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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4

두 전선에서 싸우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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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원돈

한신대학교 교수
정치상황이 몹시 경색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내가 신학교에서 안 선생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기간은 통틀어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1975년에 신학교에 들어간 후 한 달쯤 지나서 선생님은 해직되었고, 서울의 봄 시절 다시 학교로 돌아오셔서 예수와 오클로스 세미나를 5월 초순까지 진행하시다가 다시 해직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제도교육의 장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일은 그러므로 거의 없는 셈이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동아일보 등에 실린 선생님의 짤막한 글들을 읽은 적이 있다. 예수가 억눌린 사람들, 빼앗기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오셨고 그들과 더불어 계셨다는 것을 강조한 글이었는데,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필치여서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나는 『현존』이나 『신학사상』, 그리고 시사종합지들에 실린 선생님의 글들을 읽곤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 비판적 거리, 성찰과 자기성찰 등과 같은 개념들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와 민중을 직결시켜서 역사적 예수를 보는 선생님의 관점이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후에 스스로 근본적인 수정을 가한 것이지만, 그 당시 나는 분열된 세계에서 “편듦”이 갖는 해석학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예수와 오클로스 세미나에서도 이 둘의 관계를 주객도식으로 풀어서는 안 되고 “예수운동”의 틀에서 접근하여야 한다는 선생님의 방법을 듣고서는 “선생님, 그러면 이데올로기 비판의 거점이 확보되기 어렵지 않습니까?”하고 순진하게(?) 질문한 적이 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선생님을 도우며 일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면접을 하러 가니까 선생님께서 “아, 너구나!” 하고 반기시던 기억이 난다. 연구소에서는 군목으로 근무하기 위해 3년 여 떠나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약 12년간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나는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시며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군목 근무를 마치고 연구소로 복귀하니까 선생님은 제자들과 준비된 대담시리즈를 나누고 계셨다. 이 대담에 참여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고 토론하기도 하였는데, 그 때에는 선생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쥐어짜서 그분의 생각을 잘 배울 수 있을까 골몰하였다. 선생님과 토론하면서 그분이 굉장히 파격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신이 났고, 그러면서도 낱말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선택한다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대담을 통해서만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고,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도, 야유회에서 “한오백년”을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연구소 간부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리고 후배들과 제자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태도가 좋았고, 결벽에 가까우리만큼 자기 자신을 관리하시는 모습이 좋았다. 한번 일을 맡기면 일하는 사람의 자율적인 판단과 처리를 끝까지 지켜보며, 결코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음이 상한 어떤 제자가 선생님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우는 것을 보고서는 그분의 인격에 감동받았다.
한번은 연구소 직원들이 세미나를 해서 논문을 함께 쓰기로 하였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내 이름으로 글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신학사상』에 실린 “민중문화운동의 민중신학적 수용”이라는 글이다.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잘 썼다”고 기뻐하셔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 이 글에서 나는 분열된 세계에서 “편듦”의 실천적 의의와 해석학적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그 후 내 이론의 대강의 골격을 제시하였는데, 선생님은 내가 전개하는 이론에 늘 관심을 가져 주셨고, 사회과학과 맑스주의로 경사되는 내 입장에 대해서도 말을 극도로 아끼면서 비평을 가해 주시기도 하였다. 1980년대의 상황에서 나는 나의 관점과 방법을 “운동의 신학”이나 “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극한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갔는데, 선생님은 언젠가 서구 신학에서도 우리보다 먼저 그런 작업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고 지적하시고, 맑스주의와 신학의 결합이라는 개념적 장치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은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너무 서구적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서구적”이라는 선생님의 비평적 형용사에는 퍽 많은 암시와 함의가 담겨져 있다. 그 사이에 나는 “맑스주의와 신학의 결합이라는 개념적 장치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선생님의 여러 지적과 더불어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많았다.
1980년 대 말부터 나와 연구소의 여러 직원들은 선생님과 함께 연구소의 지방 이전을 계획하였다. 용두동에 있는 연구소 건물이 여러모로 쓸모가 있기는 하였지만 동과 서, 남과 북, 노동과 영성, 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적인 삶을 중심으로 도량을 마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부지를 물색하다가 충남 천안 병천의 동산을 마련하게 되었다. 병천은 유관순 “아우내 장터” 시위로 유명한 곳이고, 근처에는 문화유적들이 더러 있고, 또 독립기념관도 있다. “아우내”는 병천의 우리 이름이다. 두 물줄기가 아울러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름이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 여러 물줄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흘러 큰 물줄기를 이루듯이 전통과 현재, 오늘과 내일,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이론적 탐구와 삶의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어 “살림”의 문화를 이루기를 바랬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천안 병천에 있는 “아우내” 재단이다. 요즈음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나는 안 선생님께서 꿈꾸시던 새로운 살림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도량으로 “아우내”공동체가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함부르크 유학 기간 중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프랑크푸르트의 박남수 목사로부터 전해 들은 후 나는 퍽 슬펐다. 엘베 강변으로 가서 슬픈 마음으로 구름이 가득찬 하늘 아래서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을 오래 바라보았던 생각이 난다. 유학을 주선하신 분도 그분이고, 유학을 끝낸 뒤에 함께 생각을 나누며 같이 할 일이 많은 분도 그분인데, 이제 그분이 아주 가셔서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 당시 박사학위 청구논문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지만, 울적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그분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가르침이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어떤 기회에 독일의 한 학술단체에서 안 병무 선생 서거 추념사를 부탁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독문으로 된 이 글의 일부를 옮겨 실어 볼까 한다.


“(…) 여기서 선생의 신학사상을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의 신학 가운데 두 측면만을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1984년에 세상을 뜬 민중신학의 선구자인 서남동 목사의 기념문집 출판에 즈음한 강연에서 안 선생은 이제까지 민중신학이 추구해 왔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과제들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하였습니다. 하나는 제도교회의 근본주의로부터 신학을 해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와 관련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강연에서 안 선생은 근본주의적 신학노선과 모든 형태의 독재와 인권유린과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70퍼센트 이상의 제도교회들이 근본주의의 지배 아래 있는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근본주의 신앙형식들에 대해 전선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안 선생은 근본주의가 한국에서 실현되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탈정치화와 권위주의 구조에 대한 순응이 강제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제도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걸쳐 심히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장교회를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민중과 더불어 하느님의 지배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에서 교회가 탄생한다고 말했는데, 거기에는 역사 속에서 졸고 있는 제도교회와 그 권력중심체들을 철거하고 그 신학적 토대인 근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고 극복하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학자로서 안 선생은 오랫동안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케리그마 신학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케리그마 신학은 말씀과 사건을 분리시키고 신학을 정치적인 생활세계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통치와 정의에 대한 예수의 복음은 역사적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 이 둘이 함께 펼친 해방 사건을 염두에 둘 때에만 해명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가 전한 이 복음의 구체성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케리그마 신학을 거부하면서 예수의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예수 주변의 오클로스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안 선생은 예수와 오클로스가 함께 펼친 사건을 사회학적으로, 사회사적으로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둔 것입니다. 이 작업을 펼치면서 그분이 늘 염두에 두었던 것이 있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민중은 지배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본래의 자리로부터 밀려나고 배제되어 왔지만 실은 사회와 역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동터오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주인의 지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민중의 주체적 지위는 안 선생의 신학을 이끌어간 주제입니다. 그는 민중을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려 드는 태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민중이 스스로 표현하고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들을 때 민중을 이해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민중을 민중 밖에서 관찰하고 규정하면 민중의 주체적 지위가 사라지고 생동적인 민중의 모습은 왜곡되고 박제화되고 만다고 경계하였습니다.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과 느낌과 꿈과 죄절과 희망을 말하게 하라! 그렇게 할 때에만, 역사 속에서 민중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에만, 신학은 시대의 징조를 감지하고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문화신학을 생동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나아갈 때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잊혔지만 없어지지 않는 민중의 언어를 오늘의 현장에서 되살릴 때 복음의 문화적 화육을 정치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새 신학의 형성을 위해 남긴 영감과 도전은 참으로 큽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는 민중신학의 목소리가 몹시 작아진 것을 보고 퍽 어이가 없었다. 여러 가지 신학조류들이 서로 연관을 맺지 못하고 흐르고 있었다. 뭔가 구심점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민중”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하는데, 어떤 “민중”이 사라졌다는 것인가? 2000년이 오면 천년단위의 시대가 새롭게 도래하는데, 신학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에 대한 전망은 흐리기만 하다. 이런 정신적 상황에서 민중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하다. 안 선생의 도전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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