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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4

안병무 박사

조회 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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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진균

(서울대학교 교수)


안 선생을 떠올리면 어차피 80년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그 중심에는 ‘해직 교수’ 시절을 놓지 않을 수 없다. 1983년 8월 18일(목) 오전11시 서울 서소문동에 자리잡고 있는 음식점 ‘남강’에 당시 해직 교수 25명이 모여서 하나의 대책을 의논하였다. 아마도 80년 5·17사태를 일으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 무수한 사람이 죽고 상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시받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런 세상에 살 때, 오직 광주의 희생자와 그 가족이 처절하게 저항의 몸짓을 휘젖고 있을 무렵 그 어느 누구도 몇 사람이 안심하고 한 자리에 모이기조차 어려운 때 서울에 있는 해직 교수 25명이 그 전날 급하게 연락하여 모이게 되었다. 물론 그 음식점에는 해직 교수들이 모이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 기관원이라고 흔히 불리는 그런 사람이 옆 방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모임을 이끌고 가야할 분이 안 선생과 변형윤 교수였다. 그날 모인 교수들은 하나의 원칙을 세웠는데, 즉 “해직 교수의 복직은 원적 대학으로의 복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기로 정례화하고 이름하여 ‘해직교수 간담회’라 하였다. 아마도 당시 80년 신군부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서 광주 지역의 경우를 제외하곤 해직 교수들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실 1983년 8월 16일에 느닷없이 광주 지역 해직 교수들을 타 지역의 대학으로 복직시킨다는 정부의 발표를 보도하였다. 이 정부의 방침은 결과적으로도 해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해 가을 2학기에 광주 지역 해직 교수 어느 누구도 복직된 분이 없었다. 그리고 광주 지역에서 해직 교수의 타지역 복직 문제를 해당 문교부나 대학 당국에서 추진한 것도 아니고 타지역의 대학에 어떤 양해도 얻으려는 노력도 없이 어떤 기관에서 추진하였던 것이다. 적합한 주체가 추진한 것은 아니지만 전남대 해직 교수들은 우회적인 복직방침을 수용하였다. 즉 먼저 광주분들이 그렇게 해주면 한 학기 후에는 전국의 해직 교수들에게도 원적대학으로 복직한다는 원칙을 수긍해서 어려운 결단을 해 주었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해직 교수들이 이 보도를 듣고 마음이 개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하는 꼴이나 보자는 심사가 많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17일 아침 소백산 산행을 하기 위해 청량리역에 나가 있었다. 변형윤 선생도 함께 가기로 하고 나와 계셨다. 그런데 이우성, 강만길 교수 두 분이 청량리역으로 나와 우리의 산행을 가로 막았다. 광주 해직교수의 복직방침 문제를 논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긍이 가는 것이기에 오랫동안 준비했던 ‘소백산’ 산행을 포기하고 두 분의 제의에 따라 네 사람이 곧장 제기동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신학연구소’로 가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안 선생을 뵙게 되었다. 넓고 호화로운 연구소는 아니지만 이미 그 연구소가 안 선생의 주도로 해방신학-민중신학의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한다는 소문이 나고 있었고, 안 선생이 70년대 반유신체제 민주화운동의 선두진영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해직 교수 중에서는 아마도 그 분이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도 훌륭할 수밖에 없었다. 곧 여러분에 연락하여 조요한, 유인호, 조용범, 서광선 교수들이 오고 오후에도 몇분이 더 오게 되어 다음날 일단 음식점 ‘남강’에서 모이게 하였던 것이다. 안 선생하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서울에서는 83년 봄부터 몇몇 해직 교수들이 끼리끼리 모이면서 어떤 대처방안을 찾아가던 중에 이렇게 여름에 ‘해직교수 간담회’를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모이면서 그 해 연말까지 지속되었는데 또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전두환 정권은 여름에 광주의 해직 교수의 복직 문제를 결국 거짓으로 귀결시켜 놓고서도 전국의 해직 교수에게 다시 한번 동일한 수법을 동원하였다. 1983년 12월 6일 문교부는 “해직 교수는 타대학에 그 대학 교수 충원의 형편에 따라 신규 채용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해직교수 간담회는 12월12일에 모임을 갖고 원적 대학으로의 복직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간담회’를 해산하고 원적 대학으로의 복직 원칙을 찬성하는 교수들이 1983년 12월 20일 평창동 ‘평창면옥’에 다시 모여 “해직교수협의회”를 정식 발족하였다. 25명이 모여 발기 및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운영위원에 이효재, 변형윤, 안병무 교수를 뽑고 실무위원에 이영희, 장을병, 강만길, 서광선, 김진균 교수를 뽑았다. 그리고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였다. 이번 문교부의 조치는 해직 교수의 복직이 아니라 복직의 기회를 봉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것이 해직 교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화합, 민주발전, 학원정상화에 역행하고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그 무렵 정부가 발표한 제적학생 복교조치가 아무런 조건 없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촉구하는 취지도 넣었다.
물론 안 선생은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언제나 심신을 조신해야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 정확성이 돋보였으며 의견서 발표의 문구를 작성해 가는 전술적인 방안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제시하고 대처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효과를 잘 겨냥하고 단계적으로 전술을 배치하는 데도 탁월한 의견을 잘 제시하곤 하였다. 특히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이영희, 강만길 교수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소장 조승혁 목사)가 중고교 사회 과목 담당 교사들로 하여금 교과서에 나타난 통일 문제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게 한 연구 사업이 있었는데 이 교사들에게 ‘북괴’에 동조하는 하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구속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연구교사들에 대한 문제는 이미 그해 여름에 마무리된 후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당시 안 선생은 이 문제를 대처하는 다각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가족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였다. 안 선생은 강만길 교수와 한 동네 이웃에 살고 있어서 마음을 각별히 쓰는 것 같았다. 84년 2월에 검찰은 ‘공소보류’라는 방법을 찾아 두 분을 석방하였다.(조 목사도 구속되었다가 함께 석방되었다.)
해직 교수협의회는 복직운동이 민주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게끔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한편으로 해직의 근거를 규명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첫째, 해직 교수가 발생한 대학의 총장을 초치해서 해직의 사유를 규명하는 작업, 둘째, 문교부장관에게 해직 교수의 숫자와 현황, 그리고 해직의 사유를 규명하도록 요구하는 것, 셋째, 어느 것도 아니되면(실제로 초청하고 해명요구서를 보내어도 무응답이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자임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그 사유를 묻는 것. 다른 한편으로 해직 교수가 서울에서만 모일 것이 아니라 1980년 민중항쟁의 텃밭 광주에 가서 이 해직의 문제를 결부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84년 3월 12일 광주 금수장호텔 605실에서 3월 정기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안 선생은 건강이 썩 좋지도 않았지만 젊은 교수들에게만 광주총회를 맡겨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함께 고속버스로 광주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광주총회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해직 교수의 발생이 광주민주화운동과 결부되어 있음을 밝히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내용으로 담고 대통령이 이에 대한 직접적 해명과 해직 교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발표하기를 요구하고 면담을 요청하고 한편으로 민중아카데미를 만들어 교수의 본연인 강의를 할 것임을 국내외에 알리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 곳에서 하루밤을 유한 교수들은 망월동 묘지에 가서 참배하였다. 그 때 내가 가져간 사진기로 참배한 장면 몇 장을 찍었는데 안 선생에게도 그 사진을 드렸으니, 어디 유품 중에 남아 있을는지. 3월 21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국내외 기자를 불려 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통령 면담 요청서를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아마도 1980년 광주의 민중항쟁을 성명서 형태에서 자세하게 다루면서 그 성격을 밝힌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이 기자회견에는 안 선생, 이효재, 변형윤, 장을병 교수 및 내가 참석하였다. 정부당국으로서야 해직 교수의 광주성명서 발표가 대단히 거북하였을 것이다. 이 심사는 곧 청와대에 있는 사람이 비공식적으로 운영위원 세 분을 점심 초대한 자리에서 드러났다. 그 자리에 가신 세 분 선생님은 모두 심정이 맑고 곱지만 정의를 위해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는 올곧은 분들이다. 당시 안 선생도 그 사람을 붙잡고 무도하게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타일렀다고 한다. 그 해 6월 14일 정부는 해직 교수의 원적대학 복직이 학교의 사정에 따라 가능하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2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 갈 수 있었다. 4년 1개월만이었다.
83년 여름 이후 해직 교수들이 모이는 시기 동안 안 선생은 한국신학연구소를 통해서 몇가지 일을 시도하였다. 첫째는 한국사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 있었다. 해직 교수 중에는 다산연구회 소속 교수들이 있었는데, 한국사 전공으로 명망이 높은 분이 있었다. 안 선생은 민중신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이곳 역사와 접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강했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국신학연구소에 세미나를 열 경우에 한국사 전공 교수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사회과학 전공자도 한국 사회 연구를 중심으로 초대하곤 하였다. 물론 의도한 만큼 효과를 본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당시 상당히 고조되고 있던 민족 통일에 대한 기독교계의 관심에 있어서 한국사가 항상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는 상당히 확산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둘째는 물론 첫째의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한 해직 교수의 생계를 도우는 문제와 연구의 문제를 연결한 사업이 장만되었다. 한국사 중에서도 민중의 현실적 삶을 역사적으로 기술하여 발간하는 사업이 안 선생의 주선으로 수립되었다. 고려, 조선 전후기, 일제시대와 현대로 시기 구분하여 각 시대의 민중생활을 가급적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독일로부터 연구비를 조달하여 진행케 하였다. 나는 조선조 후기를 맡았는데, 마침 다산연구회에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강독하면서 역주하고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을 진행 중에 있었다. 나도 그 다산연구회에 참여하여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한 부분을 맡게 되었다. 목민심서는 조선조 후기를 민중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은 훌륭한 저술이었다. 물론 나는 그 원고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지만 전체 사업이 마무리되지 못하여 완성 출판되지 못하였다. 너무 아쉽고 안 선생에게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물론 해직 교수들의 생계에 연구비가 큰 보탬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연구비를 장만해 보낸 독일 쪽 당사자와 연구소의 긴밀한 협조관계에 누를 끼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79년에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반공법으로 고생할 경우에 안 선생이 별도로 독일에 교섭하여 그들을 재정적으로 연대하는 마음으로 많이 도운 사실도 있었다.
1984년 8월 경 해직교수협의회는 복직교수협의회로 이름을 바꾸어 서로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기를 다짐하고 복직된 의의를 살려서 강단에서도 시대의 문제에 맞서서 연구와 실천을 융합하기를 바랬다. 해직 교수가 복직하여 84년 2학기부터 강의를 함으로서 민주화운동 실천부문에 더 많이 시간을 내어 헌신할 수는 없었지만, 해직 교수가 복직했다고 해서 세상이 바로 군사독재체제가 붕괴된 것도 아니고 민주화를 위한 단계적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전 정권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학원안정법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이 시도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수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곧 그 시도를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이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길로서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자 전 정권은 ‘헌법을 고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시국을 엄청난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별로 시국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복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교수들이 안 선생 댁에 모인 일이 있었다. 사모님의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 날도 몇 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어서 중압감 드는 문제를 한결 마음 놓고 논의할 수 있었다. 그 모임이 있는 시간에도 밖 골목에는 기관원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몇 대학이 선언의 시간을 같이 하기로 하고 준비하였는데, 어느 대학에서 먼저 하게 되어서 특히 안 선생이 속상해 하였다. 그렇지만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전국에서 대학별로 계속되었고, 마침내 전국 교수합동선언도 내게 되어서 민주화이행기를 위해 지식인의 사명을 잃지 않고 노력한 것은 기록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 중심에 항상 안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곧 이어서 전국의 노동자가 대투쟁의 길에 나섰다. 6월항쟁에 의하여 전 정권은 6·29선언을 통해서 대통령직선제를 공고하고 민주화이행의 길을 내주게 되었다. 역사는 기대하는 만큼 바로 진행되는 것은 아닌지 다시 군부에 기반하는 노 정권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이 때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민주노동운동이 앞장을 서고 모진 탄압을 받아가면서 전노협을 만들어 내어 민주노동운동의 전국적 전선을 구축하였다. 노 정권은 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동운동을 분쇄코자 혈안이 되었지만 역사를 꺽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한신대에 두 경제학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연유는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 한신대가 그 두 경제학 교수를 지지하던 쪽과 반대해서 내 보내게 된 쪽, 양쪽의 합세된 힘에 의하여 균열보다는 변증법적 발전을 하는 듯이 보이게 되는데, 그렇다면 한신대에서는 지금쯤 그 사태에 대한 평가가 나올 법하다고 생각된다. 두 교수는 내보낸 쪽이 그 당시 신학전공 교수가 많았다고 보았으며 그 중에 안 선생도 자리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 한신대 신학 쪽 교수들이 사회과학의 진보적 영역에 대하여 어떤 인식과 평가가 있었고 당시에는 그것을 포괄하는 데 문제가 있었는지 또는 당시 한신대에 모이는 사회과학 전공자가 신학적 인식론에 어떤 한계가 있어서 한 울타리에 포섭하기 어려웠는지가 현재의 성찰적 전망에서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태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이루어져서 발전적 전망에 기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며 혹시 안 선생에게 누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역사적으로 해명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사태가 이상하게도 민주적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동시에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던 기독계 세력이 오히려 한발 물러서는 듯한 정세와 맞물리고 있었다는 판단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나서서 수습하려 하였고 나로서도 당시 한신대 사태에 당면하여 해직된 그 경험 자체 때문에 해직의 사태가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 끝까지 유인호 교수와 장을병 교수와 함께 안 선생을 비롯해서 몇 분을 찾아가서 간곡하게 이야기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 사태에 대하여 가슴 속에 말끔히 씻기지 않는 여진이 남아 있다.
그 뒤에도 군축평화 문제나 통일문제, 외세 간섭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자리에서 안 선생을 뵙곤 하였다. 안 선생은 서울대 사회학과 동문으로서 나에게는 대선배가 된다. 사실 안 선생이 평생을 두고 사회학과와 인연을 깊이 맺지 않아서 동문 후배들이 그분이 선배되는 줄을 잘 모른다. 그런대로 내가 서울대학교의 전통있는 노래패 ‘메아리’의 지도 교수를 맡아 하는 사이에 안 선생이 늦게 낳아 기른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와서 ‘메아리’에 가입하여 노래공연을 할 때 아버지로서 참관하러 오는 장면도 있어서 참 좋아 보였다. 분단되기 전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열이 있어서 우리의 현대사가 있고, 분단 이후 50년 동안에는 그 질곡을 이기기 위하여 평생을 바친 고귀한 분들이 있다. 큰 별들이 자리잡고 빛나는 성좌를 이룬다. 안 선생은 그 큰 별자리에 앉아서 민주화를 진전시키고 통일을 하게 하는 길을 인도한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렇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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