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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58

『野聲』과 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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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홍창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신학자로서의 안병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정열로 가득 찼던 청년 안병무의 모습을 보는 데는 『야성』(野聲)에 나타난 그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된다. 그가 정열을 기울였던 신앙동지적 운동, 향린교회의 창립 정신, 그 후의 변천을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는 각 단과대학마다 기독학생회가 생기고 그 단과대학 기독학생회가 모여서 기독학생회 총회가 결성되었는데, 안병무가 첫 번 회장이 되었다. 기독학생들이 모이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십여 명 가량이 더 가까워지고 자주 모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모임의 이름을 “일신회”라 부르기로 했다. 그 “일신”의 의미는 한 하나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이라는 세 가지 뜻을 다 함께 나타내는 의미에서였다. 일신회 회원들은 각 가정을 돌면서 성서연구, 기도, 신앙토론에 열중하였다. 어떤 때는 밤을 세워가면서 모임을 계속했다. 주위에서는 이 모임을 보고 푸닥거리를 하는 패들이라고 웃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원이 모이곤 하였는데 그것도 시간을 엄수하기로 하여 늦으면 문을 잠그고 “이미 시간은 지났다.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문 밖에 써붙이기도 하였다.
일신회 모임이 이 같이 진지해지면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결단하고 방향을 정하기 위해 1950년 6월 23일부터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에 있는 수도원(修禱院)에 가서 기도회를 가졌다. 그런데 수도원에 사는 아주머니가 시내를 다녀와서 6·25가 터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구국기도회를 갖고 산을 내려와서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각자 헤어지게 되었다.
6·25사변으로 우리는 대구, 부산, 제주도 등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다 흩어져서 각자 피난생활을 하느라고 서로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는데 안병무는 그 흩어진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로 안부를 전하며 6·25 전에 가졌던 우리들의 우정과 연결을 되살려 결국 우리를 전주로 모이게 하였다.
“모이자!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 시대에 주시는 음성을 듣자. 그리고 일하자. 내일 죽더라도 무엇을 하려다가 왔다는 보고의 자료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교인들은 교회를 냉소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지(野聲)를 내도록 하자.”
이렇게 하여 『야성』(野聲)이 출간되었다.
일신회가 펼친 신앙운동 가운데 가장 널리,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활동은 아마도 『야성』 지를 발간한 일일 것이다. 『야성』 지는 안병무를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하여 1951년 11월 12일 전주에서 창간되어 전국에 배포된 신앙잡지로서, 주요 필진은 ‘일신회’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신앙과 신학에 관한 글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공에 따라 다양한 글들을 『야성』에 기고했는데, 이 잡지는 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아 전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커다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평균 40-50쪽 분량의 소책자인 『야성』은 창간호 머리말에서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거칠지만 진실을 담아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와 목표를 분명히 천명했다. 여기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간절함이 들어 있었다. 『야성』은 이론적 성격의 잡지가 아니었다. 『야성』은 Scholar(학자)가 아니라 Student(학도)로, Minister(목사)가 아니라 Layman(평신도)으로서 느끼는 그대로를 발표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잡지의 성격을 밝혔다.
『야성』에는 6·25라는 민족적 비극이 피처럼 스며들어 있다. 창간호 머리글로 안병무가 쓴 “고난의 의미”와 “시간과 영원의 출발”은 민족이 당한 비극의 현장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전제되었던 글들이었다.
『야성』이 발간되자 독자들로부터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그 반응 가운데는 “성경 연구란을 넣어 주시오,” “본격적인 연구논문을 실어 주시오,” “은혜 사모하는 몇 사람에게 생명떡과 같은 『야성』 병(餠)을 분식(分食)하여 … 주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등과 같은 건의와 감사의 글들이 전해졌다. 반면에 “『야성』이란 야만인의 소리,” “대체 웬놈들의 소리냐, 정체를 밝혀라,” “광야의 소리가 아니라 서재의 소리다”라는 등의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반응도 소수지만 없지 않았다. 『야성』에 기고한 ‘일신회’ 동지들은 각자의 전공에 따라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그 글들 가운데는 동지들이 모임에서 토론하고 고민했던 내용들도 들어있었다. 곧 교회 갱신의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평신도 교회,’ 목회, 예배 등에 관한 글들과 같이 교회의 삶에 관한 글들이 많았고, 연구논문, 번역논문, 새 찬송가 소개 및 해설, 희곡, 신앙수상 등도 있었다.
『야성』은 학생, 청년, 군인 등을 주 독자층으로 하고 있었다. 각 육군병원 장교병실에서도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반 교회에는 거의 배포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부수가 제한되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이 『야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있는 몇몇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성원도 있었다. 창간호 “잡신록”에는 “이 일을 위해서 주께서는 동역자들 주시었다. 부산에 숨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숨은 이들을 주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숨은 이’는 이희주(권사)를 주축으로 안병무가 전쟁 전에 서울에서 목회하던 일신교회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부산 피난생활 중에도 『야성』의 발간에 적극 협력했다. 이들 외에도 대구의 시장과 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피난민들 중에 ‘대구 신우회’ 회원들이 『야성』의 발간을 후원했다. 그들은 또한 대구 육군병원의 상이용사들을 돕는 데도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대구 애락원(나환자촌)의 교인들도 기도로써 잡지 발간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전주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유성덕이 종이를 제공하기도 했다. 발간자들은 후원자들에게 감사하면서 이들을 위해 금요 철야기도회를 개최했다. 필자와 독자들 간의 유대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김재준 목사도 『야성』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려의 글을 보내왔다.
“귀지의 출간을 진정으로 축하하며 감사합니다. 항간에 흔히 있는 선정적인 기사가 아니라 신앙동지로서의 진실한 고백문을 읽는 담백하고 순수한 정조가 좋습니다.”
안병무는 매호마다 원고를 썼을 뿐 아니라 원고가 모자랄 때에는 “편집실,” “편집인,”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썼고 그리고 가끔 “심원”(心園)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자신은 심원을 자기의 아호(雅號)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가진 품격으로 보아 그의 아호를 심원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가 돌아간 후에 그의 아호로 제창하였다.
『야성』을 발간하기 위해 그는 전국 각지를 뛰어다녀야 했다.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그는 『야성』을 인쇄한 부산을 수시로 다녀야 했고, 또 부산, 대구 등 각지를 돌며 기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야성』은 1951년 11월 12일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7호까지는 전주에서 편집하여 대구와 부산을 오가면서 인쇄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환도 후에는 향린교회가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했는데, 한때는 발행부수가 3,000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56년 1월 15일, 제12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 교회에 바람직한 교회갱신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야성』의 발간은 향린교회 역사에서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역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안병무가 『야성』에 실은 글의 제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야성에 게재된 안병무의 글


1. “광야의 소리”(머리말).
2. “고난의 의의”(1:1-7, 1951. 11).
3. “시간과 영원”(2:1-6, 1952. 1).
4.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3:13-21, 1952. 2).
5. “인간성의 실상”(4:6-9, 1952. 4).
6. “빛의 아들들과 이 세대의 아들들”―기독교도는 도적맞고 있다(5:1-8, 1952. 7).
7. “그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5:25-26, 1952. 7).
8. “바울 사도의 기도”(6:1-4, 1952. 10).
9. “살려는 자의 독백”(6:33-36, 1952. 10).
10. “평신도의 목회”―그룹 운동의 방향(7:6-10, 1953. 1).
11. “켈케고오르의 연애”(7:25-31, 1953. 1).
12. “피조물의 탄원”(8:29, 1953. 6).
13. “미식과 한식”(8:29, 1953. 6).
14. “고독자”(9:1-2, 1954. 7).
15. “우물가의 대화”(9:3-9, 1954. 7).
16. “복음의 시작”(예수의 생애, 마가복음 강해)(9:18-24, 1954. 7).
17. “킬케고오르의 생애”(9:25-33, 1954. 7).
18. “평화의 의미”(크리스마스 설교)(10:2-5, 1954. 12).
19. “복음의 시작”(예수의 생애, 마가복음 강해)(10:16-21, 1954. 12).
20. “삶의 기록”(10:29-33, 1954. 12).
21. “불교와 기독교”(10:33-34, 1954. 12).
22. “신앙 생활이란”(10:34, 1954. 12).
23. “너는 속고 있고 속이고 있다”(11:1-4, 1955. 5).
24. “바울의 실존”(빌립보 3장)(11:5-11, 1955. 5).
25. “교권과 충돌”(예수의 생애, 마가복음 강해)(11:30-34, 1955. 5).
26. “자다가 깰 때”(12:1-4, 1956. 1).
27. “회개의 의미”(12:5-9, 1956. 1).
28. “기독교의 본의”(12:10-19, 1956. 1).
29. “주검에 이르는 병”(12:28-34, 1956. 1).
30. “12사도”(예수의 생애, 마가복음 강해)(12:40-44, 195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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