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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46

안병무 박사를 기억하며 | 지금 이곳에서의 삶―종말론적인 사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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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윈프리드 글뤼어

(Winfried Gluer / Chinese University, Chung Chi College 교수)


글은 안병무 박사의 작업을 평가하는 어떤 학문적인 논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 그리고 친구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안병무 박사를 1978년 가을에 처음으로 만났다. 슈투트가르트의 개신교 선교국의 동아시아 담당자로서의 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안병무 교수의 이름은 독일에서 이미 오래 전에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볼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선교국은 안 교수를 총회(Synode)에 초대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 정부가 그에게 독일로 출국할 것을 허락할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그 총회의 결정으로 그때 그는 총회예배의 설교자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모임 첫날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끝나기 바로 전에 그는 들어왔다.
예배가 거룩한 병원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교회는, 전쟁 중에 폭격으로 부숴진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갑자기 그의 갈색 여행복을 입고서 설교단에 나와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때문에 체포와 심문, 선고, 교수직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한 증인으로서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런 경험 속에서 그는 민중을 발견했다.
이 회의에 이어서 카이저스베르트(Kaiserswerth)에서는 제3차 한독교회협의회가 열렸다. 안병무 박사는 “고난당하며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됨“에 대해 자세한 성서적인 숙고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아래서 교회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 강연의 모든 것은 “동일화”(Identifikation)라는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난당하며,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당해야 하는 자들과 그리고 역시 고난당하는 예수와 동일시 된다. 자기 양심 때문에 감옥에서 고난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어디서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가 연대 속에서 체험될 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은 해결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고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병무 박사가 민중 공동체에서 행했던 인격적인 체험이었다. 후에 그는 감옥 속에서 멸시받는 자들, 즉 범죄 때문에 투옥되고 그러나 대부분의 간수나 감시자들보다 인간적인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나에게 설명했다. 그는 오클로스(ochlos)의 연대를 체험했다.
성서적 숙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클로스에 관해서 다룬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그들이 나의 형제들이며 (그리고 자매들이며), 그가 나의 어머니다!’ 하셨다(막 3:35). 사람들 사이의 차이, 권리를 빼앗긴 자들과 힘을 실행하는 자 사이의 차이는 사라졌다. 동시에 새로운 차원이 생기는데, 그곳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가 다른 눈으로 보여질 수 있다. 누가 그들 사이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안 박사는 예수가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동정에서 조건으로서의 종교적 자격을 주는 것에 반대한다. 예수는 미리 어떠한 물음도 제기함이 없이 오클로스 편에 선다. 토론 중에 이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었다: 오클로스 그 자체는 이미 종교적으로 자격를 가지고 있는 개념인가? 가난한 자들은 가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에 대항하거나 그들의 동료에게 고통을 주며, 속이고 착취하는 가난한 자는 또한 없는가? 오클로스 개념이 그런 견해를 드러낸다는 것은 일방적이다. 마가복음 3장 35절─곧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이 예수와 그의 백성의 소속 됨의 시금석으로 전제된─에는 그러한 견해가 전제되지 않았다. 독일 편에서 안 박사의 주석적인 방법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제기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많은 점에서, 독일 대학에서 이룬 신약성서적인 동의(Konsensus)를 넘어서고 있다. 어떻든 간에, 안 박사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참여, 그의 체험 그리고 증인과 인간으로서의 그의 신실함은 참여자 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모든 사람들에게 삶과 고난 속에서 결정된 차원의 중요성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안 박사의 이같은 성서적인 숙고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으로서 가현설(Kenosis) 기독론에 대한 암시는 오늘날까지 나의 기억 속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리고 희망을 상실한 자에게 자극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회퍼가 말한 대로, “타자를 위한 (그리고 타자와 함께 있는)” 예수를 그들 편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교회협의회의 결과는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느 날 저녁 참석자 서로 간의 만남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거기에 역시 손님이 초대되었다. 한독교회협의회가 주제이기 때문에 카이저베르트에 본 근교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대사관의 대사가 초대되었다. 대사는 왔고 손님들에게 소개되었다. 안병무는 친구들과 함께 책상 곁에 앉았다. 물론 그 대사는 안 박사의 참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안 교수에 대한 여행 허가를 그에게 청원하였고 그에 의해서 계속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안병무 박사의 참석을 거절하고자 했고 그를 부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안 박사를 옹호해서 그 사람은 안 박사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안 박사가 앉아 있는 자리에 다가갔다. 홀에는 느낄 수 있을 만큼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권리를 박탈당한자를 편들 때, 인간적인 상실을 생각하지 않고 산업화를 추진하고 비판자를 체포하고 고문하며 장기간 수감한 것으로 알려진 그 국가의 대표자가 일어섰다. 그의 맞은 편에는 이같은 모든 사실을 자기의 몸으로 체험한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안 박사가 자기 손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가 보여졌다. 짧은 망설임 후에 그는 일어나서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는 정치적인 권리없이, 자기 직업을 실현할 권한 없이, 점점 더 박탈당한 자가 되었다. 그들 스스로 여기서 억압자와 그리고 억압당한 자로서 대립해 서 있는가? 혹은 둘 다 오클로스의 부분들로서 인간, 비록 외부적으로 차이가 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으로 서 있는가? 안병무는 그 대사에게서 인간을 보았고-연대 속에서- 더 이상 군사독재정권의 외교관을 본 것이 아니다. 이 만남이 그가 협의회에서 행했던 성서적 숙고함의 하나의 테스트인가? 여하튼 우리는 이같은 강렬한 인상적인 만남을 이해했다. 이 만남이 안 박사에게 얼마나 상처를 일으켰으며 그리고 그가 이것을 참아내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았는지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자명한 것이었다.
그 이후에 나는 안 박사를 좀더 가까이 알게 되었다. 개신교 선교국은 그를 초대하여,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지내면서 조용히 일하고 무엇보다 더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나는 그를 매우 자주 방문하였고, 그는 나에게 한국과 한국 교회를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그때 우리는 아주 빨리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튀빙엔대학병원에서 그의 심각한 심장병의 근본적인 검진을 했다. 동시에 우리는 의사들이 회복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즉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짐의 억압 아래서 고통을 당했던 심장경색의 결과를 없애거나 최소한 경감 시키기를 ….
그러나 이미 한국에서 의사들이 진단한 바와 같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긴장할 때 심장벽이 뚫릴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의사들은 그에게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도록, 흥분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떠한 공적인 강연도 더이상 하지 않도록 충고했다. 이제부터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생명을 넘어서, 항상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했다.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성탄절 소식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종말론적인 상황에 살며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정확히 그의 실존론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삶의 마지막 안전에 이르기까지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희생에도 준비가 되었다. 인간이 자기의 심장을 걸어 놓은 다음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지금은 아직 전체가, 본질적인 것이 문제이다. 나는 그 당시 그것을 잘 이해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춤거리고 바라지 않는 자리에 그가 어떻게 단호하고 타협없이 모든 것을 내걸고 관여했는지, 나 역시 인정할 수 있었다. 자기 관점에서 그는 이 사람들을 멸시했다. 나는 그가 그들에게 아마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여러번 생각했다. 왜냐하면 더이상 되돌아 올 수 없고 한 순간 순간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살아야만 하며 좌절하지 않고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안 박사만큼 그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 해에 많은 것을 함께 체험했다. 박정희 대통령 최후에 대해서 안 박사는 1979년 10월 27일 아침에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동트기 전에 확성기 소리 때문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광주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낮에 거기로 가야 했다. 그 교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박정희의 저격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도처에 그런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광주에서 돌아 온 후에 안 박사는 나에게 갈릴리 교회의 예배에 설교를 부탁했다. 예배가 이번에는 늘 하던 대로 교회에서 행해지지 않았다. 단지 가까운 친구들만이 참석했고, 그 가운데는 유가족들도 있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부 치하에서 직접적으로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독일의 모든 교회에서 설교된 일요일 설교의 본문은 원수 사랑에 대한 것(마 5:38-48)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많은 원한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 본문을 해석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나를 억제하지 않았다. 내가 본문을 낭독할 때 나는 그들의 얼굴 속에서, 안 박사에게서도 역시 거부와 의심을 보았다. 내가 외부에서 와서 그들에게 설교로 해방에 대한 그들의 격정과 감정을 원수 사랑의 요구를 통해서 도덕적으로 매장하려고 하는가? 나는 이 본문이 오늘 나에게 얼마나 도전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했다. 실제적으로 예수는 자기 원수들에게 역시 사랑을 행했다. 이것을 통해서 정의와 불의로부터 구별 그리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행위가 포기되지 않는다. 설교에는 진지하고 긴 대화가 덧붙여졌다.
1980년 5월 광주의 피의 바다 이후 나는 몇 달 뒤에 한국에 왔다. 나는 진주의 기장 총회에서 강연을 해야 했다. 공항에서 대한항공의 승무원이 나에게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여행가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분명히 검열하기 위해서 압류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일 주일 후에야 다시 받았다. 나는 총회에 필요한 나의 옷이 든 가방(그러나 나의 인쇄물이 아니다)을 찾기 위해서 아직 몇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야 했다. 마침내 나는 머물러야 할 한국신학연구소에 왔다.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나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 이층대기실로 들어갔다. 거기에 안 박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주 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렸다. 그는 말없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소한 십 분 동안 우리는 침묵 속에서 앉아 있었다. 광주, 피바다, 친한 친구들인 서남동, 이해동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체포, 전두환에 의하여 파괴된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희망, 이 모든 것이 그 방의 이 순간 속에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물음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밖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안 박사는 그의 심장병 때문에 체포를 모면했다. 그는 그의 적들에게서도 역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튀빙겐 의사의 충고를 여하튼 따르지 못했다. 발제, 강연, 토론 없이 안 박사를 생각할 수 있는가?
금년에 나 역시 그가 어떤 중요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후임자를 소개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창설 준비 모임의 증인이었다. 그의 요구, 공동체의 형태 그리고 영성과 함께 하는 공동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을 교환했다. 개신교의 공동체에서 독신 서약의 요구가 정당한가? 내가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거기에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적인 문제 역시 즉, 공동체 회원이 하나의 복장을 해야 하는지, 이 복장은 어떤 종류가 되어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토론에 붙여졌다. 우리는 여러번 목포에 갔으며 나는 안 박사를, 그 여인들에게 충고와 행동으로, 구체적인 계획과 정신적인 지침으로 그들 편에 서 있는 이 공동체의 아버지로 느꼈다.
민중신학에 대하여 안 박사와 나는 언어적으로 가능한 한 연구하고 토론했다. 나에게 하나의 기쁨은, 『신학사상』에 게재된 논문과 설교를 선택하여 독일어로 출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종화, 김창락 그리고 이준모 교수는 그것들을 한국어로부터 독일어로 번역했다. 언어상으로 그것들은 더욱 매끄러워지고 많은 점에서 짧아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 한국의 독자와 청취자를 위해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문 밖에서』(Draussen vor dem Tor)라는 제목이 이 책에 어울리는 듯 했다. 안 박사는 이 논문집을 인쇄하기 전에 텍스트를 읽거나 점검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여러 점에서 완전히 올바르게 번역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구신학에 대해서 그는 비판적이었다. 디벨리우스, 불트만, 닷드 그리고 타이센 등과 함께 그는 논쟁하며 자주 스스로 정확한 설명없이 그들의 오류를 뒤에서 말한다. 철저한 학술-학문적인 차원의 길이 그의 최후의 의도가 아니다. 마치 그것들이 성서적인 사신의 최후의 요청인 것처럼. 청취자들에게 관련되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학문적인 방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 안에 있다. 안 박사는 그것을 알았다. 물론 디벨리우스, 불트만 그리고 다른 신학자들도 역시 안다.
“서구”(Westen)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의 비판의 양식에서 부정확하다. 이를테면 “서구적인” 사고는 이원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직접적으로 함께 속하고 있는 것을 찢어내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로서 서로 대립되어 있다. 성서적인 이해에 따르면 거기에는, 마틴 부버가 확신있게 제시한대로, 전혀 이원론이 아니다. 또한 여러 다양하고 풍부한 서구적인 전통에서도 사람들은 그 둘의 분리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으며 중요한 신학적인 조항들이 거기에 대항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단순화된 일반화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아시아 전통에 대한 안병무의 관심은 상황신학의 정당한 노력이다. 중국에서는 “Tian ren yi guan”(天人一貫)이라는 양식의 유교적 개념 속에 하늘과 인간의 우주적 관계가 삼라만상(im All)에 표현된다. 동학의 ‘인내천’의 양식 속에도 비슷하다. 여기에서부터 평등한 윤리적 행위의 요구가 나온다. 그러나 구원론에서 이 양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중 자신에게서 구원론적인 질이 어떻게 오는가? 여기에 서구적이거나 동양적인 자기 주장에서 간단히 승부를 가려서는 안되는 긴장이 있다. 초월과 은총에 대한 체험이, 주체와 객체가 이원론적인 체계 속에 분해되지 않고서, 그 뒤를 결정한다. 안 박사의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 (동서양의)두 측면이 갈라짐이 없이, 하나의 창조와 구원이 진지한 신학적인 인간학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권위있는 신학적인 표현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 그 과제는 계속 존재한다.
서울 안암동으로부터 아우내로의 출발은 안 박사와 개신교선교국(EMS)과의 신뢰의 위기를 가져왔다. 오랜 파트너로서 선교국은 한국신학연구소의 일을 몇 년에 걸쳐서 가능하게 했으며 계속적으로 안암동에 있는 주요 건물의 건축과 개축 등에 광범위하게 지원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것에 대한) 판매의 계획과 아우내로의 이전이, 미리 어떠한 상의도 없이 선교국을 지나쳐서, 세워지고 실행되어서 상당한 어려움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 나는 한국 교회와 선교국의 관계에 권한이 없었다. 나중에 이 위기는 걷어질 수 있었다. 불행한 상황이 그것을 야기했다.
이제 아우내의 새로운 중심지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의 일이 계속되는 것은 안 박사와 그의 생애의 일을 빛나게 하는 것이며, 한국 교회에 거대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안 박사와의 만남과 우정은 나의 생애에서 중요하고 풍부한 경험이며, 계속해서 남을 것이다. 이 경험은 그에 대한, 그의 사고 그리고 행위에 대한 물음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단지 열린 호혜주의(Gegenseitigkeit) 속에서만 순수하고 생산적이며 인간적인 관계가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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