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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42

안병무 선생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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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양모

(서강대학교 교수)


옷깃만 스쳐도 삼 세의 인연이라고 한다. 불가의 속담이다. 내가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1922. 6.23-1996. 10. 19)과 종교신학자 변선환 목사(1928. 9. 3-1995. 8. 8)를 만난 것은 가장 뜻 깊은 인연이다. 이제 두 분은 얼굴을 맞대고 “없이 계시는 임”을 뵈러 저승을 훌쩍 떠나고, 나는 어렴풋이 임을 느끼면서 이승을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전 13:12).
안병무 선생과의 첫 만남은 1971년 5월 광주 가톨릭대학 성서 심포지움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은 김정준, 김용옥 목사님과 함께 심포지움에 오셔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역사와 신앙,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말씀이었다. 나는 선생의 강연 내용보다도 그 진솔하고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었다. 이 때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나는 선생이 1973년 여름에 창간한 『신학사상』에 초창기부터 이제까지 편집 기획위원으로 미력이나마 동참하고 있다.
1979년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와 한국신학연구소는 공동으로 『하나인 믿음·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를 분도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책의 번역 대본 Neues Glaubensbuch는 독어계 가톨릭, 개신교 신학자 36인이 종교혁명이 일어난 지 450여 년만인 1973년에 처음으로 펴낸 공동교리서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은 같고, 양 교파 간의 차이점들은 상이한 기질과 전통에 기인한다는 깨달음에서 공동교리서가 1973년 종교혁명의 발상지 독일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짜임새를 보면 앞부분에선 공통되는 교리들을, 뒷부분에선 상이한 교리들을 다루었다. 독어계 양 교단이 함께 펴낸 공동교리서인지라, 우리말 역본도 양 교단에서 함께 펴내는 게 도리라 여겨, 1978년 늦가을 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내가 명동 주교관에서 안 선생을 뵙고 협조를 부탁했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쾌히 승낙하셨다. 전형적인 가톨릭 용어가 나오면 괄호 속에 개신교 용어를 병기하고, 전형적인 개신교 용어가 나오면 괄호 속에 가톨릭 용어를 넣기로 합의했다. 이 책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역작이다.
1978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되어 변사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는 명동대성당에서 행한 강론에서, 치안본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왜곡 은폐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로부터 “1978년 민주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당시 한국신학연구소는 안암동 로타리에 있었는데, 안 선생이 대학생들의 데모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정 신부님, 예수 부활 사건 보세요” 하시는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을 예수 사건과 동일시하는 말씀이셨다. 안 선생은 이한열 사건도 예수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셨다.
박종철 사건 이후 언젠가 서초 성당에서 안 선생과 내가 연이어 특강을 하게 되었다. 안 선생이 예수 이야기만 하고 교회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시기에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단호한 표정을 지으시며 “저는 교회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했습니다. 교회에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날 선생의 강연 내용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단지 저 충격적인 말씀 한 마디만 생생히 떠오른다. 예수 전승 가운데 긴 설교는 전해오지 않고 주로 단구(短句, logion)가 전승·채록된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안 선생의 많은 논문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인 논문은 “예수 사건의 전승모체”(『신학사상』 47호 1984년 겨울)일 것이다. 그 논지는 이렇다. 예수 사건을 목격한 민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중은 유언비어 형태로 예수 사건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민중이 조심 조심 몰래 전한 예수 사건 전승을 마르코가 자기 복음서에 채록했다. 그러나 제도 교회는 교권 확립을 위해서 예수 사건 전승을 전하기 보다는 케리그마를 전하는 데 신경을 썼다. 선생의 지론을 압축하면 이런데, 선생은 유신시절의 유비통신에서 이런 발상을 얻은 것 같다. 내 생각으론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집중적으로 전수한 역사적 배경은 아무래도 성만찬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토요일 밤마다 모여서 성만찬을 거행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만 거론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과 행적도 서로 전해 주고 전해 받았다고 여겨진다.
안 선생의 많은 저술 가운데서 자신의 예수관을 가장 포괄적으로 집약한 것은 『갈릴래아의 예수─예수의 민중운동』(한국신학연구소, 1990)일 것이다. 예수 수난사 단락 다음에 당연히 예수 부활 사화 단락이 나을 법한데, 뜻밖에도 “민중은 일어서다”라는 표어가 나온다. 선생은 예수 사건과 민중 사건을 동일시했듯이 예수 부활과 민중 부활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선생은 민중의 용기를 보고 예수 부활 사건이 재현된다고 확신했다. 예수 부활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연속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반 기독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선생의 해석학적 통찰로써 도달한 부활관일 것이다.
선생은 우리더러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라고 촉구한다. 나는 “예수 사건의 전승모체”에 나오는 기발한 성찰에 놀라기도 했다. 한 세기가 지나서 지각있는 기독자들은 선각자의 깊은 뜻을 헤아릴 것이다.
이승에서 선생과 맺은 인연은 아름답고 보람찬 선연이었다. 곧 이승의 삶이 다 하면 저승에 가서 하느님 아빠께 큰 절을 올린 다음 예수, 그리고 작은 예수 안병무를 만나 신나게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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