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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30

나의 스승 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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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하태영

(삼일교회 담임목사)


선생께서 소천하신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년째를 맞이한다. 선생께 제대로 제자 구실도 못한 처지여서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다. 선생의 호가 심원(心園)인 것을 안 것은 당신의 장례식 순서지를 통해서였으니, 제자치고는 별볼일 없는 제자이리라.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분이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소극적인 성격이어서 존경하는 스승 곁에 가까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 박사님의 경우는 다른 이유로 가까이하지 못했다. 다가서면 웬지 빨려들어가 버릴 것 같은 중압감이 나로 하여금 선생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게 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선생께서는 그런 분이었다.


신학과의 조우


안 박사님을 처음 대한 것은, 신학교 2학년 신약신학을 공부하던 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신학은 당위를 습득하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어떤 이론의 여지가 있는 수 없는 ‘정답’을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열심히 노트하는 일이다. 그리고 숙지하는 일이다. 나의 지식을 인식하는 지평이 이처럼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안 박사님의 시간이었다.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조는 눈들을 뽑아갈 듯한 눈빛, 번쩍거리는 이마에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흐트러진 머리, 모두가 매혹적이었다. 불트만을 공부하셨다든가, 바르트를 공부하셨다든가, 아무튼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간하지 못하는 햇병아리였으니 선생의 주·객 도식을 가르는 톡톡 튀는 강의는 시간 내내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하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는 말씀이다. 사실이 그랬다. 안 박사님은 줄곧 질문했고, 우리는 대답을 만들어 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다음 시간도, 그 다음 시간도 질문과 대답은 이어졌다. 더욱 곤혹스러웠던 것은 우리더러 질문하라는 것이었다. 질문을 하라고 다그치니 어쩔 수 없이 질문을 하기는 해도 지금 생각해도 진땀나는 일이다.
하지만 안 박사님의 수업방식이야말로 신학하는 방법에 대해서 눈뜨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신학은 바로 질문하는 학문이다.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정해진 대답에 충실한 공부는 신학이 아니다. 이런 신학 방법은 자연히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해줬다. 성경은 바로 그런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지평 안으로 질문해 들어오시고, 인간은 안개구름을 뚫고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는 게 성서이다. 만일 안 박사님과 같은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께서 “질문이 대답을 결정한다”고 하셨던 것은 사변적인 질문이 아닌 ‘고민’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신의 말씀대로 “실존적 절규“를 하라는 것이었다. 선생의 가르침대로 정말 절규하는 목회를 했다면 오늘의 나는 아니었으리라.


신학은 인간학이다


선생의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명제 또한 나의 신학에 대한 지평을 새롭게 열어준 명제이다. 신학이 신학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신학이 인간의 문제들에 대답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은 실존을 말한다. 물론 신학은 인간학이면서도 실은 인간 중심의 학문은 아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진리가 있다. 신학이 실존만을 말하게 될 때 소위 ‘인본주위’가 된다. 신학은 인간의 실존을 묻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계시를 말한다. 이 중심이 흐트러졌을 때 혼란을 겪는다.
선생의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명제가 제기하는 문제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논쟁과 논의는 교내에서도 치열했음을 나중에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마다 자기 생각이 있고, 논리가 있고, 신앙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 같은 학문적 논의는 캠퍼스를 뜨겁게 했고, 생명력 넘치게 했다. 이 같은 학문적 열정이 점차 시들어 가고 대신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여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같은 기미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문적 열정이 이전 같지 않은 캠퍼스에는 교권이라는 새로운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나타난 현상은 ‘토론’이 아니라 ‘줄서기’이다. 아마도 이 ‘줄서기’ 현상은 순수했던 학문적 열정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 힌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 만남


앞에서도 말했지만 안 박사님과의 개인적인 유대는 그리 내놓을 만한 게 없다. 그래도 내게는 소중했던 개인적 만남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은 만남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천하시기 전까지 세 번은 되는 듯하다. 한 번은 신학을 졸업하고 진로문제로 심히 고민하고 있을 때이고, 두 번째는 동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안 박사님이 나를 일부러 불러서 만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은 소천하신 해 겨울 우면동 자택으로 찾아가서 뵌 일이다. 이때는 선생께서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고 뵙고 싶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 외의 만남은 여럿이 어울려서이거나, 교육원 교육프로그램에서 수강생으로 뵙는 정도였다. 1971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천하시기까지 26년이 지나는 동안 개인적 만남이 세 번 정도이다. 대략 9년에 한 번 꼴로 만나뵌 것이 된다. 이 정도면 그 거리를 짐작할 만하다. 그래도 나는 선생께서 교육원장이실 때 아마 가장 열성적으로 수강한 사람 중에 하나일 듯하다. 당시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던 나로서는 교육원 수강은 가장 신선한 재충전의 시간들이었다.
1972년 7월 13일이다. 당시 나는 군목입대를 앞두고 있었지만, 장래 진로 문제로 딴은 심히 고민하던 때이다. 신상 문제를 쉽게 드내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친구들과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수유리 자택으로 안 박사님을 찾았다. 물론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분에게서라면 뭔가 비전을 얻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내 반가이 맞아 주시는 선생께서는 내 스케줄을 묻고는, 당신이 살아온 날들, 그리고 경험했던 사건들을 마치 전기처럼 말씀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선생께서는 내 고민을 눈치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애를 말씀하시며 내게 무엇인가 길을 안내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세 시간 가까이 하셨으니, 아마도 그 모든 말씀을 기억한다면 선생님의 생애에 대해서 당시로서는 내가 가장 많이 아는 제자일이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당시 녹음한 90분짜리 테잎이 있으니 이만하면 증거는 충분할 것이다. 당시 선생의 말씀 가운데 “나는 예수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대목은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유영모 선생과의 만남이 그같은 결심을 굳히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선생의 예수에 대한 정념을 짐작할 만하다. 이 같은 예수에 대한 정념이 뒤에 민중에게로 전이된 것이 아닐까.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 또한 애절한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천진무구함의 발원지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당신의 생애 중 결정적인 사건들을 아낌없이 털어놓으신 것을 생각해 보면, 선생께서는 보잘 것 없는 제자일지라도 그처럼 허물없이 아끼신 분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하지만 나로서는 선생의 기대가 오히려 선생님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점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내 속에서 선생께서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했다. 저간의 목회 현장에 매이다 보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고, 더구나 나의 시골 목회는 진을 빼는 날들이었다. 희망 없이 버려진 것같은 교회를 섬기다 보니 목회일 말고 다른 데 마음 둘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고, 목회 역시 고단했다. 의문이 생겨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생에게서 듣고 배운대로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을 찾는 정도였다. 물론 선생의 서책을 가까이 하며 선생의 신학적 사유를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7년 동안의 시골 목회를 마치고 동경에 공부하러 갈 때도 짐꾸러미 속에 든 책은 온통 안 박사님의 글과 민중신학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신학을 전공할 것은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나름으로 민중신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안 박사의 제자라는 프리미엄(?) 덕에 동경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바램을 이루지는 못했다. 당시 안 박사님은 민중교회론을 정립하고 싶어 하셨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경험을 지닌 제자들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당신께서도 몹시 답답해 하시는 듯했다. 물론 이따금씩 시론을 발표하기는 하셨지만, 아직은 실험적인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발표된 안 박사님의 글은 기존 목회자들로부터는 비난의 대상이었고, 안 박사님을 추종하는 열성적인 제자들(?)은 비판을 수용하기보다 방어하기에만 열중인 듯했다. 안 박사님을 너무나 존경해서 그랬으리라. 아니, 그것이 혹시 ‘줄서기’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생께서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당시 공석이었던 P교회를 맡으라는 게 아닌가! 나로서는 뜻밖의 제안이어서 몹시 당황하고 있었지만, 선생께서는 이미 결정하신 것 같았다. 본의는 아니지만 나는 선생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신학과 가슴에 담긴 교회상을 완성하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선생을 존경하면서도 선생의 신학적 사유와 내 목회적 상황과의 갭을 메우지 못했고, 아직은 선생의 민중신학에 대한 정념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선생께서는 나의 그 같은 불비를 ‘가능성’으로 보셨는지도 모른다.
선생의 제안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른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다. 상황이 전환되어서 P교회를 맡는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나로서는 홀가분한 일이었다. 선생께서는 그 일로 마음쓰셨고, 나는 오히려 그 같은 선생께 송구스러웠다. 나는 다시 동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나는 왜 그리 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때로 궁금해지기도 한다.


교회에 대한 열정


잠시 선생의 교회에 대한 열정을 언급해야겠다. 선생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심상에서 교회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생의 글은 사변적이고, 철학적이고, 때로는 과격해서 교회를 뿌리째 뽑아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논리만을 보고 논리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오해이다. 선생의 대부분의 신학적 진술들은 교회 강단에서 이루어졌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야말로 선생의 예수에 대한 정념을 담은 인화지였고, 선생의 신학적 담론은 그 인화지에 떠오른 예수의 초상을 모자이크한 작품이다. 선생의 가슴 속에는 아직은 희미한 예수의 초상을 교회라는 순백의 화선지에 그리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선생께서는 교회를 “떠나서” 교회를 “담지”하려고 전력투구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생에게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수의 살아 있는 초상을 담을 수 없을 만큼 불결해진 교회이다.


흰사슴이 되어 …


선생님을 마지막 뵌 것은 소천하신 해 1월 중순 경이다. 우면동 자택 서재 뒷뜰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한 늦가을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서 있고,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밤송이 껍질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먹이를 찾는 산짐승들이 부석부석 낙옆을 헤집고 다니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호흡이 곤란한 선생께서는 이따금씩 쉬어가며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사역을 거의 다 마치셨다며(당시 나는 안 박사님의 신약성서 사역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고, 요한복음으로 알고 있었다) “헬라어” ‘너’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라며 혼자서 중얼거리시기도 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지칭할 때 부르는 2인칭 대명사 호격을 ‘너’ 혹은 ‘자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임자’라는 말이 있지요” 했더니, “바로 그거야!”라고 쾌재를 부르시기도 했다. 실은 선생께서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화두는 고향집, 어머니, 흰사슴으로 기억된다. 비몽사몽간에 고향 언덕에서 흰사슴을 보았다는 말씀이다. 아니, 당신이 사슴 같다는 말씀이기도 했다. 지금도 왜 흰사슴 이야기를 하셨는 지 궁금하다. 뭔가 설명은 하셨지만, 내 머리 속에서도 도무지 그 그림이 잡히지 않는다.
지금도 선생의 속내를 뚫어보는 것 같은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나는 너만을 사랑해!’ 하는 분위기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분이라서, 선생을 짝사랑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변변치 못한 제자까지도 가까이하려 애써주신 덕에 이만큼이라도 가르침 받았으니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선생께서는 가셨지만 그래도 선생의 족적이 많은 글로 남아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제는 선생께서 남기신 글에서뿐만 아니라, 글 뒤에 담긴 뜻, 그리고 미완으로 남은 과제들을 숙성시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선생의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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