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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0

『現存』과 안병무,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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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이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심원(心園) 안병무 박사님과 나와의 깊은 인연이 맺어진 주요 매체는 『現存』이라는 월간 잡지였다. 이 잡지는 1969년 7월에 창간되고 1980년 8월에 당국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11년동안 113호를 낸 성서연구를 중심한 신학 논술지였다. 그러니까, 1971년 1월호 「현존」에 “시편연구”를 시리즈로 게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때부터 실제적으로 안 박사님과 가까운 대화관계로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1967년 후반부터 이미 안 박사님의 설교, 강연 등에 자주 접하기 시작하였고 또 중앙신학교(서울 종로 3가 세운상가 건물에 위치)와도 관련을 맺기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이보다 좀 더 가까이 그와 대면하며 지났던 시기는 1970년대 초였다고 생각된다. 마침내 1973년 한국신학대학의 교수직으로 복귀하여 돌아 온 후부터는 같은 교수회 안에서 함께 일하는 교수 동역자로서 일하게 되었으니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는 유신치하에 있던 한국신학대학 신학교육의 전선에서 그와 동고동락하게 되었고 그 이후는 26여 년간이나 그가 소천하시기까지 한 번도 그와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진 적은 없었다.
「현존」지와의 더 깊은 인연은 “구약 고대사에 나타난 설교적 주제들”이라는 창세기 연구의 글들을 연재하면서 맺어졌고 이 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 이른바, 나의 처녀작이요 교수데뷔작인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9년 초판, 1988년 10판)였다. 글을 써서 세상에 내어놓는 일, 그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는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도 두렵게 느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는 「현존」에의 기고가 늘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이러한 순간의 나의 자괴지심을 마치 처조카를 대하듯 책망과 칭찬으로 다독거려주어서, 마침내는 나로 하여금 10판을 거듭하면서까지 꾸준히 독자를 보유한, “분에 겨운 데뷔작”을 감히 만들어 내도록한 분이 바로 心園 선생이었다. 「현존」이 이제는 「살림」으로 탈바꿈을 하여 더 이상 “포착하기 어려운 현존”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부재한 현존”이 「살림」을 통하여서나마 “계시의 현존”이 되고 있음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心園의 현존은 성서신학자의 가슴 속에서부터 민중을 분출해내는 행동 그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안병무의 신학을 “과격한” 민중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그의 현존은 어디까지나 성서 텍스트와의 대화를 항상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언뜻 보기에는, 이러한 관점이 그의 “컨텍스트 신학”과 배치되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전태일의 충격을 말하고 또 신학교의 “교실”보다는 민중이 사는 영문 밖의 “거리”를 말하지만, 그의 분출물을 분석하면 그 대부분이 실상은 성서 텍스트로부터 도려내어온 “로기아”의 집합물들일 뿐이다. 「현존」을 들여다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민중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엘리티즘”의 권세와 위선에 대해서는 격렬한 분노를 나타내는 분이시기도 했다. 오산에 있는 한신대학교가 엘리티즘의 트랩에 발목이 잡혔을 때, 그는 단호히 <엘리티즘 척결>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분노가 휴머니즘이라는 자기 비판의 도전을 받을 때는, 심히 가슴아파하는 안병무의 인간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김 교수, 힘에 밀리면 그냥 무너져요!”라고 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이것이 안병무의 현존과 나와의 짧은 충돌이었다. 그 충돌이 나는 참으로 고마웠다. 이러한 충돌은 그의 특유의 해학으로 쉽게 해소되었다.
유신 독재에의 항거방식은 그의 ‘신학적 해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머리를 삭발했다. 그리고 웃었다. 다들 따라서 삭발을 했고 또 웃었다. 웃는가 하면 곧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스트리킹을 했다(?). 그리고 감쪽같이 아랫도리를 감추어 버리고 허리춤을 추스리며 웃었다. 박영숙 사모님을 가리키며 “내가 노처녀 구제해 주었으니 나는 저 여자의 구세주이지” 한다. 그러면, 사모님은 “무슨 구세주가 저렇게도 비실 비실해” 하고 회답한다. 모두들 또 함께 웃는다. 모의 투표용지가 쭉 돌아간다. 또 웃는다. 다들 따라 웃는다. 어느 교수는 “전두환에게 투표했노라”고 고함친다. 그리고 또 다들 웃는다. “어느 서양 선교사가 한국말로 축도를 했는데, 갑자기 ‘이제는 … (또는 지금은 … )’이라는 축도의 시작 말을 잊게 되어서 엉겁결에 ‘요즈음은 … (요사이는 … )’이라는 말로 시작했대요”라고 수작(酬酌)한다. 다들 웃고 그도 웃는다.
정양모 교수가 지적한 언어, 즉 심원 선생이 가끔 즐겨 사용했던 <성만찬의 유언비어>는 늘 해학의 마스크를 쓰고 우리들 사이에서 춤을 추곤 했다. 다들 따라서 춤을 추었고 유언비어를 예수의 로기아처럼 주고 받았다. 심지어는 수첩에 메모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스러운 곡예를 하면서 우리 사이를 왕래한다. 이것이 일종 심원의 영성이었다.
심원의 영성은 평신도 신학자 자격이면서 한국 교회의 개신교 수도원격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한 일과 한 젊은 이의 죽음 앞에서 흘린 눈물을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중운동가 또는 민중신학자로서의 심원은 또한 동시에 우찌무라, 함석헌 등의 탈제도적 청렴주의의 냄새를 자주 풍기고 다녔다. 수녀복 복장을 한 개신교 수도자들인 디아코니아 자매들의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심원의 모습을 늘 나의 뇌리 한 구석에 붙잡아 매어두는 역할을 했다. 젊은 학자 강돈구 교수(한신대 철학과 교수)가 요절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이 불의의 사고는 한신대학교의 전 교수단에게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으므로 누구에게서든 쉽게 슬픈 모습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심원 선생님이 영결식의 헌화 시간에 보여준 한 젊은 학자의 영구(靈柩) 앞에서 소리내어 흐느끼는 모습은 일반학과(비신학과를 가리켜 부르는 말)의 교수들과 많은 교직원들의 가슴에 흔히 민중운동가로부터는 잘 발견치 못하는 잔잔함 감동과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러한 그의 휴머니즘이 바로 나의 눈에 비췬 그의 영성의 한 단면이었다. 필자가 대소간의 고민거리를 한짐 가득 지고 그를 찾아 갈 때마다, 그의 응답은 언제나 전혀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 언제나, 외삼촌이 처조카에게 하듯이 내 편이 되어 주었고 또 고민으로부터의 나의 탈출을 도와 주는 탈옥 공범자(?)가 기꺼이 되어 주었다. 그는 결코 비켜 서거나, 변명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끝까지 그를 존경하게 한 그 중심적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영성이었고 그의 <현존>이었다.
심원의 죽음은 “고요한 평화” 그대로였다.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 때는 막 가족들이 그와 결별을 고하고 병실로부터 영안실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그의 소천(召天)을 애도하며 모인 모든 조문객들의 얼굴들 이외에도 모두들 한결같이 “슬퍼하면서도 결코 좌절감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내게는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으로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있다. 마치, 그것은 나를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추천하여 서울로 불러 올렸을 때, “선보는 설교”를 끝내고 막 집으로 내려가려는 나를 향하여 “수유리 학교로 가서 김정준 학장을 먼저 만나 본 후 내려가!”라고 하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던 때의 그의 모습과도 너무나 유사하였다. 수유리 학장 사택을 떠나 나오면서 “교수복직!”이라는 학장의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또 한번 심원 안병무의 “죽음처럼 진실한 그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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