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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50

예수 찾아, 예수 따라 산 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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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성재

(아우내재단 이사장)


“감옥에 들어간 첫 날 저녁, 몹시 춥고 배도 고팠다. 내가 감옥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 이전에 내 몸이 먼저 감옥살이에 대해 반응한 것이다. 그런데 한 죄수가 간수 몰래 내 감방 앞으로 다가와서 ‘이것 잡수세요’ 했다. 보니 빵이었다. 순간 주님이 죄수를 통해 나에게 성찬을 베푸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하며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 빵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죄수는 강도범이라고 했다.”
이것은 안병무 선생님이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1977년 성탄절에 석방되어 한 설교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온 몸이 떨리는 감격을 느꼈다.
안병무 선생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성찬식 때마다 눈물로 성찬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그만큼 일생 예수를 찾고 예수를 따라 살았다. 그런데 그분이 찾고 따른 예수는 종교적 신앙으로 착색되거나 미화된 예수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분은 성서와 현실에서 민중 예수와 예수 민중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분은 ‘예수님이 죄수를 통해 나에게 성찬을 베푸셨다’고 말했지만 보다 깊은 그분의 고백은 ‘예수는 죄수로 와서 나에게 성찬을 베풀었다’였을 것이다.


독립군의 무릎에서 자란 안병무


안 선생님은 1922년 6월 23일, 평남 안주군 신안주면 운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첫돐도 되나마나 해서 안 선생님의 부모는 어린 안병무를 데리고 간도 들미동으로 이주하였다. 안 선생님은 이곳을 그의 고향으로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분은 이미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감당하기 어려운 몸이었지만 소천한 해인 1996년 8월 동생들과 함께 61년만에 그 고향을 찾았다.
그런데 안 선생님은 14살에 자부심을 갖고 자라던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안 선생님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 학생들의 노동력을 팔아서 돈은 자기 주머니에 넣고, 큰 도시에서 반입해 들여온 문구들을 원가의 두 배 이상을 받아 이익을 착복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을 시기해서 파직시킨 것에 항의하다가 그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안 선생님은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학생 대표로 뽑혀 교장 선생에게 이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다가 퇴학당한 것이다. 안 선생님은 그 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동리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천고만년을 여기서 살다가, 저기 저 어른들보다는 낫게 살다가, 자식을 많이 두고 이 땅에 묻히리라는 생각도 안한 바는 아니다. 더군다나 밤이면 나타나는 독립군이 이 동리의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낮에는 만주군(일본군)의 끄나풀에 의한 세상이 되고 해가 뉘엿뉘엿 진 다음부터는 독립군의 무대가 되었다. 그들이 입은 의복은 남루했고 총을 갖춘 사람도 몇 명 없는 부대였으며 그들의 행보는 아이들의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어수룩했지만 그래도 저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싸운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다시없이 높이 쳐다보이는 존재들이었다. … 저들은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전투를 가르쳐 주기보다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안 선생님은 학교에서 쫓겨나서 그냥 주저앉을 수가 없어 독립군의 무릎에서 자라던 고향을 마음에 깊이 담고 80리 떨어진 용정으로 ‘유학’을 갔다. 소년 안병무가 떠나던 날 아이들은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용정에서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강원용 등을 만나게 되었고 이곳에서 소년기의 새로운 꿈을 키웠다.


예수를 믿으면 옳게 산다


안 선생님이 예수를 믿은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예수를 믿으면 옳게 산다’는 그 한 마디 말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이 단순하고 진실한 믿음 그대로 예수와 함께 평생을 옳게 살았다. 그분은 소년 시절부터 어린 나이답지 않게 교회에서 자주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흥회의 강사로도 여러 교회에서 초청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을 잘 못 쓰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못한다고 하는데, 안 선생님은 타고난 웅변가요 문필가였다. 그분의 말에는 진실과 생명력이 담겨 있기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또한 그분은 글을 쓸 때 불필요한 수식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말을 적절히 사용하기에 그분의 글은 어느 문필가 못지 않게 수려하면서도 힘차다.
안 선생님은 1940년 12월 용정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 일본으로 가서 대정대학 문학부 3년을 수료하고 1943년 귀국했다. 이어 194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50년에 졸업하였다. 이러한 학문의 여정 속에서 그분은 실존철학, 특히 키에르케고르에 심취하게 되었다. 또한 동양철학에도 몰두하여 특히 노자, 장자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언제나 예수를 찾고 따랐다. 실존철학도, 키에르케고르도, 동양사상도 예수를 찾는 여정의 하나였다. 1946년에 일신회(一信會)를 만들어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 따라 사적 소유를 포기한 신앙공동체 운동으로 교회와 민족을 일깨우려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안 선생님은 민족의 현실과 앞날을 크게 염려하며 『야성』이란 잡지를 발행하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며 동시에 예수 정신으로 한국 사회를 철저히 변혁하기 위해 신앙공동체 운동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 명동에 있는 향린교회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안 선생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교회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사적 소유를 포기한 신앙과 생활을 철저히 같이 하는 생활신앙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것인데 그만 변형된 형태의 평신도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를 그분은 ‘결혼’ 때문이라 했다. “아! 글쎄, 모여서 열심히 논의하여 결의하고도 하루 밤 자고 나면 달라지는 거야. 밤새 마누라들이 그 마음들을 바꾸어 놓은 거지.” 그래서 안 선생님은 45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안 했다. 예수를 따라 철저히 살려면 ‘자기 처와 자식도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의 말처럼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효자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손자를 보고야 가시겠다고 한 그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어머니의 임종을 얼마 앞두고 박영숙 선생과 결혼하여 아들 재권을 낳았다.
1956년 안 선생님은 예수를 더 알기 위해 독일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분은 하이델베르크 신학부에서 실존주의 신학의 거장 루돌프 불트만을 만나 ‘역사적 예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앙으로 고백되어진 그리스도가 아닌 성서가 증언하는 역사의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그분이 깨달은 역사의 예수 실체는 바로 사랑이었다. 그분의 박사학위 논문이 “예수의 사랑과 공자의 인에 대한 연구”인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따라서 그분의 신학은 강한 실존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실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도리어 역사 현실에서 어떻게 결단하여 현존하느냐 하는 것―관념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에 의해―이 그분의 신학적 관심사였다. 그래서 독일 유학 중에도 독일과 한국을 비교하여 민족을 사랑하는 지성의 목소리를 사상계에 담아 내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1969년부터 『현존』이란 잡지를 발행하게 된 것도 그분의 이런 삶의 신앙과 철학 때문이다.


세계 신학을 전환시킨 민중신학자


안 선생님은 1965년 독일에서 귀국하여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서 교수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생 스승으로 모신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사상가로서 시대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였다. 1970년 5월 한국신학대학의 교수가 된 후 1969년부터 계획한 한국신학연구소 설립에 박차를 가해, 1973년 한국 최초로 한국 신학 정립과 신학적 사회 비판 그리고 민족 통일의 과제를 연구, 실천하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1996년 1월 아우내재단으로 발전하여 현재 한국신학연구소, 미래문화연구원,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영성과 평화의 집 등을 두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신학 전문서와 사회, 문명 비판 서적 등을 약 300여 종 발행하고 있고, 『신학사상』(계간지), 『살림』(월간지)을 발간하고 있다.
안 선생님이 민중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0년 11월 노동자 전태일 분신 사건에 의해서였다. 그분은 전태일 사건에서 오늘의 예수 사건을 보고 증언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젖어 있는 나를 민중이 구원했다.”
이후 안 선생님은 한국신학대학 학생들이 실습하고 있던 빈민 지역 선교 현장과 수도권 특수 지역 선교 현장에 자주 다니면서 민중의 실체와 처절한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고 그것을 성서의 빛에서 증언하고 동시에 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읽는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방법이 아니라 바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실천운동이기도 했다. 그 결과 그분은 1975년 6월 문동환 교수와 함께 한국신학대학에서 해직당했다. 안 선생님은 해직된 직후 당시 한국신학대학과 다른 대학에서 해직당한 문동환, 서남동(연대), 이우정(서울여대), 이문영(고대) 등과 함께 ‘갈릴리교회’를 시작하였다. 민중 예수와 예수의 민중이 하나된 삶의 현장 갈릴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그리고 ‘성문 밖의 그리스도’의 발견이 이 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민중 체험 그리고 민중과 함께 한 수난을 통해 그분의 민중신학이 형성되었다.
1976년 3월 그분은 해직된 교수들과 제적된 학생들을 위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설립한 선교교육원의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3월 1일 당시 같은 해직교수가 되었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이우정 교수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함으로써 1년 반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3·1민주구국선언’은 문익환 목사님이 주동했는데 나도 그분을 도와 이 일에 참여한 죄목으로 서대문서에 3일 동안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풀려났다. 당시 내 나이가 이분들과 너무 차이가 나 풀려나게 된 것이다.
안 선생님은 감옥생활에서 죄와 악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 신학적으로 전제된 원죄나 개인의 죄와 악을 넘어선 사회 불의와 구조 악에 의한 죄와 악의 실체를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감옥 안의 죄인들이 도리어 감옥 밖의 위장된 인간들보다 더 순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워했다. 특히 그분은 평생 학문적으로 찾았던 예수의 실체를 이 감옥의 죄인 속에서 발견했다. 성서가 말하는 죄인의 친구 예수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연구되어진 그분의 민중신학은 세계 신학계에 큰 충격과 함께 신학하는 방법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이후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독일에서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박사학위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3/4의 세계에서 자주적으로 신학하려는 학자들은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분의 글들이 영어로 번역된 것이 많지 않아 외국 연구자들에게 그분의 민중신학이 아직 충분히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잠깐 한신대에 복직하였다가 곧 다시 해직 당했고, 『현존』 지도 폐간당했다. 이 해에 그분은 한국에 최초로 개신교 수도원공동체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하였다. 이 자매회를 통해 제도교회를 넘어 이 사회 속에 예수 사랑을 실천하는 독신 수도자들을 훈련시켜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가 되게 했다. 이것은 그분의 민중 사랑과 함께 사적 소유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신앙과 신학을 넘어서서 공(公)의 신앙과 신학을 실천하는 또 하나의 결정체였다. 또한 같은 해에 그분은 향후 한국 개신교 선교 제2세기의 과제는 민족통일에 있다는 선교 비전을 제시하여 당시 금기되었던 통일운동에 불을 지폈다.
1984년 7월에 안 선생님은 종합대학교로 발전된 한신대학교에 다시 복직해서 대학원장직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평화연구소를 설립했다. 1987년 8월 정년퇴임한 후 한국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중신학 발전에 더욱 집중하는 한편 1988년 12월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의해 폐간되었던 『현존』을 다시 살려 『살림』 지로 창간했다. “죽임을 넘어”라는 부제가 붙은 『살림』 지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관에서 우리 사회와 세계를 재조명하고 미래 세계를 펼쳐 가는 희망을 담고 있다.
안 선생님은 특히 제자 사랑이 남달라서 그 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또한 그분은 신학연구 서적만이 아니라 사상과 수필을 담은 주옥같은 책을 20여 권이나 펴냈다. 1996년 봄에 출간된 『선천댁』은 한국의 역사가 민중, 특히 여성의 지혜와 생명력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일자무식인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1996년 10월 19일, 그분은 자신이 설립한 여러 교회들과 기관들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평소에 말씀하시던 ‘功成而不居’, 빈 손, 빈 마음으로 평생 찾고 따르던 예수의 품으로 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과 사상은 오늘도 우리 안에 풍요롭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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