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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34

동아시아의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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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즈키 쇼조

(鈴木正三 |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 擔當主事)


현해탄을 넘어선 우정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다정하면서도 결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던 안병무 선생님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상기되는 것은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가 안 선생님께 수많은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1967년에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서 처음으로 한국 교회를 방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나는 한반도와 일본의 깊은 골은 현해탄보다도 깊다고 느껴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안 선생님을 통해서 다져진 민중의 길은 어쩌면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주고 있다.
안 선생님의 내력 및 민중신학에 대해 공부할 때, 1973년에 안 선생님께서 만드신 한국신학연구소가 일본의 도미사카 그리스도교센터와 공동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안 선생님이 하이델베르그에서 유학하실 때 안 선생님과 친구가 된 일본인 사타케 아키라(佐竹明) 선생님은 안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성서신학자로 활약하시면서 1980년부터 94년까지 도미사카 그리스도교센터(1975년에 창설됨)의 이사장을 지내셨고, 1982년에 시작된 동 센터의 연구 활동의 중핵을 만드셨다. 한국신학연구소와 도미사카 그리스도교센터는 함께 독일동아전도회(DOAM)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단체였기 때문에, 그리고 양 단체의 이사장이 친구이자 동지였기 때문에, 게다가 동 센터의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멤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 지원에 참가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도미사카센터의 활동의 일부로 도미사카센터와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프로젝트가 구상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공동프로젝트의 주제는 ‘민중신학 연구’로 하였고, 도미사카센터 측에서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민중신학연구회가 매우 의미있는 연구회로 발전하였다. 한국신학연구소 측에서는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민주화 투쟁, 1980년대의 민족 민주 변혁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말하자면 한국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생겨나고 키워진 신학사상이었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로 하기 힘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기획을 위해 1985년에 사타케 이사장, 무라야마(村山) 이사(현재는 이사장),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한국신학연구소를 방문한 때에도 운동을 위한 양 단체의 협의가 중단된 상태였고, 그 후 양국에서 번갈아가며 3회에 걸쳐 실시되었던 민중신학협의회에서도 한국에서 개최된 협의회 중에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기억된다. 그뿐 아니라 그 밖에도 몇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선생님을 비롯한 한국신학연구소의 분들은 이 프로젝트에 정말로 잘 협력해 주셨다.
일본의 죄책 및 그에 대한 반성이 없음으로 해서, 한국과 일본은 공동프로젝트와 같은 일을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후기하는 바와 같이, 두 번에 걸친 공동프로젝트는 그같은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난 기획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사카 그리스도교센터로서는 제1회에서 제2회로 회를 거듭할수록 연구 교류가 확실하게 심화되어갔다고 느낀다. 제2회 때에 일본 측의 문제로 인해 커다란 좌절이 있었더라도 제3회의 기획에 착수하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아니, 안 선생님이 반드시 수행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안 선생님이 키워오신 풍성한 민중신학적 정신의 덕택이라고 생각하여 감사해 마지 않는다.


동아시아 민중 교류의 길을 연 민중신학의 창설


두 번째로 상기되는 것은 민중신학의 창출이다.
『민중신학 이야기』에 의하면 독일에서 양식사적(樣式史的), 편집사적 신약학을 배우고나서 관심을 딴 데로 돌린 안 선생님은 민중(오클로스)의 고난과 마주쳐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여 몸소 옥에 갇혀서 처음으로 성서에 눈을 떴다고 한다. 신약학에서 가령 ‘요한이 잡힌 후, 예수는 갈릴래아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의 예를 든다면, 중요한 것은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는 예수의 설교이고 나중의 것은 덧붙인 편집구였다. 그러나 유신체제 하의 체포의 회오리 속에서 ‘예수가 갈릴래아에 간다’는 성서의 말은 안 선생님과 동지들에게 결정적인 시사를 주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요한을 체포한 지배자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는데, 예수는 요한이 체포당한 후에 그 지배 지역의 한 가운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때까지의 서구 신약학과 교회신학에서는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에 대해서 신앙으로의 회심이라는 실존적 때가 임했다, 교회의 때가 왔다, 종말적 때의 현재화이다 등의 해석이 통례였는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사실은 당시의 권력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이러한 것이 서구 신학과의 결별(탈서구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한국신학연구소와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의 공동프로젝트 ‘민중신학연구회’가 출판한 책 『민중이 시대를 연다』(1990년)의 서문에서, 안 선생님은 ‘바야흐로 절정에 이른 서구 신학계와 겨루어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일본의 학자들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심을 표명했었다. 더욱이 민중신학은 한국의 역사인식이라는 컨텍스트 위에 성립한 신학인데, 일본의 신학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신학이고, 예전에 전쟁 전과 전쟁 후에 한반도에 끊임없는 위협을 가한 일본의 역사에서, ‘신약성서 해석의 영역에 있어서조차, 식민지적 논리와 시각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와같은 상황에서 양자의 대화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측 멤버 중의 한 사람인 쇼지 쓰토무(東海林勤) 목사는 일본에 있어서의 민중신학의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건너기 힘든 틈새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한국의 민중에게 고난을 강요한 원인이 전쟁 전에는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적 식민지주의로 치닫던 일본과 일본 국민에게, 전쟁 후에는 간접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제일주의로 내달은 일본과 일본 국민에게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민은 한국의 민중과는 명백하게 다르지만, 회개한 시민이라면 한국의 민중과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1985년 당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친 군중(오클로스, 마르 15:11 등)은 고난에 직면한 민중(오클로스)의 다른 측면으로, 그것은 상황에 따른 양면성이 아닐까 하고 논했다(당시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행한 민중신학합동협의회에서의 발제). 일본의 신약성서학자 다가와 겐조(田川健三) 선생님이 같은 군중의 변심 따위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후에 베드로도 또한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나갔다는 기술도 또한 성서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이 문제는 민중신학 비판의 문제가 아니고 그 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후 십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시에 한국에 있던 ‘민중’은 같은 사람들일진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놀랄만한 민중신학 비판이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통일의 시점에서 볼 때, 정말 민중은 없어져 버린 것일까. 안 선생님은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어떻게 하면 이 분단 상황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거기에서 민중신학이 나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식량 위기로 고난 중에 있는 북한 민중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민중신학은 북한의 민중과 상호보완적 협력관계에서, 지금이야말로 민족통일의 신학사상으로 북한의 활화산을 발견하는 임무를 다할 때가 아니겠는가.


동아시아의 문화의 공유를 지향하며


안병무 선생님에 대해 기억나는 세번째의 점은 가장 큰 집약점이기도 한데, 안 선생님이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사건’을 꿈꾸신 것이다.
민중신학연구회가 책을 출판하는 것으로 종료된 후 1991년 여름에 안 선생님을 방문했던 때라고 생각되는데, 금후의 공동프로젝트에 대하여 안 선생님은 이번엔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대화가 가능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북한의 박승덕 교수의 이름을 거명하셨다. 그리고 나서가 큰 문제였다. 그 때까지는 한반도의 남쪽의 일만을 생각하면 되었는데,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경험도 없는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를 매개로 하여 남북대화를 기획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를 거론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사건을 해석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일을 벌이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잠시 동안 눈이 허공을 헤맸었다고 기억한다. 지명관 선생님께 의논드렸더니 그것은 좋은 기획이므로 중국과 러시아를 참가시켜서 5개국 공동프로젝트로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말씀하셔서, 오히려 이야기는 더욱 부풀어져 버렸다. 통이 큰 한국의 선생님들과 소심한 일본의 선생님들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우선 센터 이사회를 설득하여 1992년 여름에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에서 제1회 동아시아연대를 위한 국제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때에는 유감스럽게도 북한은 참가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2회는 중국의 상해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북한이 참가하는 데 까다로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성가신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와 전혀 관계없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상해사범대학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회의의 사무국을 일본의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에서 행하는 과정에는 실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렇지만 1994년 여름에 북한에서 박승덕 선생님을 비롯한 다섯 분의 대표가 오셨고, 휠체어에 앉으신 안 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한국의 대표단이 도착하여 양자가 굳은 악수를 할 때는 가슴에서 깊은 감동이 우러나왔다. 안병무 선생님의 희망을 실현했다는 기쁨뿐만 아니라, 무언가 전혀 다른 아픔과 같은 감정이 동반되었다. 3박 4일의 토론회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결실이 풍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오랫동안 분단된 남북한 사이의 너무나도 짧았지만 진실된 대화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얼마 전에 일본과 한국의 우정이 또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안 선생님과 사다케 선생님이 약속하셨던 대로 박성준 씨 일가의 일본 체류가 1995년에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의 연구주사가 된 박성준 씨는 2년 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릿쿄대학(立敎大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라는 책을 출판하고 잡지에 일본인 그리스도인과의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였고 지금은 연구를 심화하기 위해 미국에 가 있다. 박성준 씨의 활동은 일본인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놀라움과 복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는 거대화한 한국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 시점이다. 둘째는 고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일본인 그리스도인 속에서 민중신학적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는 놀라움이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해서 쌓아올려왔던 3회에 걸친 국제학술토론회의 마지막 모임에서 안 선생님이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걱정거리가 표면화되었다. 그것은 남북간의 화해의 어려움이 아니라, 일본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화해에 있어서의 어려움이었다. 문제는 제3회 국제토론회가 개최되기 전에 일본에서의 준비 단계에서 이미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 측의 발제자는 1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 측의 발제자는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여자정신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 기획 입안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아시아여성기금(국민기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안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개최된 제3회 토론회에서 발제의 마지막 자리에서 정신대 문제를 거론하며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를 촉구했다. 그 후 다른 일본 측 대표단은 이 발제는 발제자 개인의 의견이고, 자신들은 반대라는 태도를 표명했다. 어찌되었든 쓸데없는 대응이었다. 한국 측은 반발하였고 그 후의 경과는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시민연대’를 발족시키고 정대협과 함께 1년간의 모금을 개시하였다. 지식인의 연대를 모색하는 회의의 마지막에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한국의 민주화 투쟁 시기에는 실로 긴밀히 협력해왔던 친구이자 동지였던만큼 심각한 균열이 되어버렸다. 이 상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기도하면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 현 상태이다.
그런데 제3회 토론회 때, 안병무 선생님께서는 다음 프로젝트의 주제에 대해서도 이미 제안을 하셨다. 그것은 ‘문화’였다. 두 번째의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의 연대를 위하여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는 정치색이 강한 것이 되어 버렸다. 회의 그 자체가 어렵게 되어갔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도출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동아시아 공통의 재산인 문화를 중심으로 한 협의회를 다음에 추진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제안이었다. 그 후 천안에서의 토론회에서 심각한 대립이 야기되고 말았기 때문에, 안 선생님께 프로젝트 ‘문화’에 대해 상세하게 여쭈어 볼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있던 중에, 안병무 선생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전해졌다. 프로젝트 ‘문화’는 안 선생님의 유언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제는 안 선생님께 이 주제를 구체화시키는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남겨 주신 지혜는 받았다. 좋은 협력자도 몇 분이나 얻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놓여있는 깊은 골을 한탄만 하지 말고, 친구들과 함께 안 선생님의 뒤를 따라 우리들도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사건’을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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