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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56

안병무 선생을 추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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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안병무 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생각한다. 아마 그 때 선생께서 막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독일에서 배우고 터득한 바를 후진들에게 왕성하게 가르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한신대학의 신약학 교수로 있는 김창락 형의 권유로 청계천 변 어느 지점에 있던 중앙신학교에서 야간에 선생의 강의를 청강하게 되면서 선생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김 형은 신학을 전공하려고 결심하고 선생을 찾았지만, 나는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강의를 청강하는 정도였다.
그에 앞서 김창락 형과 나는 인천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인성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김 형이 영어를, 내가 역사를 가르쳤다. 첫 직장이었고 대학을 막 졸업한 시기여서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교육에 열성을 다 바쳤다. 그 때 같이 가르쳤던 동료들 중에는 대학으로 진출하여 학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는 이들도 있다. 그 시절 우리는 지금 국민대학 영문과의 전재근 교수와 함께 셋이서 자취를 한 적도 있어서 무척이나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김 형은 1965년경에 서울의 대광고등학교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는 철학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는 한편 그 무렵 중앙신학교에서는 안 선생의 강의와 허혁 박사의 강의를 주로 듣고 있었다. 김 형은 학문에 대한 정열이 넘쳐서 새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혼자서 독점하기보다는 그것을 친구들과 나누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에게도 자주 안 선생과 허 박사의 강의를 꼭 들어보라고 권하였다. 이렇게 당시 가장 진보적인 신학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김 형의 권유와 열성 때문이었다.
당시 청강했던 강의 내용은 제대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두 분에게서 복음서에 대한 색다르면서도 깊이있는 강의를 듣는 한편 당시 한창 소개되고 있던 불트만의 학문에 더욱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것은 당시까지 전혀 접하지 못했던 미지의 학문 세계였다. 때문에 당시 내가 신학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느낀 놀라움과 충격은 매우 컸다. 한편 학문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는가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그 때까지 고신파의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소개받고 그 세계 안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자족해 왔던 폐쇄적인 신자였던 나에게는, 안 선생과 허 박사를 통해 듣는 것이 모두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신앙과 신학의 세계에서도 저런 심오함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 모양으로 아집(我執)에 빠져 있던 나에게는 두 분의 강의가 나의 신앙과 신학상의 개안(開眼)에 그만큼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충격은 그 뒤에도 선생과의 접촉을 통해서 계속되었고, 그만큼 나의 세계관은 확대되었다.
선생과의 계속된 만남은 그가 시작한 한국신학연구소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가끔 학술토론이 있으면 나를 불러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신학연구소는 선생과 뜻을 같이 하던, 주로 해외에서 오랜 동안 신학을 연구하던 신학자들이 해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신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전제로 시작한 연구소다. 한국적인 신학의 창출을 기약하면서 설립한 것이다. 모든 학문이 자기의 상황과 그 상황이 던져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신학도 예외일 수가 없다. 따라서 자기의 상황과 문제의식을 전제하지 않은 학문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주의할 점은 아무리 자기의 상황과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상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선생은 구라파 유학 생활을 통하여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유럽의 신학이 결국 자기의 문제의식 위에서 시작되어 인간의 보편성으로까지 확대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황과 문제 의식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거기에 한국 신학이 존재할 당위성이 있다. 우리는 한국신학을 통해 세계의 신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 이 점은 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술을 포함한 한국의 기독교 문화 전체를 두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학문과 문화를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개성과 세계성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는 바로 이 개성과 보편성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평화와 발전을 기약한다.
내가 선생의 부름을 받은 것은 그 때만 해도 한국 역사학계에서 국사를 공부하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인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한국의 민중현실을 의식하면서 한국 상황에 필요한 신학을 고민하는 분들이 있었고, 그 작업의 일단은 한국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민중신학의 얼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이 필요로 한 것은 우리 나라의 민중현실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국사학의 도움이었다. 내가 민중신학을 토론하는 모임에 초청받게 된 것은 국사학을 공부한다는 것 때문이었지만, 평소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필자가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토론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압살되는 운명에 봉착하였다. 10월유신은 우선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의 선거를 집권자의 자의에 따라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변하였다. 헌법개정은 형식적이지만,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를 지지하면서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호소하는 대열에 참가하였다. 그 무렵 막 대학의 전임으로 교편을 잡게 된 나는 유신체제가 한국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임에 틀림없는데, 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적극 동조하고 나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때, 이런 의문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답은 신학적인 천착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신학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얻으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정도일까 하는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나는 역사연구를 통해서도 우리 시대에 부딪친 문제에 맞설 수 있는 어떤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당시와 비슷한 격변기에 처했던 한말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결단하고 고민했으며 역사에 어떻게 대결하였는가 하는 점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격변기 한말은 그것 자체로서는 슬픈 과거이지만, 그것을 통해 국난극복이라는 교훈을 얻어야 하는 후세들에게는 하나의 사례로는 충분하였던 것이다.
나는 유신이 선포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팽개쳐 버리고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언자적인 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논문 속에 투영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나로서는 한국기독교사 관계 최초의 논문이라 할 “韓末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논문은 제목 그대로 한말 기독교인들이 민족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가고 있었는가를 밝힌 것이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이 민족적인 모순에 직면하여 불의한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을 어떻게 형성시켜 갔는가를 그린 것이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류적 계열에 속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오도된 교훈에 얽매어 침략세력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해 당시 기독교 지도자나 주류라고는 할 수 없는 젊은 기독청년들은 침략의 원흉들을 의열투쟁으로 제거하는 데에 앞장 섰음을 밝혔다. 샌프라시스코의 페리 부두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이 기독교인이었고, 박영효의 궁내부 대신 축하연에서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치하려고 하다가 그가 나타나지 않자 자살한 정재홍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토오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한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였고 그와 함께 거사에 참여했던 우연준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매국의 길을 치닫던 이완용을 명동성당 앞에서 해치우려고 한 젊은 이재명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이렇게 밝혀놓고 보니, 한말 매국원흉들을 제거한 젊은이들은 모두 기독교계 인사들이었고,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기독교 민중들이 어떻게 민족의 문제에 투신하였는가를 밝힌 셈이 되었다.
이 논문은 당시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특히 진보 측에 속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나에게 이 논문을 요청하였고 혹은 복사하여 읽는 이들이 있었다. 많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이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때로는 진보계열에 속한 교회들로부터 이 논문에 쓰여진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 혹은 강연해 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게 되었다. 특히 청년들의 모임에서 이 내용을 강연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나는 원래 일반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도였지만, 이 논문을 계기로 일약 한국기독교사 연구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그 논문을 보면 별로 새로운 것이 없는데, 당시에는 시대가 그랬던 만큼 독자들에게 기독교사의 인식에 새로운 파문이 일게 했던 것이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난 뒤에 몇몇 친구들로부터는 신변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말 기독청년들의 의열투쟁을 밝힌 것이 당시 유신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덮어 씌울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훨씬 적은 데다 신학적인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은 열린 자세로 나를 불러 주었고 대화 혹은 토론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지금 타계하신 서남동 교수와 안병무 선생을 잊을 수가 없다. 서남동 교수는 나에게 자주 한국사에 관해 질문하였다. 그럴 때의 모습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꼭 어린애와 같았다. 나는 재학시절 연세대의 김형석 교수로부터 서남동 교수에 관해서 자주 들었는데, 그런 석학이 한참이나 후배인 나에게 국사에 관해 질문하면서 겸손해 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안병무 선생으로부터는 전에 중앙신학교에서 청강받은 바가 있기 때문에 더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안암동 로타리 근처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민중신학을 논의하거나 좌담회가 열릴 때에 역사공부하는 사람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으면 나를 불렀다. 한번은 민중신학의 명칭을 두고 나와 토론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신학’이라는 말 앞에 관형사로서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냐는 것이 나의 질문의 요지였다. 당시 나는 ‘신학’은 말 그대로 ‘신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그 앞에 어떤 관형사를 붙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붙여야 한다면 ‘신학’이라는 말 밑에 ‘민중론’ 정도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한 것은 민중신학을 조직신학의 범주에 속하는 한 유파 정도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에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속론’, ‘말세론’ 등이 있듯이 민중신학도 민중의 문제를 다루는 만큼 ‘민중론’ 정도로 명명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토론의 내용은 그 뒤 신학사상에 게재된 것으로 알고 있고, 어떤 신학자가 나의 이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인용한 것을 본 적도 있다. 말하자면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는 격으로, 민중신학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나로서는 무식에다 만용까지 부렸던 것이다. 그 정도로 당시 나의 의식세계는 꽉 막혀 있었다. 그 막혀 있었던 것이 그 때까지 내가 접했던 보수신학의 폐쇄성 때문이었다고 종종 변명하지만, 그것은 바로 나의 무지와 의식의 한계 때문이었다.
토론 도중 선생은 나의 억지가 딱했던지, 민중신학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하였다. 내용은 민중신학이 종래의 신학의 한 유형이나 종속개념이 아니고 그것은 종래의 신학과는 출발에서부터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하였다. 종래의 신학이 위(神)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민중신학은 아래(인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종래의 신학이 텍스트를 중요시한다면 민중신학은 컨텍스트를 중요시하며, 과거의 신학이 기득권자를 위한 것이라면 민중신학은 억눌린 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신학하는 자세에서부터 신학의 틀과 개념 자체가 종래의 신학과는 완전이 다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민중신학을 ‘신학’의 ‘민중론’ 정도로는 그 개념을 담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클로스 이야기를 하였지만, 당시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로서는 선생의 설명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 논쟁이 있고 난 뒤부터는 선생은 나를 볼 때마다 ‘저 골보수’라고 놀려대곤 하였다. 당시 ‘고신파(高神派)’에 속해 있던 나로서는 ‘골보수’라는 말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그 놀림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치심 대신 오히려 긍지심을 느끼곤 하였다. 오히려 그런 소리가 그들과 나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주는 것같이 느꼈다. 선생이 나에게 ‘골보수’라고 한 말이 농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1980년에 선생과 내가 같이 해직을 당해 학교에서 쫓겨나 더 깊이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였다. 해직이 장기화되어 언제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던 시절, 선생은 날 더러 “당신 복직하게 되면 우리 한신대학으로 와” 하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 뒤에도 몇번 확실한 다짐을 받으려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 선생이 나에게 ‘골보수’라고 한 말이 농담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내가 정말 ‘골보수’였다면, 진보성으로 대표되는 한신대학으로 오라고 권유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을 비롯한 진보적 신학자들과의 만남은, 내가 그분들에게 어떤 기여를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생활에 더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 같다. 유신말기에 오게 되면, 나는 보수의 입장을 확실히 하면서 외형적인 활동상으로는 한국 교회의 진보계와 보수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영향 때문인지, 그 무렵 나의 글에는 ‘민중’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였다. “한국사에 있어서의 민중”이라는 글과 “민중의식 사관화(史觀化)의 시론” 등의 글은 바로 그런 것들로서 여러 논문에서 인용되고 있다. 또 한국 YMCA연맹의 ‘목적과 사업 위원회’로부터 한국 Y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여 전국대회에 와서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그 위원회의 유동식, 현영학, 서광선 등 많은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그 뒤에도 그들과의 교제가 더욱 확대, 심화된 것도 잊을 수 없다. 그 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강원룡 목사의 주재 하에 한승헌 이문영 김경재 제씨와 함께 한국아카데미 총서 『한국민주문화대전집』(문학예술사, 1985) 10권 중, 제7권인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전망』의 편집을 내가 맡게 된 것도 모두 이런 나들이와 만남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선생과의 교제는 1980년대에 들어서서 신군부의 등장으로 대학에 있던 교수들이 쫓겨나게 되면서 더 깊어진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한신대학에서 문동환, 안병무 교수가 해직되었다. 그 밖에 기독자 교수로서는 서울대의 한완상 이명현, 연세대의 서남동, 김동길, 김찬국 교수와 고려대의 김용준, 이문영 교수, 이화여대의 이효재, 현영학, 서광선 교수 등이었고 나도 까닭 모르게 그들의 말석에 끼게 되었다. 1980년 여름, 수많은 지식인들이 국보위에 참여하여 권력을 위한 시녀 노릇을 하면서 정권이 주는 영광의 대가를 누린 것과는 반대로 비판적인 교수들은 무자비하게 학교로부터 축출당하는, 일대 숙청이 단행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군부정권에 협조하여 지식인의 절조를 잃었던 사람들 중에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그 뒤 지금까지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긴 채 대학의 요직에서 버젓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은 해직 후에 오히려 연구소 일에 열중하기 위함인지, 혹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인지, 해직교수들이 모이는 회합에 그리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직교수들이 공동의 일을 하려고 할 때는 꼭 동참하였다. 이 기간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연구소를 방문하여 선생을 뵈올 수가 있었고, 다른 기독교 관계 회합에서도 가끔 뵐 수가 있었다. 그럴 때는 나를 보고 ‘골보수’라는 농담으로 친근감을 표시하곤 하였다.
선생과 함께 거의 마지막으로 일을 같이 해 뵨 것은 1985년 여름 <학원안정법> 문제에 대처했을 때였다. 해직교수들은 그 전 해 8월을 전후하여 대부분 원적교에 복직하게 되었는데, 학원안정법 문제가 불거지자 몇몇 교수들이 힘을 합쳐 그 철회를 요구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중심은 선생이었고 참여한 대부분은 그 전 해 복직된 해직교수 출신이었다. 이 이야기는 배경 설명이 약간 필요하다.
<학원안정법> 발상의 배경은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었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소위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이 있었던 것은 1985년이었다. 그 해 5월 23일, 서울의 5개 대학 76명의 학생들이 서울의 미국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사과를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것은 당시 군사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미국 또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학원에 대한 정권차원의 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어, 같은 해 6월에는 경찰이 110개 대학을 일제히 점검하고, 7월 18일에는 검찰이 전국 19개 대학의 삼민투위(三民鬪委) 학생 56명을 구속하고 주동자 13명에 대해서는 보안법을 적용하였다.
이 같은 사태의 악화는 당시 민정당과 정부로 하여금 8월 3일 당정회의에서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토록 했고, 그 후 약 보름 동안 공방을 벌였다. <학원안정법>은 허울좋은 명칭과는 달리 학원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소위 ‘문제 학생들’을 격리시켜 제재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말로는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와 같은 곳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군사정권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학생들을 이 법에 의해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고 언론계서도 그 내용만 소개하였지, 정작 교육을 맡은 대학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학생들만 여기에 대해 강도높은 투쟁을 벌이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따라서 전두환이 이 법의 추진을 보류하도록 지시한 8월 17일까지 정국은 이 법 문제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생을 중심으로 몇몇 교수들이 <학원안정법>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8월 15일 전후로 기억된다. 저녁 무렵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이 종로구 안국동 로타리 근처에 있는 버드나무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였다. 이 곳은, 평창동의 평창면옥과 함께, 그 전에도 해직교수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선생은 준비된 초안을 갖고 와서 모인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발표문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사지로 끌려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대학이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체제순응적인 대학들은 묵묵히 군사정권의 독재에만 따르고 있다고 비판한 내용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모여 그 자리에서 정식 서명한 교수들은 9명 정도였는데, 밤사이에 4∼5명을 규합하여 그 이튿날 기자회견에서는 13명의 명의로 발표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서명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분으로 한신대학의 김성재 교수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반대투쟁을 위한 제반 준비는 김 교수가 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였는데, 선생은 사랑하는 제자가 희생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지 김 교수를 명단에 넣지 않도록 배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회합에서 서로 말들은 하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대학에서 다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이튿날 기자회견을 통해 <학원안정법>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공포한 우리 소수는 닥쳐올 박해를 예상하면서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 반대성명이 나가자 언론에서는 드디어 대학교수들이 연대하여 <학원안정법> 반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가하였다. 이같은 해석은 법안을 추진하던 민정당과 정부도, 바보가 아니라면,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17일 정부는 그것을 추진하지 않기로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아니면 우리들 몇 사람의 반대성명에 위협을 느꼈던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그 성명은 적시에 발표되어 제자들을 학원에서 추방하려던 악법의 제정을 저지하였을 뿐아니라 당시 지나치게 체제순응적이라고 지탄을 받던 대학가에 그나마 체면을 세워 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평소에 유모어와 여유를 보이던 선생이 버드나무집에서는 약간 긴장한 채 회의를 주재하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은 필요할 때는 꼭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 의연히 맞서 싸웠던 것이다. 선생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화를 위해 남긴 여러 업적 가운데에는 이 사건도 우뚝 서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이제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선생의 단편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선생의 빛나는 눈빛은 상대방의 의중을 늘 꿰뚫어보는 듯하여 나는 선생 면전에서 똑바로 대하기가 힘들었다. 곱슬한 듯한 머리칼에 사색하는 모습은 시대의 고민을 다 짊어진 듯했고, 얼굴에 늘 끼어 있는 우수는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뜻의 반영이었다. 선생의 음성은 압축된 금속성의 중후한 톤으로 또렷하였고, 어떤 모임에서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기지가 발휘되어 그 한마디로 좌중을 휘어잡곤 하였다. 학문과 비판에는 빈틈없는 논리를 갖고 있었으나, 상대방을 듣고 이해하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선생은 주장을 또렷하게 전개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의 예리함을 유모어로 감싸 부드럽게 전달하려는 편이었고, 어려운 상황은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는 용기를 보이면서도, 때로는 윗트로 반전시키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선생은 이상과 영원을 추구하면서 늘 위를 바라보았으나, 두 다리는 이 땅의 현존과 시대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기에 선생은 신학이라는, 종전의 이해에 의하면, 하늘의 학문을 이 땅의 현존 가운데 접목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복음서의 음성을 고통받고 눌려 있는 오클로스들에게 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인권과 민주를 회복토록 했으며, 그것을 남북에 나누어진 민중들에게 적용함으로 화해와 용서, 협력과 일치의 하나님의 음성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천상(天上)적, 출세간(出世間)적’ 신학을 참다운 인간학으로, 또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우리 민족의 통일화의 기초가 되는 ‘지상(地上)적, 세간(世間)적’ 학문으로 환격(換格)시켰던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학문으로만 밝히고 행동을 주저하는 선생이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결단이 요청될 때에는,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입증하는 학자였다. 선생이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든지, 여러 운동에 대표로 동참하였던 것 그리고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에 분연히 나섰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선생의 이념은 자신의 행동지표였고, 많은 따르는 자들의 이념과 행동을 교정시켜 주었다. 선생의 행동은 자신의 이념을 더욱 현실화시키고 예리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의 탄생으로 연결시켰다.
선생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신학연구소의 창설과 민중신학의 제창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계되어 있다. 선생이 ‘한국신학연구소‘라는 명칭을 어떤 구상하에서 사용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뒷날 ‘민중신학’을 탄생시키는 데에 이 연구소가 공헌한 것을 감안할 때, ‘한국에 있는 신학 연구소’라는 의미보다는 ‘한국신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의미로 이 연구소를 창립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물론 이 연구소에서 나오는 『신학사상』이라는 잡지가 ‘한국신학’의 창출이라는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해외의 신학을 소개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한국신학’을 잉태시키기 위한 풍부한 준비작업으로 이해한다. 나는 선생이 이 연구소를 창설한 핵심적인 동기가 ‘한국신학’의 수립에 있을 것이라 보고 앞으로도 이 연구소가 이 사명에 더욱 매진하기를 기대한다. 아직도 한국 교회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매우 적절한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면 선생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시작한 ‘한국신학운동’이 후학들에 의해 더욱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할 것으로 안다.
민중신학은 선생의 독자적인 작품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의, 고민을 같이 나눈 행동하는 많은 신학자들의 공동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 민중신학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특히 성서에 나타난 민중의 개념을 정립하는, 말하자면 성서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 민중신학의 성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그 점은 민중신학에서 차지해야 할 선생의 공헌이다. 민중신학의 대원칙 중에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신학적인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신학사에서 차지하는 민중신학의 위치는 누구보다 높게 평가한다. 한국 신학사상 한국의 상황을 근거로 한국인의 땀과 지식과 경험을 총체적으로 묶어 수립한 최초의 신학이 민중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학은 서책이나 강단에서 지식으로 전달되는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한다.
끝으로 선생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는 수련을 다 쌓았으면서도 끝까지 목회자 되기를 거부하고 평신도로 머물렀다. 이 점 또한 나에게 중요한 실천적인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목사가 되어 기회주의적으로 두 다리를 걸칠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학문하는 외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유혹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그 직책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목사’의 기회를 박차버렸던 것이다. 선생이 학문의 길, 그 외길만을 붙잡아 더 깊고 올곧게 자신의 신념대로 인생의 길을 살아갈 수 있었음으로, 나 같은 후학도 진한 감동으로 선생의 가신 길을 뒤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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