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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4

안병무: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서 산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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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손규태

(성공회대학교 교수)


안병무 박사와 필자가 본격적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2년도 첫 학기 한신대학원에서 그가 주관했던 “복음서들에 나타난 부활”을 주제로 한 세미나 에서였다. 그 세미나 에는 5, 6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주로 복음서들에 나타난 부활 기사들을 철저하게 비교 분석하고 그 결과를 중심으로 해서 초대교회의 부활 이해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세미나 가 거의 끝날쯤 해서 요한복음을 발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학생들은 독일어 실력들이 시원치 않아서 대부분 영어로 된 자료들을 사용했으나 필자는 독일어 자료들을 읽고 그 내용을 철저히 분석했던 생각이 난다.
학기가 끝나고 그는 나를 불러서 독일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같이 일할 의사가 있는가를 물었다. 필자는 당시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전까지 근무하던 여자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한신대학의 학생처에 근무하면서 한두 개 교양과목을 맡고 있었다. 이렇게 한신대학으로 근무지를 옮긴 것은 1964년에 시작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1년 수료하고 나서 입대로 인해서 중단된 대학원 공부를 끝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세대학에서 1년 동안 취득한 학점을 인정받아서 바로 논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안병무 교수는 처음 대하는 분이어서 그의 세미나 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연구소 설립은 독일 교회의 사정으로 1년 정도 지연되었다. 필자는 그동안 대학원 석사논문을 마치기로 했다. 제목은 “루터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이었다. 이러한 주제를 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불트만의 “신앙과 이해”나 바르트의 책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문제들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안병무 선생이 독일에서 돌아와서 다시 내기 시작한 『현존』지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예수의 율법 이해에 관한 글이 연재되었었다. 이 글들에서 그들은 예외 없이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루터와 연관짓고 있었다. 그리고 루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동안의 신학 공부에서 많은 신학자들의 사상과 이론들에 접했지만 갈급했던 것은 그들이 물을 마시고 있던 원천에서 필자도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루터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로 논문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한신대 도서관에는 1차 자료는 거의 없었다. 루터의 『바이마르 전집』(Weimar Ausgabe)이 루터교 도서관에 유일하게 있어서 그 곳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안 선생님의 장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의 석사논문의 지도교수는 박봉랑 박사였지만 실질적인 지도는 안병무 선생에게서 받은 셈이다. 그러나 박봉랑 선생님은 바르트의 “복음과 율법”이라는 논문을 소개해 주시면서 거기에 나타난 사상도 철저히 검토하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을 둘러싼 현대 신학자들의 논의에는 많은 시간을 바치지 못했다. 왜냐햐면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들(1525, 1535)과 로마서 등 원전을 읽고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해석을 담은 2차 자료보다는 우선 일차 자료를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논문심사에서도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필자의 주심이었던 박봉랑 박사님이 오히려 바르트의 입장에서 논문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계속 견지하셨고 오히려 안병무 선생님이 내 입장 아니 루터의 입장을 지지해 주셨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루터의 논점과 바르트의 논점의 차이에 대해서 거의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교수님은 “율법”이 앞서 오면 어떻고 “복음”이 앞서 오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따라서 박 선생님과 안 선생님 사이의 논쟁으로 인해서 필자는 매우 곤욕스런 입장이었고 심사 시간도 많이 길어졌다.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다른 교수님들의 독촉도 있고 해서 이 문제는 루터교 신학 전통과 개혁교 신학 전통의 핵심적 차이이기 때문에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틀렸다는 식으로 결론내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답했다. 물론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거의 루터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 중심의 신학적 입장에서 “자연적인 것”을 철저히 거부하다 보니까 그런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어쨌든 논문은 통과되고 필자는 안 선생님과 함께 한국신학연구소 설립에 착수하게 되었다.
우선 사무실을 동국대학 근처에 있는 대학봉사회관에다 얻고 집기들과 가구들 그리고 전화 놓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이사회와 기획위원회를 구성하고 안병무 선생님을 연구소장으로 필자는 간사로 일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사무원으로 김미동을 채용했다. 기독교 회관을 빌어 개소식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국신학연구소 일이 시작되었다. 계간지 제호를 『신학사상』으로 하고 안 선생님이 번역하신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와 하인리히 오트(김광식 옮김)의 『신학해제』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신학계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의 신학사상 그것도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신학이 지배하던 한국신학계와 교계에 신학연구소가 설립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으로 신학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신학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안병무 선생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신학연구소가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개소식을 가지던 날 약 1백여 명의 신학계의 인사들이 참가했다. 모든 식순을 이사장이었던 김정준 박사가 진행했고 기념 강연은 전경연 박사가 했다. 이 때의 에피소드 한 마디. 안 선생님의 명성으로 인해서 새로 생기는 적은 기독교 단체의 행사였지만 기독교계 신문기자들은 물론 중앙 일간지 기자들까지 모여들어 취재에 열기가 뜨거웠다. 개소식이 끝나고 간단한 파티를 벌이는 도중에 중앙일간지의 취재기자단 대표라는 사람이 필자에게 찾아와서 소위 취재비라는 것을 요구했다. 기자 한 사람당 5만 원씩은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당시 5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필자도 당시 이런 사정에 어두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 선생님께 다가가서 사정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한 마디로 “미친놈들! 한 푼도 주지 마! 그것은 부패를 조장할 뿐이야” 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사정을 기자들 대표에게 말하자 그들은 잠시 수군거리더니 썰물처럼 행사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물론 중앙일간지에 연구소 개소식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문기자들은 끈덕졌다. 나에게 교섭하러 온 기자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터라 안 선생님에 말씀드리지 못하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8명의 기자들을 위해서 5만 원인가를 주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엔가 안 선생님은 5만 원이 든 봉투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헌금한 돈을 우리는 한 푼도 헛되이 사용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 불가피하게 쓸 돈이 있으면 연구소 돈에서 쓰지 말고 나에게 말하게.” 그후 불가피하게 돈을 쓸 일이 있어도 나는 안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김미동 사무원이 가끔 안 선생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에피소드 또 하나. 처음 이사회가 태화관 근처 음식점에서 모였다. 김정준, 이종성, 김용옥, 정진경(김관석은 저녁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등이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끝냈다.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 거마비를 돌렸다. 안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단돈 3천원씩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 다른 분들은 그냥 주머니에 넣었지만 안 선생님과 유난히도 친하게 지내시던 김용옥 박사가 봉투를 열어보고는 필자에게 화를 낸다. “3천 원이 뭐야, 서회 등에서는 15,000원 주던데!”라고 불평을 말했다. 그러자 안 선생님은 “서울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1,500원이야. 3천 원이면 왕복도 할 수 있어. 우리 연구소에서는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아”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분들도 모두 안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시면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느 날 안 선생님과 필자는 택시를 타고 수유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택시 안에서 갑자기 필자의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나 미동이나 연구소 살림을 잘해 주어서 고맙네! 우리 연구소를 재정적으로 탄탄한 기반 위에 세워 주게!” 안 선생님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색했다. 아니 철저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연구소 관계로 오는 수많은 손님들을 거의 모두 집에 초청해서 대접했다. 많은 비용이 들고 시간을 바쳐야 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박영숙 사모님은 말없이 모든 일을 처리해 주셨다. 그는 이런 비용을 한 푼도 연구소에 청구해 본 일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라도 신경을 써야 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와 독일 교회 사이에서 최초의 가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주로 연구소 일로 한국을 찾은 슈나이스(Paul Schneiss) 목사를 위해서는 연구소에 침대를 사다 놓고 거기에서 자게 했다. 왜 비싼 호텔에서 돈을 낭비하느냐는 것이다. 슈나이스 목사는 그렇게 해서 절약된 돈을 몇 십만 원이 되든지 독일로 떠날 때는 연구소 기금으로 주고 갔다. 그이야말로 한국신학연구소 설립과 운영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서 가장 노력을 아끼지 않은 우리들의 동료이자 친구이다. 한국신학연구소와 한국 교회는 언젠가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안 선생님은 청년 시절 자기 속에 탐욕이 일어나면 돈을 꺼내서 태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여자 생각이 나면 그렇게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성 프란시스와 키에르케고르 등의 강한 영향을 받아서 ‘청빈’에 대해서는 체질화되어 있던 분이다. 필자가 독일에서 일할 때 찾아오시면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에게 안 선생님은 늘 간단히 차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독일 교회가 마련해서 필자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사회(서민)주택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약 80평에 달하는 꽤 큰 집이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날 집을 둘러 보시고 나서 안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넓고 좋은 집에도 살아봐야 해. 실상 잘 살아보고 나서야 청빈한 생활을 할 수 있어. 가난하게만 산 사람은 잘 사는 것에 대한 갈망 때문에 청빈하게 살 수 없어. 왜냐하면 청빈이란 뭔가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프랜시스도 그랬잖아!” 그는 평소에도 늘 수도원적 삶, 청빈한 삶을 꿈꾸었다.
필자는 안 선생님과 약 25년 동안의 사귐 가운데 그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그와 같이 일도 했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그의 구도자적 혹은 수도자적 삶이다. 실상 그는 청년시절 예배만 드리는 교회를 삶의 공동체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그는 말년에도 이러한 수도원적 삶의 갈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목포에 디아코니아 수도원을 창설했다. 그러나 본인이 거기에 내려가서 자매들과 같이 살 수 없는 처지를 늘 마음 속으로 안타까워 했다. 그는 끝내 수도승이 되지는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서, 아니 삶의 한가운데서 산상설교적 삶을 실천했던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황폐해진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보면 정말 그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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