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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6

한 제자의 몫 -민중신학 실천의 새 지평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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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허병섭

(농부 / 푸른꿈학교 이사)


1960년대 중반 한국신학대학의 강의실에서 안 박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루돌프 불트만의 『공관복음서 전승사』를 교과서로 하여 우리들에게 강의하고 있었다. 나는 성서연구의 재미를 이 과정에서 만끽하고 있었다. 성서를 세심하게 읽고 문맥을 따지며 다른 복음서와의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표현 양식에 따라 성서의 원 자료와 부속 자료를 밝히는 작업을 직접 해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성서에 관한 학문을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분석적인 사고를 이 과정에서 훈련받은 것이다. 안 박사의 강의는 꼼꼼하고 빈틈이 없었다. 철저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에서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것 저것을 두리뭉실해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깊이 파고 정복한 다음 그것을 극복하고 다른 것을 찾아 다시 파고 정복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한 사상가의 입장에서 다른 사상가의 입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이 다 그러했지만 우리는 교수님의 사생활도 읽을 수 있었다. 가정으로 찾아가서 개인사에 관한 상담을 한다든가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인간적 정감을 나누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럴때도 안 박사는 우리에게 지금 이상의 그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 듯 했다. 단지 지금 무엇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끌어 당기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신학의 한 작은 봉우리에 올라 섰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었고 신학을 공부하는 차원을 넘어 신학을 하는(실천하는) 준비를 위해서 대학원에서는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군목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당시의 향린교회에서 매번 보내준 주보에 실려 있는 안 박사의 설교문을 자주 사용했다. 사상과 사고의 깊이, 그리고 깊은 통찰력을 배울 수 있었고 황량한 군대 생활에서 맛보는 생수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명절에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예의로 졸업 후에도 관계를 맺고 있었고 여러 가지 세미나와 학술 강연회에서 안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 경동교회에서의 강연 중에 기독교의 지성이 사회 일반의 지성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안타까워하시던 모습도 떠 오른다.
우리는 늘 행복했다. 왜냐 하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교에서 끝나지 않고 일생을 통해서 동행하고 있다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강의나 예의적인 인사로 만나는 것도 있지만 어려운 문제나 괴로운 일로 상담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다. 70년대 목요기도회와 갈릴리교회에서의 만남은 동지적 만남이었고 역할 분담을 하는 보이지 않는 조직적 만남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안 박사도 어느 사이에 민주화 운동의 사령관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나는 79년 어느 때에 안 박사님께 얼마의 돈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군부 독재에 총궐기 하자는 유인물을 독자적으로 제작하는 데에 썼다. 결국 인쇄물의 운반 과정에 들통이 나 나는 도망자 생활을 했다. 6개월 후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는 과정에 자금 출처를 추궁하는 수사관에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이름을 들이 대었으나 통하지 않아 안 박사의 이름을 말했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말았다. 보이지 않은 조직의 사령관을 노출시킨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런 나의 실수를 자책이라도 하듯, 도피 생활에서 체험한 민중의 삶에 나를 내어 던지기 위해 민중의 삶의 방편 중에 하나인 포장 마차로 장사를 하게 되었다. 돈에 얽매여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체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삶의 보고를 안 박사님께 드린 일도 있다. 그 때에 안 박사님은 ‘당신은 예수가 아니야. 예수가 되려고 하지 마.’라고 충고하면서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민중신학을 논의 하는 소모임이나 집회에 참여하면서 학교 아닌 학교에서 민중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신학의 이론을 논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삶의 자리에 있었고 민중의 생생한 삶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나같은 사람의 참여를 원했을 수도 있다. 나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절실한 삶과 그 삶을 표현한 민중의 언어를 신학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완고한 입장에서 이런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성서의 언어와 지적인 언어, 그리고 역사의 언어로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민중과 함께 교회를 하면서 우리의 음악(국악)으로 찬송을 부르고 우리의 예배 양식인 굿의 형식을 빌어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판소리 형식을 빌어 설교도 해 보면서 민중신학과 대화를 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민중의 비합리적 언어는 신학과 문화와 역사의 지적 논리 및 합리성에 의해 밀려나고 있었다.
나는 또 넝마주이 집단에 참여하면서 또 다른 민중의 삶을 체험하였다. 이들의 삶과 언어를 신학적으로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민중신학의 논의에 이러한 민중의 삶과 언어가 낄 자리가 없었다. 사건의 신학, 한의 신학으로 민중신학은 전개되었고 성서의 언어와 성서의 삶의 자리를 정치 경제적으로 해석하면서 민중의 피지배 계급성과 경제적 계급성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려 했고 민중의 사건(시위, 폭로, 고발, 투쟁 등)을 신학적으로 변론하거나 증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중의 표본이라 할 전태일과 그의 주변에 있었던 아름다운 집단의 투쟁과 고난 그리고 그 힘에 대해 신학적으로 변론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민중신학을 말하고 민중의 삶과 언어를 찾으려 해도 민중(도시빈민)은 나를 그들과 다른 특혜를 입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들 가운데는 특혜를 입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위로를 받거나 실리를 취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의 동일화를 위해서 성직이라는 특혜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민중의 삶과 의식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천박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돈에 집중하면서 보다 높은 수입을 얻으려는 민중의 삶에 천착해 본 것이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을 ‘일꾼두레’라는 공동체로 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들의 적나라한 삶에 젖어들면서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은 물론 이들의 순결과 왜곡된 자화상을 『일판·사랑판』에서 그려 보았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는 이들의 삶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허병섭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안 박사님은 실존적인 삶에 관한 말씀을 길게 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성 프란시스나 하천풍언, 테레사와 같은 질의 삶을 제시하기도 하셨다.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운동성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밀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에야 정치 입문으로 민중의 지팡이가 될 결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정치의 벽은 높았다. 그리하여 농촌으로 내려온 것이다. 도시의 민중을 향한 삶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이 과정에서도 안 박사님과 상의한 일이 있다. 땅이 없는 나에게 농사 지을 땅을 제공해 주시려고 노력도 하셨다. 한국신학연구소의 생명현장(실습장)에 관한 말씀도 하셨다.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나의 결의에 절반은 동의하신 듯 했다.
어떤 대화의 모임에서 1세대의 민중신학자들이 돌아가시면 2세대의 민중신학자들이 계승해야한다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안 박사님은 ‘아니 노인네들은 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 하시며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민중신학의 스승이 있다면 민중신학을 따르는 제자가 있게 마련이다. 민중신학의 제자는 여러 종류이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는 그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 스승의 제자로서 지금 민중신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민중신학에 아직도 도취하고 있다면 도시의 민중에서 농촌의 민중을 향해 관심을 옮긴 것이다. 도시에서의 20여 년을 도시의 민중(도시 빈민과 노동자)을 위해 봉사했다면 나머지 20여년(아마도 남아있는 마지막 삶)을 농촌에 봉사하는 것도 민중신학의 또 다른 대상인 농민을 향한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실천적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몇 해를 농촌에서 살아보니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눌리고 지배 당하는 자연, 땅이 민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섬기는 일이 눈에 보인 것이다.
땅과 자연이 인간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땅은 아주 많이 황폐화 되었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새로운 흙을 산에서 옮겨와 곡식과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이 새 땅에서 생명을 또다시 일구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을 밀알 노동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밀알 노동은 땅 속에서 수많은 미생물들의 노동을 포함해서 볍씨나 각종 씨앗에 붙어 있는 씨눈의 노동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과 이 자연 속에 있는 밀알들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처절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밀알의 노동이 과연 처절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 아름다운 것이다. 밀알들의 노동은 즐거운 것이다. 밀알의 노동은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노동에 의해 자연과 인간의 생명이 끊임없이 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노동을 완성했다고 하면 이 시대에 예수는 밀알 노동을 통해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시려 할 지도 모른다. 이같은 가정이 가능하다면 밀알 노동은 민중신학의 핵인 셈이다.
지난 2년 동안 종자를 틔우고, 논을 만들고, 손으로 모를 심고, 병충해가 생기고, 멧돼지가 벼를 짓이기고, 찬물의 괴롭힘을 견디면서 우뚝 솟아있는 벼 포기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감동으로 가슴이 저며오고 있다. 고추, 감자, 고구마, 콩, 참깨, 들깨, 파, 마늘, 당근, 토마토, 오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면서 우리는 밀알 노동을 하고 그 결실을 먹고 나누고 있다. 우리가 밀알 노동에 동참하고 많은 미생물과 미물과 대화하고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그리고 벼를 베면서 지렁이와 개구리 그리고 각종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논바닥을 본다. 잡풀이 자라 있고, 마른 논에 두더지의 길도 있다. 그리고 논바닥에는 새들과 짐승들이 먹어치운 쭉정이들도 널려 있고 그들이 배설한 것도 있다. 이렇게 어울림이 있는 한 우리의 땅은 영원토록 생명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므로 우리의 먹을거리가 조금 줄긴 했다. 돈으로 따지면 몇십만원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경제로 풀어서 계산하는 것 보다 생명의 바다에 살고 있다는 행복이 크다. 생산비와 소비 가격을 따지지 않는다. 자연의 생명력이 인간에게 배푸는 바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굳이 따지라면 투자한 비용과 소출한 액수가 비슷하다. 전화나 전기, 자동차나 의료보험 따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우리의 밀알 노동은 평화와 행복을 넘치도록 제공해 준다. 그러나 많은 땅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다.
우리의 또다른 기쁨은 우리의 소출을 새들과 멧돼지들과 적당히 나누어 먹은 것이다. 이들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풍부한 생명의 자원을 선물로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쉽게 얻을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땅들은 모두 제초제, 농약, 화학비료 때문에 병들어 있고 얼마 못가서 이 땅들은 죽게될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으로 대량 생산을 해야 하고 그 비용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땅은 신음하고 있다. 억눌리고 빼앗기는 땅의 생명력을 살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니, 땅은 우리 인간을 향해 ‘우리에게 생명력을 되돌려 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을 향한 절규일지도 모른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수천평의 땅을 살리는 비용을 돈으로 계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가치와 의미를 돈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다. 사람이 땅을 살린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이, 자연 내부에서 역동하는 밀알의 노동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것 만큼 먹고 자연이 가져가야 할 것을 되돌려 주므로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밀알의 노동이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근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 밀알의 노동에 동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민중신학의 한 실천이 아니겠는가?
안 박사님이 민중신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하셨다면 밀알 노동으로 민중신학의 실천으로 이어갈 것이고, 학자로서의 지조와 철저함이 있었다면 나는 밀알 노동을 철저하게 이어갈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의 삶 주변에 서울이나 인천 등지에서 농사하며 살겠다고 몰려온다. 이곳의 자연이 수려하기도 하고, 인심도 남다르고 아직은 땅값이 싼 오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안성면에서도 ‘물아래동네’로 천시받았던 동네이다. 소위 ‘아랫것들’이 사는 동네이다. 아직 그 옛 여운이 가시지 않은 곳이다. 벌써 십여 세대가 이주해서 농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신학도 하지 않았고 신앙심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밀알의 삶을 꿈꾸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생명을 일구는 삶의 가치관을 일깨우기 위해 대안학교를 준비해 온 선생님들 십여분이 ‘생태교육’을 교육 이념으로 한 대안 학교를 준비하고 있다. 김경남 목사가 교장으로 내정되어 푸른 꿈 고등학교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민족 예술인 총연합의 가족들이 생태문화예술을 꿈꾸며 예술인 마을을 준비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전국 귀농운동 본부는 이곳을 생태마을이 있는 곳으로 알리거나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녹색 연합을 통해 이곳에 와서 생태마을을 설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조사도 한다. 전북대의 이석영 교수는 내가 농사하고 있는 현장을 생태농업의 실험장으로 삼아 여러 가지 학문적 실험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과 활동들이 밀알 노동과 연관되거나 밀알 노동 그 자체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밀알 노동이라 말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생명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어 있고 이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종교 문화 교육의 문제를 풀어내어 21세기의 비전으로 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아가 지방자치 단체장도 이 과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어쩌면 생명 가치관을 중심한 경제 질서의 모범도 세워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즈음 회자 되고 있는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 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족하며 살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너무나 암울하다. 우리의 존재의 자리가 흔들리고 있으며,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땅에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이 땅을 물려 주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땅(존재의 기반)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다면 이제 땅을 살리기 위해 인간이 십자가를 져야한다. 이러한 실천이 민중신학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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