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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5

내가 만난 안병무 박사

조회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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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태수

(호서대학교 교수)


1. 베레모 쓴 교수님


내가 안병무 박사를 처음 뵌 것은 아마도 1968년 9월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1968년에 한신에 입학했고, 안 박사님은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 교장을 역임하면서 한신대학 학부와 대학원에 강의를 나오시던 때였다. 그 당시 안 박사님은 둥근 베레모를 쓰고 다니셨다.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모자였다. 한신에 오실 당시에 안 박사님은 머리칼이 상당히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1922년 생이니까 그 당시 그는 46, 7세 밖에 안되었는데, 상당히 노숙한 모습이었다고 기억된다. 아마도 머리숱이 적어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당시 안 박사님에 대한 인상으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인사를 아주 친절하게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누구든지 만나면 깜짝 놀라는 환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곤 하였다. 동료 교수나 친구들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깜짝 반기는 표정으로 인사를 받곤 하셨다. 본받을 만한 인사 태도라고 생각되었다.
안 박사님은 1970년 5월에 한신 교수로 오셨다. 나는 4학년 1학기 때 처음으로 안 박사님의 <바울신학> 강의를 들었다. 벌써 27년 여의 세월이 흘러서 그 강의의 특징이나 내용이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나는 한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대학원에서는 안 박사님의 <신약신학 세미나>를 들었다. 안 박사님은 대학원 세미나가 끝나고 종강이 되면 세미나 참석 학생들을 수유리 자택으로 초청하곤 하셨다. 우리도 세미나가 끝난 다음 수유리 자택으로 가서 넓은 잔디밭에서 음식을 먹으며 담소한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안 박사님 서재를 한번 구경하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안 박사님은 “서재를 보여 주는 것은, 여자가 자기 속옷을 들추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서재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많은 책들이 서가에 잘 정돈되어 꽂혀 있었다. 아마도 내가 최초로 본 서재다운 서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안 박사님은 우리를 서재 이곳 저곳으로 안내하면서 “신약에 관한 책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모으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나도 이 다음에 구약에 관한 책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모아야지” 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 박사님 만큼은 책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내가 구경한 서재는 김정준 박사의 서재였다. 1974년에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김정준 박사의 조교로 있으면서 김박사님의 서재를 정돈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G. von Rad의 Der Heilige Krieg라는 책과 A. Weiser의 ATD주석Das Buch Jeremia가 각각 두 권인 것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그 두 책을 내게 주셨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안 박사님의 서재를 종종 볼 기회가 있었다. 안 박사님은 80년대 후반에 수유동에서 서초구 우면동으로 이사하셨는데, 더러 세배드리러 갔다가 안 박사님의 서재를 종종 볼 기회가 있었다. 수유리 시절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이층 서재에 차곡차곡 잘 정리되어 있었다. 작년에 안 박사님이 돌아가신 후 그 책들은 한국신학연구소에 기증되었다고 들었다. 이제 그가 소중하게 모은 책들은 한국신학계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2. 월급을 사양하는 소장님


나는 김정준 박사의 조교로 모교에 남아 독일어, 영어 등 어학을 강의하면서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 박사님은 1973년 5월에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일하고 계셨다. 그 때 연구소에는 연구원 제도가 있었다. 나는 당장 독일 유학을 떠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독일에 갈 때까지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학문적인 훈련을 받고 싶어서 안 박사님께 나의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 박사님으로부터 간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 왔다. 연구소의 초대 간사로는 지금 성공회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손규태 박사가 일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학이 결정되어 마침 후임 간사를 구하는 때였던 것이다. 그 때 안 박사님 가까이에 있는 여러 제자들이 간사 물망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 박사님과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나는 간사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때였기에 안 박사님의 제의는 더욱 뜻밖의 일로 생각되었다. 독일 유학 때까지는 어차피 2-3년은 기다려야 했으므로 나는 안 박사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75년 가을부터 연구소를 드나들며 간사업무를 익히다가 1976년 3월 1일부터 정식으로 간사로 일하기 시작해서 1978년 7월까지 2년반 동안 재직하게 되었다.
나는 간사로 일하는 동안 안 박사님을 가까이 에서 모시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첫째로 내가 안 박사님께 배운 것은 그의 청렴결백한 성격이었다. 그는 소장으로 일하면서도 월급을 받지 않았다. 이사회 때 이사들이 소장 월급을 결정하려고 해도 안 박사님은 막무가내로 이를 거절하시곤 하였다. 나는 이 광경을 여러번 목격하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몇번 사양하다가 못이기는 체 하면서 받을 만도 한데, 안 박사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월급을 거부한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추측컨대, 이미 한신 교수로서 월급을 받고 있으니 이중으로 월급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거나, 아니면 연구소가 독일교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으므로, 연구소 경비를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거절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유야 어떻든 받을 수도 있는 소장 월급을 거절한 데에서 그의 청렴결백한 성격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결국은 이사들도 소장에게 월급 주는 것은 포기하고, 그 대신 그 때 『신학사상』과 함께 안 박사님이 창간한 개인 잡지 『현존』의 인쇄비 일부를 지원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안 박사님의 청렴결백한 성격은 일종의 결벽증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안 박사님 생일에 몇번 수유리 집으로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안 박사님은 번번히 집에 안 계셨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올 걸하고 후회를 하면서 되돌아서곤 했다. 그러나 생일에 집에 안 계신 것은 그가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생일이라고 집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결벽증에서 나온 의도적인 집 비우기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종의 기인적인 안 박사의 일면이다.
안 박사님의 기인적인 모습은 설날에 아주 잘 드러난다. 설에 세배하러 가보면 안 박사님은 설빔을 입지 않고 늘 평상복을 입고 계셨다. 그리고 다른 어른들에게 하듯이 안 박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배를 드리려고 하면, 안 박사님은 황급히 손을 내 저으시며 절하는 것을 말리셨다. 절하는 것을 제지당한 사람들이 의아해 하면, 안 박사님은 “나는 절을 받지 않으니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안 박사님이 절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절을 시도해 보다가 제지를 받고 중단하곤 하였다. 나는 안 박사님이 절을 안 받으시는 이유를 한번도 물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추측컨대,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인간이 인간의 절을 받는 것은 하나님 자리에 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거절하신 것이 아닐까? 아니면 다 같이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인데, 나이 조금 많다고 해서, 혹은 스승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절을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 즉 어른이라고 해서 내세우는 한국적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절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안 박사님은 세배를 안 받으신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2년 반, 수습기간까지 합쳐서 약 3년 동안 연구소에 근무한 다음 안 박사님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유학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곧 바로 일터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도 벌 겸, 공부도 할 겸, 세상 구경도 할 겸 해서 독일 유학을 생각한 것일 뿐,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것도 없었던 상태였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2-3년 일하는 동안에 안 박사님이 독일 유학의 길을 열어주셔서 1978년 8월에 본(Bonn)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3. 민중신학의 요람, 한국신학연구소


내가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독일에서의 공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82년이었다. 그 해에 NCC 신학연구위원회 편, 『민중과 한국신학』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되어 나왔다. 나는 그 책을 독일에서 받아보고 단숨에 다 읽었다. 그리고 신학한 이후 처음으로 이른바 ‘신학적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 동안 독일까지 와서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 헤매던 신학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이 민중신학이야 말로 내가 평생을 붙잡고 나갈 신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오늘까지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때 다짐한 대로 민중신학 하나만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나의 모든 삶과 신학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앞으로도 나의 신학은 오직 민중신학 하나에만 집중될 것이다.
내가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고 매진하게 된 데는 안 박사님과 서남동 박사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분들에게서 민중신학을 직접 배운 적은 없다. 다만 그분들의 쓴 책과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배웠을 뿐이다. 안 박사님은 내가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82년 이후에도 약 15년 동안 뵈올 기회가 있었지만, 서남동 박사님은 내가 귀국하기 직전인 1984년 7월 19일에 돌아가셔서 뵈올 기회를 잃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나는 위에서 내가 민중신학에 눈을 뜨게 된 해가 1982년이라고 말했는데, 실은 내가 한국신학연구소에 드나들기 시작하던 때인 1975년에 이미 민중신학은 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태동 장소 중 하나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한국신학연구소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민중신학 태동의 핵심부에 앉아 있었으면서도 거기에서 민중신학이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참으로 내가 어지간히도 둔감했다고 생각된다. 등하불명이란 말이 그 당시의 내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변명을 하자면, 내가 둔감하기도 했겠지만 그 당시 민중신학은 공개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민중신학의 태동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비단 나만의 사정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을 시작한 당사자들은 제외하고는 그 당시 민중신학이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당시 민중신학을 하는 분들이 별도의 모임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러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모인 장소가 연구소였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나 민중신학에 관여했던 분들이 연구소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안 박사님과 서남동, 문동환 교수님 등 교수직을 해직당한 교수들, 그리고 송건호, 천관우 씨 등 해직 언론인들이 안 박사와 관계를 맺고 연구소를 드나들었고, 함석헌 선생님도 자주 찾아 오시곤 했다. 내가 비록 그 당시 민중신학의 태동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민중신학의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밴 민중신학적 분위기가, 때가 되고 계기가 주어지자 내 안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 익힘이 나로 하여금 민중신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하고, 친숙한 신학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안 박사님을 만나고 연구소에 몸담고 일하게 된 것은, 내가 민중신학을 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만약 안 박사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연구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다른 어떤 신학에 경도되어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안 박사와의 만남은 내게 있어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의 미남은 나의 신학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안 박사님께 감사한다. 안 박사님은 내게 있어서 인생의 안내자일 뿐만 아니라 신학의 안내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4. 한국신학에 대한 자부심


내가 안 박사님에게서 배운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한국신학에 대한 자부심일 것이다.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서구 신학을 높이 평가하는 말만 들으면서 신학을 공부해 왔다. 서구 신학자들의 신학이론에 대하여 비판하는 말은 들어 본 기억이 없다. 모든 서구 신학자들의 신학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칭찬 일변도의 말만 들으며 신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나는 서구 신학에 대한 일종의 외경심을 갖게 됐고, 서구 신학은 한국인으로서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만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구 신학, 서구 신학자들에 대하여 외경심을 갖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종의 공포감을 갖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외경심과 공포감을 가지고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서구 신학 내지 독일 신학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지냈다. 물론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쓰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이 같은 본문을 가지고서도 여러 가지로 달리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내 나름대로의 독특한, 나만의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은 부분적인 자신감일 뿐 여전히 서구 신학의 위력에 눌려서 지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던 내가 한국신학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서구 신학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안 박사님이나 서남동 박사님의 대담한 반/탈서구신학적 선언을 들은 다음부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분들의 서구 신학, 서구 신학자들에 대한 대담한 비판과 도전, 그리고 대안 제시는 우리 후학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우리도 서구 신학을 넘어서서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분들이 우리 후학들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말로써 만이 아니라 그분들이 제창한 민중신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분들이 남겨 준 한국신학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히 큰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민중신학 제1세대 신학자들의 자부심은 결코 그들 자신들만이 자아도취적으로 생각하는 자부심에 그치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이 창시한 민중신학은 한국적 신학으로서 세계 신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인정받는 신학이 되었다. 사실 한국 기독교 100여년의 역사 가운데서 세계 신학계에 한국적 신학으로서 인정받는 신학이 민중신학을 제외하고 또 다른 어떤 신학이 있는가? 없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안 박사님을 위시한 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야심찬 신학 작업은 대단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민중신학이 아직 제대로 신학적인 틀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으로서의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신학의 방향과 관점은 세계교회를 갱신하고 개혁할만한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신학적 틀을 온전히 갖추고 제 1세대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과제들을 수행할 책임과 의무가 민중신학 제2, 제3세대들의 어깨에 메워져 있다.
5.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안병무 박사는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크게 이바지한 신학자였다. 안 박사의 한국신학과 교회에의 기여는 비단 그가 민중신학을 창도한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신학사상』과 많은 신학서적들, 그 가운데서도 진보적 신학서적들을 출판함으로써 세계신학을 적기에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소개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신학이 세계신학계에 뒤지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창간한 『신학사상』은 창간된지 20년이 넘는 오늘날 까지도 한국신학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싶이한 신학종합잡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신학연구소 외에도 안 박사님은 향린교회, 개신교수녀회인 한국디아코니아 자매회, 한백교회 등을 단독으로 혹은 다른 분들과 함께 설립하여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기여하였다. 또 그는 1951년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야성』이라는 개인 잡지를 창간하였고, 1969년에는 『현존』이라는 개인잡지를 창간하여 1980년까지 계속하였다. 『현존』이 폐간된 이후에는 『살림』지를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기관과 잡지들을 설립, 창간하여 운영함으로써 안 박사님은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 한국신학 100여년의 역사 가운데서 안 박사님 만큼 뚜렷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여러 기관들을 설립하고 이끌어 갔으면서도, 그 기관들에 계속 머물면서 그 열매를 따먹고 안주하려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하셨다. “공을 이룬 다음에는 거기에 집착해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이 말씀대로 그가 일으키고 키운 기관들에 집착하지 않고 때가 되면 후계자들에게 자기 자리를 넘겨주고 이선으로 물러나 앉으셨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남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발버둥치는 한국적인 풍토에서 좋은 귀감으로 남아 있다.
그는 특히 제자들을 아끼고 키우는 데 많은 정성을 들인 분이셨다. 아마도 안 박사 만큼 전공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기른 신학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안 박사님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들을 받은 것으로 안다. 특히 70-80년대에 독일 유학을 한 신학도 치고 직간접적으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그는 제자들의 길을 열어주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필자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비단 독일 유학을 한 신학도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70-80년대의 군사 정권 때에 직장을 쫓겨 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들었다. 사람을 끄는 그의 인화력과 친화력이 사람들을 그의 곁으로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여 온 그들에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또 그렇게 했다.
안 박사님은 가셨으나 그가 남긴 씨앗들은 싹이 나서 큰 나무들을 이루고 열매들을 맺고 있다. 이 나무들은 더욱 크게 자라서 풍성한 열매들을 맺을 때 안 박사님은 이 나무들과 함께 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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