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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49

안병무 교수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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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테오 순더마이어

(Theo Sundermeier |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


내가 안병무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 알기 위해서 과거의 문서들을 오랫동안 찾아야 했다. 그것은 1962년이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콜러(Werner Kohler) 교수의 조교였는데 그는 3년 동안 종교사와 선교학의 주임이었다. 왜냐하면 겐시헨(Gensichen) 교수가 본래 이 과목 주임이며 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는데, 그가 뉴욕 내지 런던의 신학교육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에서 아프리카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러는 여러 해 동안 일본에서 선교사와 교수로 있었으며, 인간의 문제에 대한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안 선생을 주목하게 하고, 내가 안 선생을 돌보도록 요청했다. 그는 돈 문제를 생각한 것 같았으나, 이 한국의 동료에게는 역시 연구 과제가 문제였다. 이 두 가지가 다 맞는데, 연구과제가 더 큰 문제였다. 안 선생은 실제로 진퇴양란에 빠졌는데,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을 곧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진퇴양난인가? 모든 박사 과정의 학생이 자기 논문을 쓰는 동안 체험하고 견디어야 하는 그런 피할 수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닌 것 같았고 여기서는 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안 선생은 서구 학문에 철저하게 관여해 왔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이미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그는 서구 사상을 이해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에게 그것이 그 당시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후에 자기의 새로운 신학적 맹아 속에 표현한 것에 의하면, 그는 서구 사상의 뿌리를 체험했다. 그의 작업은 비교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유교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의 과거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성장한 본향으로 이해했다.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교 경전을 서구 학문에 길들여진 독일의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아주 회의에 빠지게 했다. 그는 더 이상 유교에서 올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의 웃음거리의(geigen) 지식과 인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자기가 써 내려갈 학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에게는 도구가 결핍되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신뢰, 텍스트의 지식보다 더 많은, 학문적인 언어로 번역할 고유한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원적인 지식으로 제기하고 고전적인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용기가 부족했다. 나 자신이 유교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데 나는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그 자신이 신학과의 모든 교수보다 더 유교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야 했다. 분명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돌보아 주어야 했다. 보른캄(G웢ther Bornkamm)의 제자인 한(Ferdinand Hahn) 조교는 전문가로서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사적인 지식과 관련해서 그는 우리 모두를 능가했다. 어떤 것을 발견하고, 유지하고, 끼어넣으라고 안 선생에게 설득해야 했다. 단지 방법론적인 번역에서만 나는 도움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했는데,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의 지식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였다. 우리들의 공동작업은 분명히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곧바로 심화 작업을 하였고, 유교에 대한 이 논문의 두 번째 부분은, 그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끝을 맺을 수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나 역시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나의 고향 교회의 감독과 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 선생의 장학금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 우리 교회는 한국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선교활동도 부퍼탈에 있는 그 당시의 라인 선교를 넘어서 인도네시아에 절대적으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의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안 선생에게 일년 동안 좋은 장학금이 보장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어서 그로 하여금 이 기간에 그의 논문을 끝낼 수 있게 하였고, 구두시험을 칠 수 있게 하였다.
세 번째 문제는 우리 모두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한국 장학생 사이의 관계였는데, 나중에 안 선생이 관여하였던 문제들을 미리 겪은 것이다. 동료 박사 과정에 있는, 극단적 보수 진영의 학생이 안 선생의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감정이 상해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나 안 선생은 이 같은 도전을 침착하게 다루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자제했으며, 나는 그 침착함에, 다른 교회적인 논쟁문화를 통해서 얻었던 그 여유에 놀랐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안 선생에 관해서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내가 아프리카 신학 세미나를 강의할 때 도움이 되었다.
안 선생의 논문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그를 이끌어 주도록 위임을 받게 되었다. 일년 전부터 논문을 쓰고 있는 그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었는지 난 알 수 없다.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배웠고, 그래서 나는 배움이라는 것은, 그것이 생산적이고 깊이가 있다면 항상 교환적인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몇 년 지난 후에 나는 안 선생을 다시 만났다. 그 사이 우리는 거의 접촉을 하지 못했다. 나는 선교사로 일하면서 11년간 남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보쿰의 종교사 교수로 부름을 받아 1975년 전 가족이 독일로 다시 되돌아 왔다. 거기서 우리는 에센의 하머(H. Hamer) 박사와 학생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구상하고 1982년 돌아오는 길에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은 나로서는 첫번째 방문이었다. 안 선생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그 사이에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당시의 한국 상황을 그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밝게 나에게 다가와서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하면서 환영의 인사를 해주었다. 과거의 사건들과 우리 둘이 체험했던 것을 간단하게 나누기 위해서는 단 몇 마디 말만이 필요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나 스스로가 놀라웠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현재 교회 문제로 옮겨갔는데, 안 선생은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지만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저항 속에 있는 한국 교회의 사정을 서술하는 데 앞장서게 하고 있었다.
역시 나중에 하이델베르크 혹은 한국에서 여러번 만났을 때, 최근의 경험을 나누는 데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 둘에게는 우리를 신뢰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의 교회와 신학적 발전을 알리는 일이 놓여져 있었다. 그런 일에, 안 선생을 직접 만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언제나, 이전에 나에게 인상적으로 보여 준, 그런 참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놀랄 정도로 강렬한 유머를 발견했는데, 이는 그에게서 전에 보지 못했던 한 면이었다. 내가 이 면을 간과했던 것인가 아니면 연륜의 지혜가 나타난 것인가? 여하튼 여기서 어떤 사람이 깊고도 어두운 경험을 통해서 부숴지지 않고 형성되어가는 것을, 나의 신앙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 속에서 보는 것은 내게 아주 고무적이었다. 나는 인간적인 성숙을 그리고 그의 사고 속에서 나에게 깊이 영향을 준 신학적인 깊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더욱이 삶에 용기를 불어넣고 신뢰를 가져온, 그런 상황에서 거의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유머와 나란히 있었다. 바울이 “카리스마” 개념으로 의미한 것을 나는 인간 안병무에게서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준 그의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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