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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55

그 양반은 너무 바쁘셔서 통화가 안 되요. 통화만 된다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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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변형윤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안병무 선생은 내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분이다. 나의 자형과 해방 직후부터 신앙적 동지였던 데다가, 내게는 선배이기는 해도 거의 동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공은 달랐다. 안 선생의 전공은 사회학이었다.
안 선생과 나의 만남은 1970년대 전반까지는 나의 자형을 통한 간접적인 그리고 이따금 있는 그런 것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것이 직접적인 그리고 보다 빈번한 만남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러한 만남은 1970년대 후반에 안 선생이 재직 중인 한국신학대학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진행시키면서 나에게 경제에 관한 특강을 부탁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때 안 선생은 이미 신학의 대가이면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안 선생과 나의 관계는 더욱 짙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3월에 이른바 “서울의 봄”이 오고 각 대학에서 학원민주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안 선생과 난 어쩔 수 없이 그 구심점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 때 민주적으로 새로이 탈바꿈한 서울대 교수협의회의 회장으로 있었다. 그러다 그해 5월 17일에 쿠데타로 신군부가 등장함으로써 안 선생과 나는 다같이 해직자의 신세로 내몰렸다. 해직된 후 처음 1년간은 글쓰는 일도 시간강의나 특강도 일체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수입을 올리는 일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비록 일부 대학신문에서 청탁이 와서 글을 써주어도, 해직 교수의 글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前) 서울대 교수 아무개라는 이름 대신에 무슨 무슨 위원이라든가 편집부 이름 혹은 그 대학의 다른 교수 이름으로 실리곤 했다. 또 학교에서 허용한 특강의 경우도 모 기관의 압력으로 취소되곤 했다. 물론 이런 일은 1년 뒤부터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런가 하면 해직 교수와 접하는 사람에게는 갖가지 불이익이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나를 만나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해직 교수들의 활동을 돕는 일이 얼마나 희귀하고 소중했겠는가. 당신 자신이 해직 교수였던 안 선생은 해직 교수의 아픔을 잘 알고 당신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신학사상』의 편집계획을 짜는 기획위원회의 멤버로 나를 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를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내가 소외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실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보니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83년 8월 16일에 호남지역의 해직 교수를 원적 대학이 아니고 다른 대학으로 보낸다는 신문기사가 실리자, 그 내용에 자극을 받은 몇 해직 교수들과 함께 나는 안 선생의 한국신학연구소로 찾아갔다. 안 선생과 상의도 해야겠고 또 다른 몇 사람한테도 연락을 취해야겠기 때문이다. 모여서 의논한 결과 재경(在京)대학의 해직 교수들끼리라도 모일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리하여 그 다음 다음날에 시내 모 음식점에서 모였다. 이 모임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12월 20일에 원적 대학으로의 복귀를 고집하는 이른바 ‘복귀고수파’에 의해서 해직교수협의회가 결성되게 되었다. 이 협의회를 이끌 3인의 운영위원에는 안 선생과 내가 포함되었다.
이렇게 보면 안 선생의 한국신학연구소는 해직교수협의회의 산실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해직교수협의회원의 모임이 계속되면서 범위도 재경대학 교수에서 지방대학 교수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요구는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러는 가운데에 1984년 6월, 모임이 있은 지 바로 사흘 뒤인 6월 14일, 드디어 복귀고수파가 계속해서 강하게 주장해온 해직 교수 ‘원적 대학으로의 복귀’, 즉 진정한 의미의 복직을 허용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해직된 지 꼭 3년 11개월, 다시 말하면 47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해직 교수들은 각 대학 사정에 따라서 시기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각기 원적 대학으로 복귀했다. 나는 가장 늦어 9월 3일에야 복직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은 이 6월 14일의 결정이 나기 전인 4월 모임이 있던 날 낮에 운영위원 3인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의 요청으로 그와 오찬을 같이 한 바가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제자인 경제수석비서관의 주선으로 그와 만찬을 한 바 있으므로 나로서는 그와 두번째 만남이었다. 첫번째 만남에서도 느꼈지만 그를 비롯한 권력 핵심 인물들의 해직 교수에 대한 나쁜 인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그가 어느 정도 깨달은 것 같았는데 이날의 3인과의 만남에서 해직 교수의 괴수로 여기고 있던 안 선생의 말을 통해서 그의 그런 나쁜 인상은 거의 불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 선생이 누구보다도 대학과 학생들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복직 뒤에도 안 선생을 자주 만났다. 그런데 나는 선생이 영면했을 때 마침 외국에 나가 있었던 관계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인지 내가 안 선생을 만날 때 이따금씩 우스개 소리로 주고받던 대화가 생각난다. “하나님한테 기도를 통해서 부탁을 하면 죽지 않을 것 같은데 왜 기독교인들이 죽지요?”라는 나의 물음에 안 선생은 언제나 피시시 웃으면서 “그 양반은 너무 바쁘셔서 통화가 안 되요. 통화만 된다면야 …”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대답인가. 설익은 신학자 같으면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들었겠지만 안 선생은 대가답게 알기 쉬운 말로 여유있게 받아넘긴 셈이다. 이것은 두고두고 나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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