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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6

‘몸의 신학’을 가르쳐 준 정열과 지성의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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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경재

(한신대학교 교수)


1. 안 박사를 만난 인연과 함석헌 선생 -시간강사 초청 사건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남동 교수와 박순경 교수의 추천을 얻어 이화여대 시간강사를 하고 있던 초년생인 나에게, 1970년 4월말 김정준 박사로부터 예기치 않은 급한 연락이 왔다. 김 박사는 완전 해산되다시피 된 한국신학대학 교수단을 다시 재건하기 위하여, 자리잡히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 원장직을 사임하고 막 한신에 부임하셨다. 장공의 『범용기』를 보면, 만수 김정준 박사가 한국신학대학의 재건중책을 짊어지고 다시 한신으로 오기로 결단하게 된 데는 장공의 간곡한 권유와 간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다시 재건을 시작한 김정준 학장이 최초로 외부에서 영입한 교수가 안병무 박사였다. 내가 부름을 받은 것은 안병무 박사를 보좌하기 위함이었다. 교무 학사행정을 도우라는 임무를 부여하면서 12호 2급 호봉의 전임조교의 임명장을 주었다. 나와 안병무 박사와의 만남은 그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나는 안병무 박사에게 직접 강의실에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사제지간은 아니다. 그러나 한신을 인연으로 하여 만나고 그 뒤 그분과 지속된 인간적 신뢰와 귀중한 인간관계는, 안 박사가 타계하실 때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니, 25년 이상 안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지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나는 수많은 선배 신학자들과 은사되는 신학자들을 가까이서 뵙고 모실 기회가 있었으나, 안병무 박사만큼 신학자로서 뜨거운 정열과 명철한 지성을 동시에 겸비하고, 도대체 자기가 발설하는 신학적 언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말씀하고 행동하는 신학자를 많이 보지 못했다. 뒤에 좀더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나는 안 박사로부터 ‘몸의 신학’이라는 귀중한 화두를 얻게 되었다.
내가 한국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정식 사령장을 받은 것은 1971년 봄이었다. 안 박사는 교무과장을 맡았고, 나는 교무주임의 직함을 가지고 학교의 커리큘럼 작성, 시간표 작성, 외래강사의 교섭과 초빙 등을 맡겼다. 그리고 한신 교수단 재구성 과정에서 전임 한신 교수단 중 일부 교수들의 복직교섭 등 중요한 일들을 긴밀한 협의 가운데서 진행하는 일이 참으로 힘에 벅찬 한짐이었다. 안 박사는 큰 원칙을 정하고서는 나머지 작은 일 처리와 추진은 전적으로 믿고 내게 맡겨버리는 성격이셨다. 그러한 일을 처리하는 과정 중 많은 일화 가운데 함석헌 선생을 외래강사로 교섭하던 일에 관련되어 있었던 일화를 회고한다.
때는 1970년대 초, 박정희 군사정권이 삼선개헌을 강행하고(1969), 유신헌법을 불법 통과시키고(1972), 긴급조치령을 발동하여(1974) 대학을 군사철권으로 완전히 짓밟고 지배하려고 문교부와 중앙정보부(지금의 안기부)의 대학감시가 극심할 때이다. 문교부 안에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상주하고, 대학마다 안기부 직원으로서 전담자를 두어 일일이 보고하게 하고, 관할 경찰서에 명하여 켐퍼스 안에 형사를 파견하여 학원의 동태를 일일이 보고하도록 하는 숨막히는 시절이었다. 안 박사는 봄 학기 시간표를 짜는 겨울 교수 퇴수회에서, 신학생들의 교양과목의 하나로서 ‘동양고전 특강’ 과목을 넣고 강사로 함석헌 선생을 청빙하도록 결정하였다. 당시 이미 함석헌 선생은 반정부 인사로서 박정희 군사정부가 장준하 선생과 더불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기피인물이었다. 중앙신학교 시절부터 안 박사는 함 선생을 가깝게 모시던 터요, 함 선생도 다른 학교가 아니고 한국신학대학에서 부름인지라 출강을 허락하시어 시간표가 짜여졌다. 학년 구별없이 종합강의실에 150명 이상 수강신청이 이뤄졌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기 일 주일 전부터, 함 선생이 시간강사로 출강하게 되었다는 보고가 상부에 전달되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문교부에서, 중앙정보부에서 함석헌의 출강불가의 압력전화가 날아들어 왔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불가통고를 하더니만 시간이 갈수록 회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직접 전화를 받고 당국의 추궁을 일일이 상대해야 하는 나는 실무자로서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교무과장 안병무 박사나 학장 김정준 박사는 버텨보자고 격려하면서 강의를 강행하였다. 나는 담당 형사들, 중앙정보부 직원들, 문교부 학사 담당관에게 “정 못 믿겠거든 학교 강의실에 직접 들어오셔서 함 선생의 노장철학의 아까운 명강을 한번 들어 보시오”라고 응수하였다. 문교부 고등교육 국장실 명령 전화도, 중앙정보부 공갈협박도 무시하고 진행하는 함 선생의 ‘동양고전특강’은 그렇게 진행되었고, 그 뒤에도 한두 학기 더 지속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 모시게 되는 인연을 얻었으며, 동양철학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후일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학위 과정을 밟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서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작은 규모의 한국신학대학이 전국 그 어느 대학보다도 학문적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 독재정권에 비판적으로 저항하고, 학생들의 제적처리 명령에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고, 저항하고 마침내 ‘교수단과 학생 일동 삭발사건’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학교를 책임진 김정준 학장, 안병무 박사, 문동환 교수, 박봉랑 교수를 비롯하여 젊은 교수 몇 명이 합세한, 의기투합되고 화기애애하며 맘을 비운 교수단의 단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엔 항상 안병무 박사가 있었다. 그분의 시대 판단은 언제나 날카롭고도 정확했고, 그의 저항 정신은 온 몸을 던져 평안을 도사리지 않는 지성적 정열을 지녔다. 나는 그 점이 참으로 좋았고 존경스러웠다.


2. 동양사상을 깊이 이해한 실존적 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1975년 경부터 ‘역사적 예수 탐구’를 평생 화두로 추구하던 중, 교수직 박탈과 옥고를 치르면서 민중과의 만남을 통해 민중 체험을 하고 민중신학으로 신학적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그는 철저한 유럽 신학의 학문 방법과 엄밀한 학문성으로 훈련받은 제일급 실존신학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 박사는 서구의 학문 방법과 학문성을 가장 바르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서구 학문의 엄격성과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신학이 초기에 실존론적 불트만 신학으로 크게 영향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까이에서 모시고 알게 된 것은 안 박사가 한국의 신학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놓치지 않고 평생을 지냈다는 사실이다. 성장기 엄친으로부터 배운 기초 한문 실력 동양 고전에 관한 지식도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영향받은 노장철학적 사유와 그 영성에 그의 정신세계는 깊이 잠기어 있었다.
안 박사는 그가 10년 동안 유럽 학문 중심지 독일에서 유럽 학문을 배우고 느낀 것은, 유럽의 학문 방법이 철저히 주객구조와 정신/물질의 이원론에 직간접으로 영향받고 있지만, 동양적 사고는 그분열을 극복하려는 사고 방식이요, 그 학문성은 ‘몸으로 체득’함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불가 선종의 선수행(禪修行), 유가의 수신(修身), 도가의 조식, 조신, 조심법(調息, 調身, 調心法)과 관련된 양생법(養生法) 등은 모두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몸이 동반된 진리의 득증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의 학문이 서구 학문 연구방법에 침윤당하면서 ‘몸’(soma)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고 안 박사는 늘 강조하고, 한국 기독교의 영성 훈련에서도 몸의 훈련과 ‘몸의 신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다. 예를 들면,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도하는 몸짓을 반성해 보면,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교인들이 취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호긋는 몸짓이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거나, 제단 앞에 나올 때 혹은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는 몸짓도 모두 던져버렸다. 개신교는 ‘몸의 형태’ 없는 기도훈련을 하다보니 기도드리는 태도도 각양각색이다. 예전상의 ‘몸짓 부재’ 현상만이 아니라, 상제례 의식에서 총체적 몸짓으로서 조문의 표현인 ‘절하는 몸짓’을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위반이라고 잘못된 해석을 가하여 한국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사회윤리적 실천이 동반해야 하는 ‘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성경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머리나, 맘으로만 드리는 지극히 관념적 기독교 형태가 되어 버렸다고 늘 한탄하시곤 했다.
안 박사가 그의 생애 말년에, 민중신학의 노선을 지켜가면서도, 그의 신학적 사유 지평을 훨씬 동양적 실재관에로 접근하여, 기(氣) 중심적 생명신학과 “氣가 곧 프뉴마의 총체적 의미를 보다 잘 나타낸다”고까지 강조한 것은 그의 사상 밑바닥에 동양적 시고가 항상 내재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무도 인도해 주시는 분 없이, 한국의 조직신학자들은 아시아의 종교적 유산과 창조적 대결과 해석학적 대결을 통해 한국신학의 정립에 힘써야 한다는 장공의 격려와 위탁에 힘을 얻어 어설픈 문화신학과 한국 종교신학 영역을 더듬거리고 왔는데, 주위에서 나의 그런 시도에 대하여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시고 이해 가운데서 격려해주신 분은 안병무 박사이셨다.


3.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고, 교회를 사랑하고 비판한 평신도 신학자


민중신학이 기존 정통신학의 교회중심적 복음의 독점과 복음의 교회론적 유폐를 비판하기 위하여, 교회 섬기는 것을 신학의 임무로 삼는 정통적 신학의 학문적 목적을 비판하고, 탈교회 신학, 방외신학을 천명한 것은 이해는 되지만 바른 극복 태도가 아니었다. 안 박사도 말년엔 탈교회적이고, 탈기독교적인 접경선까지 자유롭게 사유의 지평을 넓히셨지만, 그의 생애 전반기 청장년시기는 물론이고 한국신학대학 교수로서 재직 시절 나는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정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안병무가 청년시절, 정규신학교육도 받지 않고 교단으로부터 정식 전도사 자격도 받지 않은 시절, 스스로 복음의 진리에 감격하고 가난한 민중의 고난에 맘아파 하면서 만주 간도와 함경도 산골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야학을 경영한 열정을 후학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장년 시절엔 평신도 교회 공동체를 꿈꾸면서 향린을 비롯한 교회봉사에 얼마나 깊은 정열렬과 사랑을 쏟은 분인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1980년대 어느 해 1월달, 한국신학대학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심사 시간에 일어난 일화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논문 제출자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신에 와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민중신학과 자기가 학부 때에 전공한 사회학을 연계시켜 논문을 썼다. 전공분야는 신약신학 분야였으나, 논문심사 위원이 세 명이어야 하는 연고로, 조직신학 분야인 내가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 동석하게 된 것이다. 논문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쓴 만큼 평균 수준을 넘은 잘 쓴 논문이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지나치게 신학을 사회 정치학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이 다루고자 하는 근본 주제를 놓치고 있었다.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병무 박사는 논문 구술시험에서 논문 제출자에게 바로 그 점을 바로 파악하게 하고 자신을 신학도로서 복음에 전적으로 위탁하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무려 두 시간 가까이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답변자는 질문의 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끝까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면서 질문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안 박사는 격분하신 채 심사하던 논문을 회의실 바닥에 동댕이 치면서,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신학 논문이 될 수 있느냐고 호통을 치시는 것이었다. 논문 심사장은 찬물을 뿌린 듯 홀연히 숙연해졌다. 나는 그 과정을 직접 목도하면서, 안 박사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순수 정열을 읽을 수 있었다. 안 박사는 평생 평신도 신학자로서 지냈으나, 목사의 직분이 얼마나 놀랍고 감당하기 두려운 직인가를 알고 있는 평신도 신학자였던 것이다. 나는 안 박사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고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러기에 무섭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평생을 내심으로 앓으면서 교회를 짝사랑한 평신도 신학자로서 그분을 존경하며 추모한다.


4. 지극히 ‘선생님’을 모실 줄 아는 순수를 지향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안 박사가 살아계셨을 때,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두 분이 계셨다. 한 분은 직접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부터 은사로 모신 장공 김재준 목사요, 다른 한 분은 함석헌 옹이었다. 장공과 함 옹은 우연의 일치처럼 두 분 모두 1901년 출생이시고, 1970년대부터 두 분은 의기투합하여 한국의 재야세력을 이끌어가신 중심 인물이었다.
안 박사의 ‘선생님’께 대한 지성은 대단하셨다. 안 박사는 한국신학대학에 부임하자마자, 개교 3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교수회에서 『장공전집』 발간을 제안하셨다. 당시 한국신학대학의 재정 형편은 말로 할 수 없이 어려웠고, 전집 출판을 하기 위한 자료준비도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안 박사는 『장공전집』 출판 사업을 밀고 나갔다. 예산은 한 푼도 없이 일이 추진되었다. 평생 성 프란시스를 애모하면서 청빈하게 사신 장공도, 한국신학대학 교수단에서 『장공전집』 출판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기뻐하셨다. 그리고 골방에 쌓아놓으셨던 옛날 자료들, 원고들을 있는 대로 내 주셨다.
나는 1970년대 초반, 당시 한신 교수단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린 막내였기에 『장공전집』 출판 과정에서 힘든 막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청계천 고서점을 뒤지고, 『십자군』, 『사상계』, 『낙수』, 『낙수 이후』 등 겉장이 다 떨어져 나간 기본자료들을 힘 닿는 데까지 모았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전집출판” 사업인지라 그 모든 일이 피곤한 줄 모르고 기뻤다. 모아지고 편집된 일차 자료는 정웅섭 교수의 재치있는 예술적 편집기법이 곁들여져 금박으로 제목을 붙이고 5권으로 출판되었다. 그 뒤 다시 15년이 훨씬 지난 1990년초 기장총회와 한신대학은 공동으로 18권으로 된 『장공전집』 결정판을 출판하게 되었으나, 앞서 1970년대 초에 출판한 바 있는 5권으로 된 기존 전집이 그 일을 이루는 데 기본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안 박사의 장공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맘이 영글어 『장공전집』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서 스승의 은혜는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안 박사의 남보다 한 발 앞선,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통찰하는 직관력에 탄복하였다.
안 박사가 ‘선생님’으로 모신 또 한 분은 함 옹이다. 신학적 영감과 사상적 깊이에 있어서 안 박사는 함 옹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간행 금지를 당한 함 옹의 개인지 월간 『씨알의 소리』가 복간되었던 1980년대 후반 이야기이다. 잡지가 복간되고 난 후 얼마 안 되어 함 옹도 타계하시고, 『씨알의 소리』 편집책임 및 출판책임을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 박사가 짊어지게 되었다. 나는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몇 년간 그 잡지를 살려내려고 애쓰시는 분들의 노고를 가까이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정세는 비록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구정권의 잔당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황이었고, 공무원 관리들의 고자세도 여전했던 시기였다. 함석헌의 살아 있는 ‘혼의 글’이 실리지 않는 『씨알의 소리』는 달이 지나고 해가 거듭할수록 재정난에 부딪혔다. 김용준 박사는 개인 사재를 털어 넣어가면서 잡지를 계속 지탱해 보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임을 느끼자 어느 돈 있는 출판사에 위탁출판을 시도해 보려고 하셨다. 물론 궁여지책이었다.
함 옹의 씨알사상을 지키고 사랑하는 점에서 김용준 박사나 안병무 박사가 다를 리 없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된 안 박사는 “함석헌의 순수한 씨알정신과 『씨알의 소리』지에 변질을 초래할 위험이 있을 바에야, 자진 폐간 또는 자진 정간함이 더 옳다”는 판단 아래 김 박사와의 인간관계에서 서운함을 감수하고 그 잡지의 출간을 정간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나는 그 당시 안 박사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나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 준 결단이었다.
어느 인간인들 완전함과 의로움이 있으리오마는, 인간적으로 많은 단점도 지닌 안 박사였지만, 내가 아는 안 박사는 항상 ‘순수를 지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그의 일생엔 이뤄지지 않을 이상을 바라보면서 항상 현실적으로 행동하려고 실존적 삶을 살고 가신 분으로 오래 오래 맘 속에 모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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