부터 분가선교의 꿈을 가졌다고 한다. 그 당시 아직 우리 사회에서 대형교회가 등장하지도 않았을 때이다. 일찌감치 성장 위주의 교회, 숫자적 확장만을 교회의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한 폐해를 예견하고 교회가 발전해가면서 ‘분가’의 형식으로 선교해 나갈 것을 내다보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안 박사님께서는 이 분가선교에 대하여 남다른 열정을 가지셨다. 향린교회가 홍근수 목사님의 통일선교와 진보적인 목회에 대해 교회 내의 의견이 엇갈려 있을 때에도 홍 목사님과 반대 입장에 있는 분들에 대해 안 박사님께서 중재를 하시면서 이 분가선교를 대안으로 내놓으셨다. 아주 구체적인 재산의 분배에 대한 안까지도 내놓으셨다. 교회가 큰 위기의 상황에 빠졌을 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분가선교’의 꿈을 이루시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 박사님의 계획은 지금은 향린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분들에 의해서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으나 나중에 번복함에 따라 무산되었다. 안 박사님께서는 이 때 몹시 이를 못마땅해 하시고 향린교회의 설립 동지이기도 한 이분들과 아주 거리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 홍근수 목사님께서 통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후, 교회의 창립 40주년 기념교회를 분가선교의 방식으로 설립하자고 제안하셨을 때, 안 박사님은 누구보다 기뻐하셨고 이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셨다.
필자가 안 박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느끼는 바로는 안 박사님은 교인의 숫자가 증가할 때의 대안으로 분가선교의 꿈을 가지기도 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분가할 만큼 숫자가 증가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서 자연적으로, 안 박사님 말씀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의견 분열과 그로 인해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게 됨으로 생기게 되는 공동체의 균열의 틈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 ‘분가선교’라는 안 박사님의 지론을 귀띔해 주신 적이 있다. 이 틈이 보였을 때 지나치게 하나라는 데 집착하여 마음을 상하고 서로 상처입기 전에 능동적으로 이 일을 수습해 나가는 방법이 ‘분가선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 교회의 역사가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이셨다.
강남향린교회가 설립된 것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분가라고 하겠다. 강남향린교회 설립 당시 안 박사님께서는 이미 건강이 상당히 안 좋으셔서 봄마다 병원에 입원하시던 때인데도 조금 회복이 되시면 가족들이 만류하는 가운데서도 강남향린교회 강단을 맡아 주셨고 강남향린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교회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관심과 충고도 아끼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 교회 설립 취지를 알릴 때도 필자와 안 박사님의 공동의 명의로 교회의 설립 취지를 홍보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젊은 혈기에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안 박사님께서는 ‘전통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형식과 틀들을 너무 깨지 말 것’을 권유하셨고, 교인들이 교회를 찾게 되는 향수를 무시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틀들을 너무 깰 경우 오히려 교회라기보다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오래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며 안 박사님의 경험담에 비추어 “새로운 교회를 하기보다는 가장 교회다운 교회, 가장 예수의 실천에 맞닿아 있는 교회”를 할 것을 당부해 주셨다.
이런 맥락에서 아주 구체적인 당부도 하셨는데, 우리 교회 예배에서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시간을 없애고 뒤에 마련한 함에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운영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며 예배시간에 헌금을 거두는 것을 제안하기도 하셨다. 상당히 의외로 생각되었다. 자율적인 방법이 좋기는 하지만 저렇게 해서 교회 운영이 되겠는가 하는 염려가 앞섰던 것이리라.
가끔 저를 만나 개척교회 목사로서 “생활은 제대로 되는가? 목사라도 배고프면 도적질 할 수 밖에 없는데 …” 하시며 염려를 해 주셨다. 우리 교회에서 찬송가를 보충한 새로운 노래책을 만든 것을 보시고 예배에 부르는 찬송에 대해서도 너무 참신한 노래―예를들면 운동가나 노동가 들은 교회다운 푸근한 마음과 보다 다양한 층을 포용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며 참신하되 교회다운 분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귀한 경험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 교회의 설교를 맡아 주셨을 때에 교회 내에 무슨 일이 없는가를 묻기도 하셨다. 혹 어떤 어려움이 감지된다면 목회자의 지도력을 세워 주는 쪽으로 말씀하셨다. 교회가 바른 방향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물론 대전제가 되는 일이지만 일단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우고 일을 맡기게 되면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 놓고 흔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신뢰하고 함께 협조해 나가야 됨을 말씀하셨다.
교회라는 조직과 운영, 교인들의 정서와 지도력까지를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는 자상함에 글과 강연을 통해서 만나는 힘찬 기상의 민중신학자의 또다른 세심한 배려를 만날 수 있었다. 흔히 안 박사님에 대해서는 교회, 목사, 조직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그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을 때 그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목회자나 당회를 위해 존재하는 권위적인 소수의 교회, 역사의 부름에 뒷걸음질 치는 반(反)역사적 반민중적 교회가 되기 쉽다. 이런 때 안 박사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한 목소리로 이런 교회를 배척하시고 질타하신다. 그러나 이런 모든 조건들을 넘어서 예수를 따르는 실천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이런 요소들이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목표의식이 분명한 공동체라면 오히려 이런 요소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교회가 성립되는 데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안 박사님께서는 또한 동시에 민중교회들이 70, 80년대 역사의 중요한 몫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에 소홀히 함으로서 쇠퇴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와 하셨고 한편으로는 책임감을 느끼기도 하셨다.
필자가 대한 안 박사님은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가 진정한 예수의 공동체가 되기를 갈망하셨던 분이다. 교회의 모습을 벗어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를 거부한 교회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고 거침없이 비판하셨지만 비록 한, 둘이라고 할지라도 바른 교회의 모습을 세워가야 한다는 데는 민중신학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중점을 두시고 애정을 표현하기도 하셨다.
말년에 안 박사님께서는 우리 문화, 우리 사상에 심취하셨던 것 같다. 홍근수 목사님께서 옥고를 치르시던 초반에 안 박사님께서 향린교회의 강단을 한 달에 한 번씩 맡아 주셨다. 설교 중에 예배 시작 할 때 징을 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셨다. 필자의 생각으로 안 박사님의 취지에는 100% 동의하지만 예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만을 우리 식으로 바꾸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 전체적으로 예배의 순서 중에 우리 가락, 우리 문화를 도입하는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안 계시고 그 당시 부목사였던 필자가 임시로 대리 당회장을 하고 있을 때 예배 순서를 크게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달 후 안 박사님께서 다시 오셔서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예배 시작할 때 징치는 일은 다 찬성하는데 김 목사만 반대하는 것 같다며 뼈 있는 농담을 하시었다. 후에 제 입장을 설명드리며 예배 순서를 그대로 놓아두고 징만 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그것은 마치 서양 양복을 입고 갓을 쓰고 나오는 것과 같기에 거기에 걸맞게 예배 순서도 함께 바꾸는 것이 좋은데 홍 목사님께서 출옥하신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안 박사님께서는 “첫 술에 배부른 것 아니니 일단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셔서 안 박사님께서 여기에 간절한 의지가 있으시구나 하는 것을 읽고 옥중의 홍 목사님과 당회의 재가를 얻어 예배에 징치는 것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여러 교회가 징을 치고 있지만 이것이 처음 시작이라면 안 박사님에게서 유래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안 박사님은 우리 문화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셨다. 후에 강남향린교회 예배에서 모든 예배 음악을 우리 가락으로 하고 우리 문화를 도입한 새로운 예배형식을 정착하게 되니 안 박사님께서는 “우리 가락, 우리 몸짓으로 예배드리니 이렇게 편안하고 마음이 푸근할 수가 없다며 강남향린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것이다”고 극구 칭찬해 주셨다. 그러면서 “나이가 먹으니 우리 것에 심취하게 되고 우리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며, 그 당시 쓰시는 글과 관심사항이 우리 문화, 우리 사상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다.
안 박사님께서 얼마나 교회다운 교회를 갈망하셨는가는 강남향린교회의 설립예배 시 눈물로 호소하신 말씀 가운데도 잘 나타난다. 그 당시 안 박사님께서는 몹시 건강이 안 좋으셨고 병원과 댁을 오가며 생활하실 때이다. 주치의인 홍창의 장로님께서 한 발짝도 움직이면 안 되고 절대 안정하라고 하셨는데도 뿌리치고 강남향린교회에 설립예배 축사를 하시기 위해서 참석을 하셨다. 예배실 외에는 따로 쉬실 방도 없는데 뒷자리에 비지땀을 흘리시며 부축을 받고 앉으셨다. 그만 들어가셔도 좋다고 해도 사양하시고 기어이 축사를 맡아 주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 생생한 말씀을 잊을 수 없다. 말씀을 주시는 동안 몇 차례 눈물을 보이시기도 하고 아예 소리내어 우시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의 그러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장내가 숙연해지고 마치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시는 듯한 비장한 말씀과 눈물어린 호소를 그당시 참석했던 모든 교우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의 비장한 안 박사님 말씀은 안 박사님의 교회론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여기 선생님의 그 마지막 비장한 말씀을 지면에 옮겨보며 교회다운 교회를 끔찍이 사랑하신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 본다.


‘우리가 세상에 뭐 할라고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 그게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세상이 무슨 소리 무슨 소리 해도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 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 남을 괴롭히려는 얼굴, 별의별 얼굴이 다 있는데, 그 중에 참 평화로운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하고 한탄한 시가 있습니다. ‘세상에 왜 왔나? 얼굴 하나 보려고 왔지.’ 그 말이 제겐 언제든지 마음에 새겨집니다.
예수가 세상에 온 다음에, 사람들이 각기 예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까? 율법주의에 젖은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율법에 상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주의란 것이 오래 판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니 지금 시대가 달라졌는데 율법적인 시각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려선 안 된다.’ 헬레니즘, 특히 그레꼬-로마 문화에 적응하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자, 그래서 발전된 것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서가 모두 희랍어로 된 것처럼, 그쪽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본 얼굴인 갈릴리의 시골 농민, 목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미국 사람 얼굴 같은 희한한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맨 처음의 얼굴은 수염이 없었어요. 수염이 없으니까 좀 권위가 안 선다는 말이에요. 나도 미국에 갔을 때, 어떻게 해서 중앙신학교에 가르치러 갔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교수’라고 그랬거든. 그런데 나이는 25살밖에 안 먹었는데, ‘교수’란 당치도 않았단 말이에요. 할 수 없이 수염을 길렀어요. 그랬더니 겨우 30쯤 보더라구요. 예수의 얼굴에 수염이 길기 시작했어요. 맨 처음에 그린 얼굴에는 수염이 없어요. 그 다음에 수염이 점점 길어졌어요. 왜? 법왕하고 대립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권위는 더 있어야겠기에 예수의 수염이 점점 커졌어요. 대립관계 때문에. 여러분이 보는 사진은 예수의 얼굴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성서엔 기록이 없어요. 키가 큰지 작은지, 미남인지 추남인지, 멋있는지, 유모어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절대로 예수의 생긴 건 언급을 안했습니다. 그건 묘한 일이죠. 어떨 땐, 예수의 얼굴이 그리워서 예수의 모습이 어떤가 단서를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어요.
어쨌든 율법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예수를 율법이라는 큰 상에서 그리려고 했는데 이런 일은 바울 전에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레꼬-로마, 즉 헬레니즘 영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 얼굴 가지고는 안된다, 촌스럽다, 농사꾼 가지고는 안 된다. 그래서 발전시킨 것이 그레꼬-로마의 얼굴하고 비슷한, 또 거기의 사상하고 상당히 비슷한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게 지금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여러분이 죽어라고 고수하고 있는 것, 그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맞게 그린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그들에게 맞게 그렸어요. 수염도 많이 났고, 털도 만들었고. 특히 그레꼬-로마의 신인사상이란 게 있어요. 신이며 더불어 사람이란 사상이 있는데, 그걸 예수에게 꽉 맞췄어요. 세상에 해괴한 존재 중에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란 거예요. 그런 괴물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면 사람이고, 신이면 신이지. 신이 완전한 인간이란 것은 희랍문화에 의해서 된 겁니다.
그리고 점점 기독교가 발전하여 중세기를 지배했습니다. 여기에 나쁜 동기가 하나 들어갔습니다. 로마제국과의 세력을 경쟁하려니까 비슷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얼굴도 비슷하고 교리도 비슷하게 만들어서 경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린 그 유산을 많이 받아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서방 종교, 서방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서방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권력과 야합한 서방 기독교입니다. 그 전통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거기에 대립해서, 동방 기독교라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 얼굴이 진짜 얼굴이 아니다, 예수는 겉모양으로, 이론적으로만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예수는 신비한 존재이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신비한 관계이다. 말로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방향으로 예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중심이 된 것이 동방교회입니다. 그것이 러시아로, 희랍으로 퍼졌습니다. 둘 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느냐 하면, 서방교회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 중 하나인 서방교회만 택했고, 동방교회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릅니다. 같은 분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우린 하나밖에 모릅니다. 이게 절대보수라는 겁니다, 절대보수. 이걸 지키면 죽는 줄 알고 있어요. ○○○ 같은 소리에요. 그러면 동방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보가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처럼 나는 살고 싶다. 예수처럼 살고 싶은데, 예수의 모양대로, 그의 걸은 대로, 그의 입은 대로, 그가 굶은 대로. 그가 장가 안갔으니 나도 장가 안가고, 그가 소유를 안했으니 나도 소유 안하고. 되도록 그 길을 따라가겠다. 예수를 닮는다. 따른다가 아니고 닮는다.’ 그런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게 뭔지 압니까? 그것이 수도원의 시작입니다. ‘큰 세계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우리끼리라도 좁혀서, 요 영역 안에서 조건을 맞춰서 예수처럼 살도록 하자.’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 성 프란치스코도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어서 연애감정도 있고, 특히 크레라라는 여자를 아주 사랑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했어요. 연애감정도 없으면, 그것도 사람인가요, 뭐? 성 프란치스코도 크레라라는 여자를 죽도록 사랑했는데,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 안 되겠기에 수도원을 이루어서 수도원장이 되었고, 크레라도 그것을 못견뎌서 여자 수도원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성프란치스코는 너무 그립지만 만나면 안 되겠고 해서, 눈이 오면 사람, 크레라라는 모습을 만들어서 그걸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엉엉 울었대. 그건 진짜인지도 모르지. 난 이해가 돼. 왜냐하면, 나는 본능이, 정열이 굉장히 강하니까. (웃음) 어쨌든 예수처럼 살자는 그 운동을 난 높이 평가합니다. 무소유로, 가정 안 가지고, 아무 보상도 없이, 노동과 기도와 성서 읽는 것과 남을 돕는 것으로 전체로 다 바치는 것, 그 수도원의 전통이란 걸 기독교에서 절대로 버려선 안 되는 거야. 그걸 두루두루 유지해 왔는데 마르틴 루터라는 엉뚱한 녀석이 수녀를 훌딱 가로채 왔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다른 수도사들이 나도나도 하면서 모두 장가를 갔어요. 그들이 예수를 앞세웠지만 그들 속에 뭐가 있었다는 게 증명이 되지. 그러고서 예수의 얼굴이 어떻게 되든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이런 많은 과정에서 찾으면 많지만, 좋게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뭐하러 왔나.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보자 그거죠. 왜 교회가 여기에 하나 섰나? 많은 교회들이 모두 그리고 있는 예수의 얼굴이 틀렸다. 우리 바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거죠. 김 목사, 안 그렇소? 나도 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지금 90% 이상의 한국 교회가 예수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느 밑에 있는지 알아요? 놀랍게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거슬러 올라가서 두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율법주의로 그대로 지키고 있고, 그 밑에서 예수를 봅니다. 또 하나는 그레꼬-로마의 밑에서 얻은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강제하고 고집합니다. 그것을 떠나면 이단자로 몹니다. 그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Christianity without Jesus”, 예수 없는 기독교,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배제했습니다. 왜? 예수는 우리에게 거리끼니까, 그대로 수용했다가는 팬티까지도 다 빼앗길 걸.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더 나가면 팬티까지도 벗어주라는 말이 되니까, 난 그건 죽어도 못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라, 그건 난 못한다. 그러니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는 좀 배제하자. 그래서 예수는 아니야. Christianity라는 데로 흡수해 버리자.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설립된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도로 살려보자는 겁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지도 않았어요. 의미가 없어요. 안 그린 겁니다. 교리를 얘기하고 율법을 얘기합니다. 아직도 토라가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김 목사는 어떤지 몰라. 우리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려보자. 예수의 얼굴은 신비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고행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개인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유야 어쨌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다. 자기 위해 죽은 것은 아니다. 뭔지 미지수는 많지만 그는 남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다 쏟은 이다.
(여기서 한참 말씀을 멈추시고 울먹이셨다)
왜 우리는 세상에 왔나? 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나? 하도 예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그리고 있으니까, 나는 비록 못났어도, 내가 예수의 뒤를 따르지 못해도, 내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과 내 모습이 너무도 달라도, 내가 그린 예수의 얼굴이 나를 마구 짓밟아도, 내가 모욕당하고 심판을 받아도 예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자. 그 용기를 갖자, 나와 일치시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예수의 얼굴을 이렇게 그려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아니야 내가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그의 모습은 정직하게 그리자. 세상에 그대로 드러내 놓자. 세상에 예수는 있다. 지금도 살아 있다. 2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다. 오늘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 우리의 거리에 살아 있다.
(다시한번 우시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에는 없다. 교회에는 없다. 순교하는 놈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교회 밖에는 있다. 자꾸 죽어가지만 교회에는 없어, 이젠 안해. 어떤 감독이 ‘나는 필요하다면 예수를 위해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고 하니까, 키에르케고르가 글로써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100% 믿는다. 필요하다면 순교를 당할거다. 그러나 너는 절대 필요한 조건을 만들지 않을거다.’ 흥 그렇지 안 만들지 뭐. 모두들 얘기하기를 ‘아 세상에 죄가 너무 많고 …’, 그런 소리하지요.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하면서 슬슬 피하는 거죠. 무슨 죄요? 하고 물어보면, ‘내 죄로소이다’, ‘내 탓이요’ 하지요. 그렇게 크게 써 붙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붙일 사람이 따로 있지. 우선 추기경의 문에다 붙이고, 윗 놈들한테 붙여야지. 왜 밑에 사람한테 붙여! ‘우린 당한 놈이요’ 그렇게 붙여야지. (웃음)
김 목사님, 오늘 너무 한계를 지어놔서 운신의 폭이 좁을 줄은 모르나,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리시오. 당신이 망해도 예수는 살아야 하니까. 세례 요한의 말대로, ‘당신은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 그 말을 당신 지키시오. (다시 말씀을 잇지 못하시고 우셨다)
지켜야지. 세상에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 (혼자말을 하듯 말씀을 마무리하시고 울면서 강단을 내려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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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들의 소리〉 心園 안병무 박사를 생각하며
허병섭 한 제자의 몫 -민중신학 실천의 새 지평을 위하여
홍근수 안병무 교수의 삶과 유산
홍창의 『野聲』과 안병무
황성규 나와 스승 안병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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