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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1

肉과 靈의 調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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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인탁

(연세대학교 교수)


나는 인간 안병무에게서 육(肉)과 영(靈)의 조화를 본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서 인간인데,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그것은 죽음인데,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적인 하나인데,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서로 대립적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은 분명히 육과 영의 균형과 조화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틈에 조화를 잃었다. 그리고 이 둘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싸우는 엠비밸런스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바울의 탄식은 언제나 나의 탄식이 되어 되돌아 온다. 안병무에게도 바울의 탄식이 그의 탄식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는 인간이 쌓아올릴 수 있는 육과 영의 조화의 높은 경지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를 추억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잘 믿고 알면, 동시에 괜찮은 동물이면서도 아름다운 천사일 수 있음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솨마임과 아레츠


성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창 1:1). 루터역 독일어 성서는 “Am Anfang schuf Gott Himmel und Erde”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천지 만물을, 우주를,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뜻으로 읽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읽으면 그런 일반적인 의미를 초월하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의 뜻은 구체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이다. 하늘은 히브리어로 솨마임(schamaim)이다. 솨마임에는 여러 뜻이 있다. 솨마임은 샴 마임(scham maim)을, 즉, ‘저기 물이 있다’를 의미한다. 하늘은 푸르다. 푸름은 물의 색깔이다. 그리고 ‘저기’는 다의미적 표현이다. 무한성과 영원성이 다의미적 ‘저기’에 담겨있다. 인간의 이해가 미치는 곳, ‘저기’에 인간이 안주하려고 할 때에 다시금 새로운 미지의 ‘저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리하여 미련한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이 한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솨마임은 또한 불(esch)과 물(maim)의 합성어이다. 불과 물은 서로 상극이어서 땅 위에서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 불은 물을, 물은 불을 없애버린다. 인간은 함께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결코 상존불가능한 불과 물을 알 뿐이다. 그러나 솨마임에서 이 둘은 동등한 가치로 함께 연관되어 있으며, 상대를 말살하지 않는 관계로 있다. 땅 위에선 불가능한 것이 하늘에서는 가능하다. 이렇게 솨마임은 모순을 담고 있는 무제한이요 불가능의 가능이며 영원이다. 솨마임은 존재하며 말의 참 뜻에 있어서 파악불가능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흰 구름이 뭉실거리는 푸른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다. 솨마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무제한하며 영원하고 알 수 없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솨마임은 추상의 원리요 예지의 대상이며 지혜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솨마임과 아레츠(aretz)를 창조하였다. 아레츠는 땅이요 육지이며 지역이요 국가이다. 아다마(adama)는 흙이다. 땅과 흙은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유한하고 파악가능하다. 조형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아레츠를 파악할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땅으로 여러 가지 상이한 모양을 만들고, 변형할 수 있으며, 경작할 수 있다. 파괴할 수 있고, 황폐화된 땅을 옥토로 개간할 수 있다. 우리는 땅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며, 구성성분을 다양하게 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다. 아레츠는 구체의 원리요 구성과 재구성의 대상이며 과학의 세계이다.
우리의 몸은 아다마이다. 몸은 그래서 유한하고 썩어서 없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한하고 파악가능하며 구체적인 아다마로 빚으시고 무한하고 파악불가능하며 추상적인 솨마임으로 생명을 주셨다. 이렇게 인간은 솨마임과 아레츠를 함께 갖고 있다. 인간은 솨마임과 아레츠의 연관이다. 인간에겐 하늘과 땅,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영원과 유한, 지혜와 지식이 함께 담겨 있다. 인간이 아레츠의 원리에 쏠릴 때에 인간은 이탈하고 타락하며 변질된다. 탐욕스럽고 더러운 육체의 덩어리만 남아서 인간과 생물과 자연을 죽이고 죽인다. 그러나 솨마임의 원리에 따라서 현존하며 아레츠의 원리를 이 안에 담을 때에 인간은 빛나는 영혼이 되어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더욱 더 새로워지며 만물을 살리고 살린다.
아레츠로 빚어진 인간 안에 솨마임이 담겨있지 않거나 적게 담겨있을 때에, 그러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을 자기 중심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안병무에게서 오늘날 참으로 보기 드문 아레츠와 솨마임의 조화를 본다. 그는 격동의 한 시대를 살면서 온몸으로 솨마임이 담겨있는 아레츠의 멋을 보여 주었다.


기술과 형제애


내가 70년대에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엔 에펠탑과 개선문이 파리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펠탑은 불란서 혁명 백주년인 1889년에 세계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리는 것을 계기로 삼아서 곧 시작될 20세기를 환영하고 전망하는 도전적인 기념비로 세워졌다. 높이가 318m나 되는 탑을 순전히 강철 구조물로 건설한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공학적 수준에 비추어보아서 엄청난 모험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이 뛰어난 파리의 시민들이 볼 때에 그렇게 높은 강철탑이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추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파리가 온통 반대로 들끓었다. 그러나 에펠탑은 앞으로 곧 올 20세기는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이러한 새로운 세기를 적극적으로 전망하는 의미를 상징하는 탑으로 우뚝 섰으며, 파리의 명물이 되었다. 그리고 20세기는 에펠탑처럼 과학과 기술로 세계를 가득 채웠다.
나는 1997년 여름에 파리를 다시 방문하였다. 한 20여년 동안에 파리도 상당히 변하였다. 포스트모던한 건축 예술의 기념비가 된 풍피두 센터, 기차역을 개조한 아름답고 장엄한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나를 압도한 그랑 아르슈(grande arche)가 파리의 새로운 얼굴로 있었다. 그랑 아르슈는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대문’(大門) 또는 ‘큰 구조물’이다. 그랑 아르슈는 상 제리제에서 개선문을 지나서 8km 정도를 더 곧게 뻗어있는 대로(大路)의 끝에 세느 강을 건너면서 펼쳐진 새로운 고층 건물 지역인 라 데팡스(La devfense)의 중심에 110m의 높이로 우뚝 솟아있다. 거대한 사각형의 날씬한 초현대적 구조물이다. 사방이 투명한 엘리베이터 4대가 중앙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위에 오르니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높은 곳에 거대한 전시실, 상영실, 옥상 등이 있다. 그랑 아르슈는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인 1989년에 불란서 혁명의 세가지 이념인 자유(libertev), 평등(evgalitev), 형제애(fraternitev) 중에서 형제애의 이념을 형상화하여 21세기를 환영하고 전망하는 기념비로 세웠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파리의 시민들은 21세기를 앞두고 21세기가 과학과 기술의 척도없는 발전을 통하여 황폐하여진 세계에 다시금 사랑의 가치를 심는 형제애의 세기가 될 것을 소망하는 상징으로 그랑 아르슈를 세웠다.
오늘날 인간이 성취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너무나 빛난다. 그러나 이 빛의 밝음 아래서 인간은 사람다움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다. 그래서 감성이 매마른 이성의 파괴력에 경악한 인간은 머리에 담은 지식이 아니라, 가슴에 담긴 지식만이 가치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리의 시민들은 21세기에 추구하지 않으면 안될 최고의 가치를 형제애로 보았다. 그들의 미적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과 파리의 그랑 아르슈가 주는 의미를 함께 묶어보면,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20세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인간 안병무를 회상하며 소망스런 인간상에 대한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리게 된다. 새로운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영원과 유한 사이에서, 추상과 구체 사이에서, 이 둘을 함께 날줄과 씨줄로 얽어가면서, 얼마든지 다양하고 상이하게, 그러나 동시에 거기서 말씀의 일원성이 빛나도록 추구하는 인간이다. 새로운 인간은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과학과 기술보다 인간을, 이성보다 감성을, 지식보다 지혜를 우선하는 삶을 산다. 기능보다 인성을 우선하고, 표준 인력의 양성보다 개성있는 시민의 성장을 우선한다. 국가의 이익보다 인간의 권리를 우선하고, 개인의 관심이 공동의 선으로 표현되도록 언행을 도야한다.


바위와 거울


히브리적인 교육은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과 이 신앙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듣는 것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적 전통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들음으로써 안다. 앎의 가능 조건을 들음으로부터 찾은 것이 히브리 민족의 위대성이다.
인간이 들을 때에 듣는 인간은 말을 걸어오는 하나님 앞에 선 대상이 된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의 주이시며 인간에게 진리를 들려주는 주체이시다. 인간은 다만 신의 음성을 듣고 들은 바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진리를 스스로 창출할 수 없고, 다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만이 진리의, 참된 지식의 근원이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교육의 본질과 형식을 신의 뜻을 귀기울여 듣고, 이 들음 안에 머물고, 그리고 들은 바를 전달하는 일을 생활화하는 데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sapientia)의 훈련(paideia)을 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앙의 민족이 되었으며 가정 중심의 종교적 교육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리스 민족은 보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은 신들의 피조물이긴 하나, 신들과 끊임없이 어깨를 겨루는 존재로 비쳐졌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인간은 사물을 스스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다시 말하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이성이다. 인간은 봄으로써 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볼 줄을 모른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가 본 것이 참이라고 우겨댔다. 그리하여,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최고의 물음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이 사물을 그림자만, 또는 겉만 보지 않고 그 본질을, 또는 이데아를 꿰뚫어 볼 때에, 그렇게 보는 인간이 사물을 바로 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로 보는 방법을 찾았으며, 이렇게 하여 찾아낸 바로 보는 방법이 인식의 변증법이고, 바로 보는 생활이 철학이다. 이렇게 앎의 가능 조건을 봄으로부터 찾은 것이 또한 그리스 민족의 위대성이다. 변증법의 초기 역사가 논쟁술, 산파술, 대화술 등으로 이해되고 전개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볼 때에, 인간은 보는, 다시 말하면, 진리를 알고 전하는 주체가 되고 우주 만물은, 하나님까지 포함하여, 다만 보여지는 대상이 될뿐이다. 인간이 진리의, 참된 지식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대상과 내용을, 그리고 인식의 참됨과 거짓됨을 판단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민족은 지식(scientia)의 수업(institutio)을 중히 여겼으며, 철학(philosophia)과 이론(theoria)을 탄생시켰다. 철학은 곧 인간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응용하는 모든 지식과 기술의 전체인 과학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 민족은 가정을 중심으로 한 지혜의 종교 교육을, 그리스 민족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의 철학 교육을 낳았다. 전자는 먼저 듣고, 그리곤 들은 바대로 굳게 믿고 그렇게 살기를 훈련하며, 믿음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모르는 바를 깨우치고 터득하였다. 반면에 후자는 먼저 보고, 그리곤 본바에 기초하여 확실하게 알고, 앎 안에서 앎을 통하여 수용 가능한 믿음을 받아들였다.
이를 우리는 바위와 거울로 표현할 수 있다. 듣는 자는 들음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머물러 있으므로 아무리 세파가 심하게 몰아쳐도 바위와 같이 요지부동이며, 영혼은 여전히 안정과 평안을 누린다. 반면에 보는 자는 외부의 사물을, 마치 거울이 빛에 의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사하듯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봄의 능력을 통하여 다시 비쳐줄 수 있을 뿐이다. 거울의 반사면이 찌그러져 있거나 탁하면, 거울은 사물을 패리시키고 희미하게 반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비록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 보는 방법이 철학적 인식의 논리에 따라서 타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거나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사물의 표면을 경험적으로 보거나 사물의 부분을 전체로 잘못 보게 된다. 그리하여 괴리와 왜곡과 독단으로 이어지는 자기 중심적 이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그가 본 것이 확실한 인식(episteme)이요 헛된 생각(doxa)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문제가 철학의 관심이 되었다. 인간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두가지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인식의 바른 방법을 찾아서 방황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고 진리와 지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보는 방법과 이를 통하여 획득한 지식의 절대적인 보편 타당성을 주장하면서 도그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교육은 원래부터 진리를 듣게 하고, 들음 안에 머물게 하며, 들은 바대로 그렇게 살게 하는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은 그 본질에 있어서 들을 수 있는 능력에로의 교육이요 진리를 체화할 수 있는 능력에로의 교육이다. 이러한 들을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바르게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앎으로 믿음에 이르지 않고, 믿음으로 앎에 이른다. 우리의 이성이 우리의 신앙을 섬긴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인간은 하나님까지도 다만 인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고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높이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으며 연구하고 있는 교육과 신학은 그리스적인 전통에 의하여 지배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이론과 실천의 옷을 입게 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과학화의 길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을 좋은 것, 선한 것, 참된 것, 그리고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것의 의미를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리와 지혜에 대한 체득으로 알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사물을 알고, 이 사물의 지식으로 사물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고, 이 인간의 이해로 정치와 경제를 도모하고, 인간을 훈련하고 교육하며,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며, 자녀를 양육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자아 이해와 인류 이해의 한계 안에서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로 삶을 그렇게 살고 있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지식, 인생관, 진리관, 이 셋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교육의 과학화는 이 셋을 우선 동의미적인 것인 양 혼동하게 만들었고,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융합시켰으며, 교육의 이론과 실천에서 신앙과 지혜를 몰아내고, 도덕과 지식을 분리시켰으며, 철학과 생명의 자리에 과학과 구조를 갖다 놓았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다만 교육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신학을 포함하여 모든 과학의 영역에서 두루 확인하게 된다. 인간 안병무는 여기서 하나의 좋은 범례가 된다. 그는 바위와 거울의 조화를 그의 신학과 삶에서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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