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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49

안병무 시대

조회 수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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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민경배

(연세대학교 교수)


한국 교회 신학의 지리학


한국 교회의 신학을 그 지역성을 따른 형태로 체계화하는 것은 우리교회 신앙의 역사적 전개나 그 특징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이름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지리학(Sacred Topology)이다. 이런 신앙의 지형(地形)은 한국 교회 처음부터 선교 지역 예양(禮讓) 정책에서 묘하게 선교사들의 신앙 형태가 그 지역의 사회적, 심리적 특성과 교섭하여 유기적 일체를 이룬 데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구나 일제(日帝) 치하 잃어버린 국토에 대한 강렬한 민족의식의 종교적 발로에서 그 열기를 더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역사에 처음부터 드높이 빛나고 있었다. 1906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 윤치호(尹致昊)의 애국가가 그러하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든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런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들 찬송가의 1967년 작으로 되어 있는 제 261장 제3절은 그 정점에 가 있었다. 곧,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갈아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되어 타거라.


이제 한국 교회 신앙 유형이나 그 역사적 발전의 한 구도를 이런 각도에서 살펴 안병무의 위상을 그 지도에서 위치지어 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의 신학의 역사는 뚜렷한 것도 없었고, 실제 신학을 위한 체계적인 작업을 한 것도 별로 없었다. 신학이란 원래 신앙의 경험을 다 정리해서 종합하여 그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역사나 유산이 우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신앙은 그 수용도나 발전의 속도에서 가히 세기적이었다. 그래서 세계교회의 집중적인 관심과 찬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신앙 구형기(構形期)가 일제의 조선 침략기와 꼭 맞물려 있어서 대개는 민족주의적인 동기나 과격한 자주의식의 표현 매체로 원용되거나, 아니면 그 신앙도 그런 유형의 행동적 국면으로 기우는, 극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기 지향의 신앙은 초기 선교가 자연 서울과 기청(畿淸) 중심으로 진행된 인연 때문에 당시로서는 어쩔 수없이 개화지향군에 의해서 수용되되, 대개는 기독교 문명의 거대한 강국으로 이미 부상한 미국에 대한 의존과 그 힘의 형식 도입이라는 목표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와 목적을 동기로 한 군상들은 비록 그 때로서는 조심스로운 소수에 불과하였지만, 역시 일을 해 낼 수 있는 그만한 위치에 있는 관료나 양반층이었다.
이런 형편이었다면 여러 차례의 한말 정변(政變)을 겪는 사이에 가끔 일제(日帝) 배후의 정치활동이라 간주되어서 시련과 비극을 피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신앙의 깊은 내적 차원에까지는 접촉이 아직은 되지 아니하였던 일종의 문명운동으로 끝난 인상이 짙었다. 저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나 박영효(朴泳孝)마저도 기독교 도입을 상소한 것을 보면 그들이 품고 있었던 기독교의 모습이 어떠하였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그 모양새가 잡힌다.
이런 운동과 개혁 시도 과정에서 치솟는 민족적 의분이 압도하여 가령 을미의병(乙未義兵)과 같은 반상(班常) 일체의 거사가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동기가 가장 잘 표현되는 종교운동에서는 불가능한 계층 혼효(混淆)라는 현상 때문에 그것이 곧 민족운동의 한 형태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 추구적인 외형적 신앙이 내적 동기의 순수 신앙 우선의 과정으로 수정 전개하려고 한 대대적인 숙정(肅正) 운동이 바로 처음 원산(元山)에서 시작하여 평양(平壤)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대부흥운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적 동기의 구조로 신앙을 정착시킴으로써 한국 교회 특유의 전통적 신앙이 확립된 셈이었다. 이것은 사회역사상 묘하게도 “탈(脫)서울 향(向)평양”의 지역 전환 운동으로도 그 신앙지리적 의미가 눈 띄였다.
한데 그 신앙운동이 서북지방의 중산층 기독자들과 또 미국 동부 출신의 중산 지식층 선교사들 중심으로 합작 진행되었다는 묘한 인연을 가진다. 서북지방은 유난히 자작농이나 자영(自營) 상인 그리고 활달한 기동력을 가진 장돌배들이 많아서 자연 초기 기독자들도 이런 계층에서 모여들었는데, 이는 이 신앙운동의 또 다른 사회적 성격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위치를 가진 이들의 신앙은 물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신앙은 1920년대 중반 한국 교회의 교직자층이 유수한 사회적 중요성을 가진 집단으로, 더구나 봉급을 제대로 받는 계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적 심리, 곧 안정 위주와 현실 안주(安住)의 신앙과 윤리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봉급을 정기적으로 안정되게 받는 계층이라는 것은 학교 교사나 관료 및 경찰 그리고 극히 소수의 회사원들인데, 안정된 직업들은 대개는 일본인들 독점이어서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힘과 의미를 가지고 그 생명력을 주도하고 발전시키는 계층이 하류층(下流層)이요 부서층(婦庶層)이라는 것은 신약시대도 그렇고, 사실 대개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분석은 트뢸취(E. Troeltsch)의 오랜 연구 끝에 내린 결론으로, 이제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고전적인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사실상의 중추가 되고 그 생명력이 되는 이 사회적 하류층의 기독교 형성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런 문제들이 그 추구와 해답을 기다리는 목전의 현안이다.
이 문제의 해답이 자꾸 어려워지는 것은 그 하나가 한국 교회의 정통 신앙이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그 골격이 잡혔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서북 주도의 신앙이 사실상 한국 교회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치리권의 대종(大宗)을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향후의 한국 교회는 신앙 형태 주류와 그 교권이 서북 장로교회권에 장악되고, 따라서 교회에서의 비판 기능은 비서북(非西北)으로 일괄되는 여러 교파간의 협력과 동맹 형식의 반서북 전선 구축(構築)이라는 역학 관계에서 보도록 되어 있게 된 것이다. 서북계 장로교회가 그 단일 지역 교회로도 전국 기독교 총 교세의 2/3 선을 1953년까지 내내 유지해 온 것은 그들 자체의 노력으로도 그 현상이 설명되지만 동시에 그만한 민족 신앙으로서의 견인력과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북 지역교회는 한국적 신앙 정통의 보수자(保守者)로 자처하고, 심지어 그들 형태 신앙의 정통성을 자신(自信)하여, 반서북 교회권(敎會圈)에 대하여는 서북계에 동조하지 아니하는 경우 이단(異端)으로 치죄하는 독선에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그 수적 열세 때문에 비서북 지역 교회들이 교파의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한, 서북 비판 세력의 일종 동맹 형성을 기도하는 것에 의구와 반발을 가지고, 그런 에큐메니칼 협력을 적대시하는 풍조가 굳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교회 보수 불럭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혐기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그 첫발이 내딛어졌다.
우리는 한국에서 소작농이 많았던 호남(湖南) 지역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생산적 터전을 가능한 입지로 보고 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곧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다. 소작농은 한국의 경우 소작 가능한 농토를 한 지주에게서 얻어내지 못하는 비극이 있었다. 그들 소작 빈농들은 그래서 수많은 지주들에게서 조금씩 농토를 얻어 경작해서 그 소작료를 바쳐야 하는, 끝없는 형극(荊棘)에 억눌리고 있었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위원회 개최에 앞서 브룬너(E. S. Brunner)라는 세계적 농촌 경제학자를 파한(派韓)하여 한국 농촌교회의 실정을 조사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는 대단한 보고서 Rural Korea라는 것을 남겼는데, 거기 보면 호남의 소작농들이 기독교 신앙에 인도될 수 없는 이유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들의 이 가난과 핍박이 너무 심하여서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지주들을 어기고 기독교에 입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입교는 그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졌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지주에 묶여 있고 거의 농노(農奴)에 가까운 신분으로는, 유교 전통 사회에서의 이탈을 의미하고 그 지주의 말하자면 보호권에서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독교에의 입교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교회의 정착은 사실상 6·25 전란을 겪으면서 서북 교회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 정착할 때부터 겨우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정황은 이 호남지역에 해방이후 대조적인 극단의 두 신앙 노선이 병립한 배경을 설명해 준다. 하나는 극단의 보수주의 경향인데 그것은 지금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서북 기독교인들의 남하 정착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이후의 민주주의 정착 과정에서 소작농 배경의 풀뿌리 민중들이 기독교의 신앙으로 계발되어 진보적인 신앙의 전위대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합동계(合同系) 장로교의 보수주의와 기장계(基長系) 장로교의 신정통주의 내지는 진보주의가 둘 다 함께 백중지세(伯仲之勢)인 것은 이런 배경에서 해명된다.
참 묘한 것은 1920년대 중반 공산당 사건으로 일제(日帝) 경찰이 대대적인 공산당 검거를 감행하였는데, 3차에 걸친 그 검거에 호남 출신이 300명 가량으로 서북 출신보다 7배 가량이나 되었다. 그런데 서대숙(徐大肅)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 호남계 공산주의자들은 대개가 다 그 지역 대지주들의 자식들로, 그 집의 거금을 가지고 일본에 유학 가서 당대 유행의 공산주의 사상을 배워 가지고 온, 소위 거부의 자녀들, 그 때 말로는 부르즈와였다는 것이다. 표면상 호남이 가난하니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짐작은 엉뚱하게도 부르즈와 때문이었다는 아이러니인데, 고소를 금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의 하류층 기독교의 타오르는 불길은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영남 지방은 본래가 유교 근본주의자들의 온상으로 구 한말 야소교(耶蘇敎)의 한국 유입을 한사코 반대하던 유림의 거점이어서 기독교의 전도가 심각한 저항을 받아 왔던 것이다. 따라서 그 교세의 부진과 약세로 항상 그 교회 행정이나 통계가 서북에 편입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눈을 관서(關西) 지방에 돌리게 된다. 함경도(咸境道)에 있어서는 이용익(李容翊)이나 “또순이 아줌마”에게서 상징되는 억셈과 진취성과 대담성 그리고 용기가 그 성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신앙 유형도 역시 이 형태에 따랐다는 인상이 크다. 그 신앙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진취성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신앙의 형성으로 확연히 그 발자국이 빛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한국의 모모한 이른 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개가 다 이 지역 출신들이다. 김춘배(金春培), 송창근(宋昌根), 김재준(金在俊), 김관식(金觀植), 채필근(蔡弼近), 김영주(金英珠), 조향록(趙香祿), 강원용(姜元龍), 문익환(文益煥), 문동환(文東煥), 김관석(金觀錫), 그리고 안병무(安炳茂) 등이 그들이다. 이 지역의 이러한 신학의 발전은 그 지역 기상의 과감한 전진성이 그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영향력도 막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이 지역은 1891년의 재한 각국 선교기관의 교계예양(敎界禮讓) 정책에 의해서 카나다 장로교회가 맡아 선교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카나다 본국에서 1926년 교파 일치운동이 결실해서 카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라고 하는 단일교회가 성립되면서 한국 선교도 그 연합교회가 맡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연합해서 한 단일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고 한다면 반드시 있어야 일이다. 하지만 교회는 역사 속에 있고, 거기에는 민족과 문화와 계층이라든가 하는 수 없는 동질집단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교파 다양성의 근거요 그 타당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지체론(肢體論)이 그 주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이나 다 기독교 포괄의 진리의 일부분들을 그들 나름대로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교리나 경건으로 보고 거기 충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적 조건은 우주적 진리의 부분 인식이나 그 생동감을 각기 따로 가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교파의 다양성은 따라서 부끄러움이 아니다. 더구나 사회 구성원의 활동이나 심리가 다변화하고 복잡하게 산재하고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구나 그러한 요소(要所) 집중의 선교적 접근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깊어진다.
한데 카나다의 교회들은 여러 교파들이 오랜 논의 끝에 그 단일교회 구성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한 나라 안에 한 그리스도의 교회,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 한국의 교회들도 우리가 단일 민족이니 만큼, 카나다의 여러 종족 배경의 교회들이 이루어 놓은 단일교회 형성 때보다는 훨씬 쉽게 그리고 당당하게 그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 하나가 있었다. 여러 교단들은 기왕의 충성의 목표들이 있었다. 복음의 핵심이라 확신하던 특정한 교리나 치리(治理)나 정체(政體)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때껏 교회로서의 소명감을 가지고 따로이 예배하고 외치고 헌신하여 왔던 것이다. 한데 이제까지의 주장과 치중점(置重点)이 각각 다른 교단들이 합치하려고 한다면, 소중하다고 믿어 왔던 것들을 더러는 포기하고, 마음에도 내키지 아니한 다른 이들의 사상이나 의식(儀式)도 더러는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히 변혁적인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 자연히 신학 사상이나 의식(儀式) 및 교회행정의 융통성이나 신축성, 좀 심하게 말하면 해이(解弛)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통틀어 자유주의적인 구조가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나다의 일부 교회들은 이 연합교회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여러 선교회가 있었지만, 카나다연합교회 선교회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함경도 교회의 자유주의 물결을 도도히 흐르게 하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기왕에 와 있던 장로교계의 보수주의계 선교사들은 더러는 이적(離籍)한 이들도 있었다. 가령 영재형(L. L. Young-榮在馨)은 한국을 떠나 일본 주재 선교사로 갔고, 그 대신 스콧트(W. Scott 徐高道) 중심의 대담한 자유주의계 선교사들이 그 자리에 혁신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 앉은 것이다.
한데 한국 기독교의 정착기로부터 우리 겨레 상당수는 일제의 수탈에 의한 반영구적 기아 상태와 전민족적인 빈한상태에 호구지책이 끊겨, 살길 찾아 간도로 만주로 유민(流民)의 머나 먼 길을 떠나고 있었다. 주로 간도(間道)에 많이 몰려갔는데, 그 비참은 전영택(田榮澤)의 『화수분』이나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에 가슴 메이도록 붉은 핏자국으로 쓰여 있다. 이런 류의 문학은 솔제니친의 문학처럼 거의가 논픽션이었다.
간도에 모이기 시작한 우리 겨레들을 조직화하고 뭉치게 한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중에서 문치정(文治政), 김약연(金躍淵), 구춘선(具春先), 강백규(姜百奎), 마진(馬晉), 김영학(金永學) 등이 있었다. 문치정의 아들이 문재린(文在麟)이고 그 아들이 문익환(文益煥), 문동환(文東煥)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정재면(鄭載冕)이 가세하는데 그의 아들이 정대위(鄭大爲)이다. 한데 이들을 도와서 적극적인 신앙과 민족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도록 자극을 준 선교사들이 그레이선(R. Grierson), 바커(A. H. Barker) 그리고 스콧트 등이었다. 그리고 그 행보를 재촉한 것이 구한말 군인 이동휘(李東輝)의 교회 사역 참여를 통한 민족 투쟁의식의 환기였다.
우리는 수많은 경로를 통하여서 이 간도 기독교인들 조직력을 중심으로 한 애국활동과 무장 독립운동으로 결국 일제가 그 평정을 구실로 소위 간도 토벌 파병을 감행하고, 그것이 노구교(盧溝橋) 사건으로 비화해서 만주사변(滿洲事變), 그리고는 다시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치닫다가, 태평양전쟁 곧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숨가쁘게 전개된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형태의 역사 해석은 일본 아이찌대학(愛知大學)의 에구찌(江口圭一) 교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일단은 일본 학자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잘 된 것이라 본다.
일제 간도 토벌작전은 세계의 눈길이 닿지 아니하는 곳에서 진행된 잔학 무도의 만행 바로 그것이었다. 그 와중의 새노루바위 사건(間獐岩事件)은 카나다 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취재와 그 자료 해외유출로 그 전모가 세계에 알려진 참혹한 사건인데, 그 때 동아일보의 장덕준이 그 취재 여행 중 행방불명이 되어 일군의 암살을 점찍게 한 일이 있을 만큼, 그 사건은 우리 겨레로서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간도 천지는 이 때 실로 무법과 참극의 황무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행되는 일본군의 만행, 그리고 만주 마적들의 행패(行悖), 거기다가 공산주의자들의 출몰과 독립군 활동의 엇섞임, 이 모든 것들이 간도 민심의 칼날 같은 경계심과 긴장감, 그래서 요컨대 간도 한국 교회나 교민회(僑民會)의 초민감 자세를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삶이나 신앙이 일각도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고는 살아 나갈 수 없는 싸움터 한복판의 긴장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간도계 한국 기독교인들의 뚜렷한 역사적 감각, 기독교 신앙의 현실적 실존적 위기의식, 그리고 불가피한 투쟁적 역사 참여, 이런 형태의 신앙 구조 형성을 목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함경도 기독교인들의 진보적인 자세와의 지리적 근접형상으로 규합되어서, 한국 관동지역 기독교의 가장 혁신적인 신앙 현상으로 치솟아 향후 한국 교회 행방에 결정적인 작용 요소로 잠재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대거 집결해서 이루어진 교회가 “기독교장로회”라고 해서 통칭 “기장” 교단이다. 1952년에 이른바 “예장”교회와 김재준 박사의 언필칭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결별할 때 그 배후의 선교 기관이 카나다연합교회여서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함경도나 간도계의 교회인들이 대거 그 이심전심의 통로를 타고 뭉쳤던 것임에 틀림없다. 처음에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한 해석이다.


안병무 신학의 위치


안병무는 고향이 평안남도 안주이다. 하지만 어릴 때 간도에 이주해 가서 거기서 1947년 월남할 때까지 살았으니, 간도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는 1922년생이니 임술(壬戌)생이다. 개 띠이다. 우리 나라에는 묘하게도 신학자들 중에 임술생이 많았다. 그래서 한 때는 한국 신학계가 임술생들이 판친다고 해서 개판이라는, 그런 유쾌한 죠크가 돌던 때도 있었다.
그들 동료들 간에는 한국 신학계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시대 나름의 독특한 학자적인 품격이 있었다. 신학하는 이들 간의 그 친밀한 교제와 인간적 유대감, 자주 어울려 신학을 토론하고 함께 조국과 그 역사를 비통과 격앙으로 아파하던 일, 그들 시대가 한국 신학 골격 형성기라 느껴 몸 바쳐 이 나라에 그 신앙의 기적적 성장만큼 신학의 눈부신 발전도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이라 다짐하던 일, 그 신학 기초 정지의 사명을 주야로 생각하던 나날들, 그러면서도 소리쳐 방성 대소(大笑)하는 순진한 순간들,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을 위해 정치에도 더러는 휘말려 인권이요 민권을 외치다가 감옥에도 드나들었던 그들, 이런 어떤 시대적인 학품(學稟)이 있었다.
뭔가 이제 시작한다는 그런 시대감각과 박사 학위들을 그 중년후반기에 갓 하고 돌아온 몇 안 되는 그들 신학자들의 소수 집단의식, 그런 것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모였다. 그런 신학 공동체의 코이노니아가 오늘에 없어, 그것이 이제 신학자들의 수적인 증대로 소수 가족의식 지탱의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는 명분도 없을 바 아니겠지만, 이들 만큼의 시대의식이나 소명의식이 투철하지 아니하여서 그런 것 아닌지 해서, 그들이 손잡고 걸어가던 그 시대, 1950년대에서 1980년대가 그렇게 소중하게 보이는 것이다. 한국신학사의 가장 아름다웠던, 목가적 향수마저 느끼게 해 주는 때라 여겨져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의 간도 생활은 우리가 앞서 본대로 치열한 생사의 분기점에 항상 노출되는 위기의식의 연속으로 인하여서, 그 생각과 신앙이 불가피하게 거기 맞 대응하는 예리한 투쟁 구조로 주조(鑄造)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간도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김재준(金在俊)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밀리탄트 신앙의 이론적 배경을 한 둘 익혔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리한 젊음의 감성이 맑고 푸르던 날들을 그렇게 보내고, 그는 20대 초반 서울을 찾은 것이다.
그는 1946년에 월남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한 때 전라도에 가서 활동한 것으로 안다. 6.25 전란 속에서 그는 인간의 유대라는 근원적 결속이 훼손되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런 원형을 꿈 꾸면서 7세대의 공형(共亨) 친린(親隣)의 공동체 생활을 시험해 갔다. 골육상쟁의 비탄이 그를 이런 현실 초극의 전천년왕국적인 기망(冀望)을 추구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1956년부터 10년을 연구에 집중하다가 1965년 귀국하였다. 그 때로서는 아주 귀한 신학박사로 되돌아 온 것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대한 기도도 넘쳤다. 그는 곧 중앙신학교에서 교장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 볼 때마다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 남는 이상한 문제들이 별다른 처리 없이 그대로 지나치는 일이 여러번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 중앙신학교와 그와의 인연은 그 연원(淵源)을 뭐라 말하기 힘들다. 그가 남하하여 6·25전란 이후 서울에서 함석헌(咸錫憲)이나 유영모(柳永模)와 같은 신령주의계 인사들과 친숙하였던 일은 있었다. 하지만 중앙신학교는 그 교육정책이 신학과 사회사업학에 있기는 하였지만, 그 설립자가 이호빈(李浩彬)이라는 특수성을 가진다. 그는 신비주의자 이용도(李龍道)의 절친한 친구로, 1930년대 한국 교회 안에서 일대(一代)의 풍운을 몰고 왔던 신령 신비주의 경건 류의 “예수교회”를 창설하였던 인물이었다.
한데 그런 교회에서 세운 학교에 가서 그가 5년 남짓 교장 일까지 보았고 또 강의도 하였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안병무에게 실천적 신비주의의 경건한 국면이 있었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한국 교회 6·25전란 이후의 극렬한 신학 양성기(釀成期)에 별빛처럼 빛나며 등장한 그에게서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한국 교회 본래의 깊은 경건의 신령한 면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그의 그러한 신앙의 국면은 한국 교회가 통일교 문제로 어지러울 때 거기 동조한 옛 벗 서남동(徐南同) 교수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혐기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1970년부터는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1975년 학생운동의 지주로 지목되어서 권고 사직을 당할 때까지 눈부신 신학 사상의 전개와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독일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아 낼 수 있었고, 그것으로 한국신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신학연구 풍토의 조성과 지원을 위해 참신한 기획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 때로서는 이 연구소의 연구 기금은 매말랐던 한국 신학계에 샘물처럼 솟아 생기를 부어 주었고, 연구 결과를 간행할 길이 없었던 신학자들의 저서 간행을 맡아 연구 분위기에 불길을 당겨 주는, 실로 역사적인 소임을 부러움과 비전으로 다해 가고 있었다.
그는 남다른 총명을 인상으로 풍기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눈매는 맑고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중키 정도였다. 하지만 단단하고도 곧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그의 두상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둥글고 잘 생겼었다. 머리 숱이 적어 보였지만 그럴수록 그의 두상은 더 완연히 드러나 지적인 그의 모습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유모어를 즐기시던 분이었다. 대담한 데도 있었다. 하지만 웬지 쉽게 가까이 하기는 힘든 분으로 보였다. 혼자 계실 때 멀리서 보면 그 얼굴에 고독과 비애의 흔적이 배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속이 트인 분이었지만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다. 그의 젊은 날의 고투와 형극이 그를 속 깊이 멍들게 하여 그 쓰라림이 젖어 나오는 길을 스스로 억제하느라 그런 자세를 은연중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 민중신학의 한 주창자였다. 그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의 일이었다. 그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군사정권의 독재 아래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이 한국적 정치 경제 비리의 필연적인 고난을 걸머지는 무고(無辜)의 아픔이라 보고 있었다. 그와 길을 함께 한 사람들은 그 수가 적지 아니하였다. 서남동(徐南同)이나 서광선(徐洸善), 박형규(朴炯圭), 김관석(金觀錫), 문익환(文益煥), 김용복(金容福), 강문규(姜文奎) 등이 그 핵심 중추였다.
이러한 민중에의 현존적 동행의 다짐이 그를 고난의 자국을 그의 이마에 배이게 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고독하기까지 했던 그의 순례의 길은 이러한 역사 참여의 노정(路程)에서 서서히 그의 영혼 안에 우나무노(M.de Unamuno)를 방불하게 하는 비극의 체험으로 이끌어 간 것 같다. 그의 가끔 호탕한 큰 웃음소리에는 이 비애의 되울림이 있었다. 그가 걸어 간 길이 우리 현대 교회사의 한 획(劃)을 긋는 큼직한 발자국으로 남는데 이런 그의 인간 실존의 담담한 명상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신앙에 우리 교회 전래의 고유한 경건의 섬유(纖維)가 있다는 말을 다시 상기하자. 그는 우리 신학계가 한참 전란 이후의 격변을 겪고 참신한 자극으로 우리 한국신학의 형성 모색이라는 활발한 시도와 작업을 추진할 때, 서남동에게서 대개 상징되는 안테나, 요새 말로는 WWW 곧 세계 전역에 거미줄을 펴, 걸리는 것마다 다 잡식 형식으로 걷어 들이는 신학 편력을 그는 결코 반기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을 두고 그것이 경기장의 박수꾼, 아니면 한약방의 감초(甘草) 같아서 끼지 않는 곳이 없다는 식으로 그 방황을 기탄한 일이 있었다. 신학의 진지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그는 우리 형성기의 신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로 새삼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민중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보는 넓이를 잃지 아니하고 있었다. 마가복음의 갈릴리 천민을 주제로 한 오클로스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의 관점과 내용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그는 보았다. 더구나 그는 한국 역사에서는 민족과 민중의 경험 주체가 결코 이반(離反)된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것은 한 주체로 경험되고 있었다는 남다른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시각에 나타난 포괄이 왠지 성숙해 보였다.
가령 그는 1965년의 한일 조약 비준 반대 운동에 한국 교회가 대대적으로 나서게 되었던 사실을 눈여겨보면서, 거기에는 민족감정의 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도대체 우리 교회의 민중운동이라는 정치 참여의 아이디어가 이 민족 감정이라는 것을 경로(經路)로 하였다는 판단을 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조선신학원 창립 당시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유난히 냉정하였다. 그 신학원 설립 때 일본의 종합대학교계 출신 교수들이 대거 집결하고 있었는데, 그 일본 대학 출신들의 자유주의가 일제말 선교사들 퇴거 이후 조선신학원의 요란한 자유주의 신학의 주류였다면, “그것은 민족 역사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조선신학원의 민족사와의 직접 결부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우리 역사에 엉켜 한 생명의 실체로 도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민족사에 접촉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중신학이라고 하더라도 필경은 민족통일이라든가 한국 문화와의 연결 차원이 필수라고 본 것 역시 민족사의 신학적 위상을 확신한 그의 남다른 판단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민중신학의 진수를 곧게 그 마땅한 맥(脈)에 잇대려고 하는 드높은 예지와 신앙 그리고 원대한 역사적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는 민중의 고난이라는 현상 뒤에 차라리 소외된 채 서 있는 불가분리의 실체를 보고 있었다. 민족이었다.
그는 민중의 고통을 함께 말하자고 출발한 이들의 동료였다. 그 시대의 역사를 걸머지고 가던 발군의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현실을 비추어 주어 그 참 모습을 조명해 주는 레퍼런스(reference)가 있어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그것이 민족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한 시대의 비전을 높이 치켜들고 앞장섰던 안병무의 시대가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진다. 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 역사의 한 상징이었다. 강인한 투쟁 심리로 자칫 과격할 수 있었던 그 날의 우리 민중신학에, 겨레의 아픔과 그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의 운명처럼 상한 영혼으로 길을 서둘러 가던, 그의 뒷모습이 살아 여기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그래도 가질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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