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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9

안병무 님에 대한 나의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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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성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영동세브란스병원 원목실장)


心園 안병무 님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필자만이 각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를 아는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그분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일로 해서 조금은 차별된 필자만의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필자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단편적이나마 여기에 적어 보려고 한다.
그를 가까이에서 뵙게 된 것은 향린교회에서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였다. 그 두 번의 만남의 장(場)은 다르기도 했거니와 필자의 삶에 또 다른 차원의 영향도 각각 덧붙여 주었다.
1966년도, 군복무를 끝내고 기장 총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였다. 필자는 수년 동안 군인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해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경험은 필자 나름대로 목회에 대한 일가견을 가진 풋내기 목회 자화상을 가지고서 군목에서 예편하게 되었다. 곧바로 총회기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관계로 기성교회에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교회 저 교회 순방하기 1년 여,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처지에 있었던 친구 목사가 출석한다는 향린교회를 찾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안병무 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마침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하신다는 그분의 설교를 처음 대하게 되었다. 그를 처음 대하는 순간, 필자가 찾고 다녔던 분이 바로 이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굳히고 교회에 등록을 하였다. 매주일 들려지는 말씀들은 주옥과 같아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경청했다. 당시에는 매주일 발간되는 예배 순서지에 절반 이상의 지면을 할애해서 전주일 설교 말씀이 간추려 실렸다. 그 주보를 열심히 모아서 읽었다. 약 3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 일부는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분의 설교 말씀은 성서말씀의 핵심을 깊은 신학의 빛 아래서 우리 삶의 일상 현장에 친절하게 조명해 주는 생동감있는 말씀들이었다. 그래서 신학과 성서 그리고 삶의 일체성를 느끼게 하는 강단이었다. 사실 필자는(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신학교에서 배워왔던 신학 이론들은 말하기 좋아하는 이론가들의 말장난 정도로 생각했었다. 부모님의 엄격하신 율법적 신앙관을 어려서부터 전수받은 필자는, 성서의 난해한 부분이든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소화해 보려는 노력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가르침에 젖어 있었다. 부흥강사들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성서 해석으로 인하여 필자는 삶과 성서와의 관계에 괴리를 느끼며 뭔가 개운치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학교에 들어 와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정리를 할 수 있는 과감한 질문을 던질 용기마저 갖지 못했던 세월을 보냈다. 신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조사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있었다. 다른 급우들은 모두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데 필자는 목회현장이 두려웠다. 그 이유를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학 4년 동안 공부에 불충했기 때문이다’라고 판단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지만 결국 군입대 관계로 중단하고야 말았다. 신학 수업이 미완인 상태에서 군목이 되었고 서툰 목회를 수년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신앙 분위기였던 필자에게 안병무 님의 설교 말씀은 충격과 아울러 명쾌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게 해 주었다. 즉 필자의 인격체 안에서 서로 분리된 이 삼자(三者)들이 하나의 끈으로 묶여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분이 설교를 통해서 많은 신앙적 테마들을 던져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필자의 마음에 인상 깊게 각인된 주제는 ‘예수님의 자유하신 삶’과 ‘사건의 신학’ 부분이었다. ‘예수님의 자유하신 삶’부분은 질식할 것 같았던 필자의 신앙에 숨통을 열어 준 ‘복음’이었다. 예수님은 어떤 율법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자유하셨다는 선언 말씀이다. 그 자유의 기준은 인간 구원에 두었고 그 기준에 저해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대처와 가차없는 저항을 하셨다는 대목이다. 예수 당시의 저해요인으로는 기존의 율법과 전통이라고 보았으며 고착화된 성전 종교를 지적하고 있었다.
요즈음이라 이런 주제는 보편화되어 있어서 새로울 것도, 감동일 것도 없지만 60년대에는 참신한 신앙 풀이였다. 그분의 단상 설교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열정적으로 톤을 높이면서 하신 설교 말씀들은 지금도 귓전에 들려지는 듯하는데 ‘이미 … 아직’(already … not yet,빌 3:12-14), ‘이 성전을 헐라’(요한 2:19) 등등.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다가 숨이 가빠 오면 잠시 진정시켜 가며 다음 말씀을 이어가시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낡은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새것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며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회개(metanoia)! 그것은 죽음에서 삶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걱정에서 기쁨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파괴에서 건설에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대목에 큰 감동을 받았다.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닮으며 사시려 했던 그는 이와같은 점들에 매료되어 자신의 생의 좌우명을 ‘功成而不居’(공을 세우되 머무르지 않는다)로 삼고 있나 보다.
그렇게 항상 새것을 향해 자유로우셨던 그분의 삶은 그의 외모에서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유행이나 규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셔서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입고 다니셨던 단벌 골덴 양복, 제대로 된 흰 Y셔츠도 아닌 셔츠 칼라에, 나일론실로 뜬 듯한 좁다란 넥타이가 그분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분에게 그런 것들을 대체할 물건이 없어서도 아니었고 게을러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어떤 틀에 매이지 아니하려는 자유하는 그분의 삶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필자의 인상에 깊이 박힌 그분의 설교 주제는 ‘사건의 신학’이었다. 그가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때, 1976년도 명동사건에 연루되어 반 년 여 가량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고 난 직후 향린 강단에서의 첫 번 설교 주제가 바로 ‘사건의 신학’이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 안에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하느님은 바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진행하시더라’는 것이다. 예수에게서도 ‘십자가’라고 하는 한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 창조를 이룬것과 같다. 그것만이 아니다. ‘성서’전체가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성서 안에 기록된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사건’들이며 결국 인간 구원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사건들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투옥 생활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고 계셨다는 요점의 말씀이었던 것 같았다.
그의 이런 설교는 우리 내외에게 깊은 인상과 감명을 주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고 신앙의 새로운 시각을 뜨게 해 주었다. 결혼하여 임신 7개월 된 딸을 90년도에 하느님께 먼저 보내드리고 걷잡을 수 없는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우리 내외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것은 안병무 님의 ‘사건의 신학’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찢어질 것 같았던 우리 내외의 마음에 제3의 시각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 딸의 사건’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계획된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이다. ‘딸 잃은 우리의 아픔도 하느님께서 진행하고 계시는 일련의 사건이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정리하고 나니까 그 아픔과 괴로움과 원망들이 모두 수용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남긴 신앙적인 큰 가르침이었다.
그분과의 두 번째 만남의 장(場)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였다.
필자는 예편후 1966년부터 기장 총회 사무처와 직영 신우관(서울 서대문 소재)이라고 하는 청소년 학생 선교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는 급격한 사회변동과 아울러 군사정권이 백성들의 목을 조이는 강도를 점점 더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 교단(基長)은 이런 시대에 우리 교회의 사명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세미나를 자주 갖고 있었다. 여러 번의 세미나과정에서 교단이 나아 가야 할 신학적 방향은 ‘하느님의 선교’라는데에 의견을 모았다. 교단 정책 협의회에는 교단내 많은 신학자들과 교단 중진들이 참여하였는데 안병무 님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그 무렵에 기장(基長)의 저 유명한 5대문서도 작성되었고 대사회 선언(對社會 宣言)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시대 인식과 아울러 시대적인 격변기에 대처할 수 있는 총회 기구의 구조 조정의 필요성이 교단 차원의 이런 세미나들에서 무르익어 갔다. 결국 총회종합발전연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거기에서 바로 선교교육원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연구와 교육 기관을 탄생시켰다. 이 기관의 성격은 교역자계속교육과 평신도 지도자교육 그리고 교단의 선교 사명에 대한 연구등이 주임무였다. 우리 교역자들은 신학교 4년 정도 배운 것으로 한 평생을 목회한다고 할 때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응할 교회의 사명과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계속교육과 아울러 앞으로는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그 지도자를 훈련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침을 가지고 총회의 기구와 재산을 개편하기로 하고 일차적으로 신우관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그 기본재산(서대문 소재 건물과 대지)을 선교교육원 출범에 전적으로 투입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정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그 실무를 안병무 님과 김성재 님 그리고 필자가 맡게 되었다. 새 기관의 밑그림을 한창 그리고 있을 무렵 시국적인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던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각 대학교로부터 퇴출당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적인 불행에 대해 우리 교단 차원에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안병무 님의 적극적인 제안을 위원회에서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확정된 기존한 프로그램에다가 추가로 ‘대학으로부터 쫓겨난 제적학생들도 함께 불러모아 신학 공부를 시키고, 교수진은 역시 같은 입장에 있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하되 주제별로는 전문분야의 교수들을 초청하여 가르친다’는 새로운 과제가 덧붙여졌다. 실제적으로는 후자쪽 프로그램이 국내외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기관의 실무진으로는 원장에 안병무 님, 교무위원에 김성재 님, 그리고 부원장에 필자등으로 임명되었고, 1976년 4월의 개원식 준비에 한창 바쁘게 뛰고 있을 동년 3월 어느날이었다.
개원 약 1개월을 앞두고 원장이신 안병무 님께서 3·1명동성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분이 참여한 명동사건 자체도 역시 우리 교단의 신학적인 고백에서 결행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일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원장의 대행 체제로 개원 준비도 마저하였고, 또 그분이 석방될 때까지 교무위원들과 실무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차질없이 계획된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특히 대행 체제에서의 교육 프로그램은 교무위원장인 박근원 님과 김성재 님의 공로로 오늘의 선교교육원 프로그램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선교교육원의 설립과정에서 발견한 그분에 대한 존경과 인지도의 비중은 과연 세계적이었다는 인상이다. 당시 우리 나라 경제는 매우 열악했던 때였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재정적인 뒷바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의 호소와 설득으로 독일교회와 세계기독교교회협회에서 전폭적인 선교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그 기관을 설립할 수 있었고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한 신학자만이 아니였나보다. 이 기관의 원장직을 서남동 님에게 인계하고서는 그는 이어서 <한국신학연구소>라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셨다. 이와 함께 <영성과 평화의 집>과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세워서, <아우내재단>이라는 큰 터를 닦았다. 그가 뿌려 놓은 씨가 이곳 저곳에서 자라서 큰 나무들이 되어 가고 있다. 그는 일꾼이었다. 그는 사업가적인 요소도 갖춘 분이셨던 것 같았다. 그는 민간 외교관도 되셔서 한국의 인권 상황과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한국교회의 활동들을 독일을 비롯한 세계교회에 알리는 이 시대의 정의의 사도였다.
다음으로 필자가 그분과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그분에게서 배운 인생의 큰 교훈은 직장 상사로서의 인품이었다. 그분은 직원들의 능력과 성실을 전폭적으로 믿고 맡겼다. 굵은 방향 제시만해 주고 그밖의 것은 모두 맡겼다. 그리고 설령 당신 뜻과 다른 결과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 해도 당신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해결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선교교육원 프로그램 중에서는 평신도 지도자훈련의 일환으로서 기장 청년연합회를 지도하고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1976년 8월에 전국 기장청년대회를 목포 해양대학에서 개최되었던 때의 일이다. 원장 안병무 님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생하고 계시는 동안에 목포대회는 진행되었다. 따라서 대회를 갖는다는 정도 이외에 세부적인 사항을 알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대회 프로그램 중에 ‘애찬식’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때 ‘포도주와 빵’ 대신에 ‘막걸리와 떡’으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 9월 기장총회에 안건으로 상정이 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온 총대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총회 석상에서는 설전이 벌어 졌는데 벌떼처럼 선교교육원 측을 맹공을 하고 있었다.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던 상황에서 원장을 대행하고 있는 필자가 뭔가 한마디 말을 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회의석상의 분위기는 필자가 단상에 올라 서기만 하면 오물 세례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단상에 올라가려는 찰라 언제 오셨는지 기관장석이 있는 뒤쪽 문으로부터 회장을 향해 발언권을 달라며 소리를 지르며 단상에 올라가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바로 안병무 님이었다. 기억으로는 총회기간 혹은 직전에 석방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생각하기를 저분이 ‘막걸리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으셨을텐데 단상에 올라서서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그러면서 그분 말씀 다음에 필자가 맞아야 할 매를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그분은 석방 인사와 아울러 총회적인 지원과 격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정중하게 먼저 했다. 이어서 선교교육원 원장으로서의 ‘막걸리 사건’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험악한 총회 분위기 속에서 저분이 혹시나 충격을 받게 될 사건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매우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분은 놀랍게도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과의 분위기가 아니라 당당하게 말씀하시기를 “목포 청년대회는 처음 계획 때부터 일일이 상세히 보고 받았고 ‘막걸리 애찬식’ 관련 프로그램도 잘 알고 있었으며 원장 승인하에 진행된 프로그램이었다”고 하였다. 그분의 당당하고 강력한 그 발언은 오히려 총회 참석자들의 마음을 압도해버린 것이었다. 분위기는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돌변했다. 더 이상 문제거리가 되지 않고 지나가 버린 일이 있었다. 역시 그분에 대한 총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기관의 장(長)으로서의 인품을 보고 배웠다.
心園 안병무 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나 인생을 살아 가는 삶의 지혜에 있어서 큰 스승이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필자 보다 더 가까이에서 그분에 대한 삶을 지켜 보고, 훌륭했던 그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분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필자만의 단편적인 인상을 기술한 것이기에 충분한 묘사가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그분의 삶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의 여러 단상들이 하나로 어울릴 때 더 정확한 안병무 님의 전체 모습이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감히 이 글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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