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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3

내가 만난 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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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재순

(한신대학교 강사)


내가 안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74년 8월이었다. 그 때 나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휩쓸려 넉 달 동안 충남 대공분실과 서대문구치소에서 고생하다가 8월 초에 석방 되었다. 며칠 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기 위해 교무과장이시던 안 선생님을 만났다. 첫눈에도 안 선생님의 강한 열정과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두툼한 얼굴과 손, 당당한 몸매, 부리부리한 눈길 그리고 곱슬머리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아직 청년 학생들과 민주인사들 200여 명이 교도소에 갇혀 있고 육영수가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정국은 뒤숭숭하고 살벌했다. 나는 충남대공분실과 서울구치소의 악몽같은 기억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기는 살아서 서울구치소에 남은 청년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의 기백을 자랑스럽게 전해드렸다. 그 때 마음이 들떠 있던 나를 안 선생님이 따뜻하게 그리고 힘있게 맞아 주시며 “공부에 전념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74년 가을학기에 학사편입한 나는 한신학생들과 교수들의 활달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끈끈한 공동체 분위기에 놀랐다. 한신 학생들은 기가 살아 있었다. 유언비어만 퍼뜨려도 징역 5년 이상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4호의 살벌한 공포 분위기에 꽁꽁 얼어붙은 침묵을 깨고, 한신 학생들이 처음으로 반정부 시위를 했다. 75년 봄학기까지 한신은 끊임없이 시위를 하며 민주화를 외치는 선봉에 섰다. 자유로운 분위기와 깊은 공동체 의식이 한신에 가득했다. 이런 자유롭고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안 선생님이 큰 기여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안 선생님은 점심을 마치고 나서는 늘 잔디밭에 나와서 잡초를 뽑으셨다. 그러면 학생들도 한데 어울려 잡초를 뽑으면서 안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한신대의 잔디밭을 지날 때 잡초를 뽑으시던 안 선생님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또 학생들과 교수들의 신앙수련회에서 몰래 김정준 학장님의 등에다 “애인 구함“이라는 종이를 붙여 놓고는 여학생들에게 “김 박사님 애인 구하신단다. 너희들 가봐라” 하시며 갖은 장난을 하셨다. 이렇게 해서 안 선생님은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 벽을 없애려고 애쓰셨다.
안 선생님의 강의 시간은 활기에 넘쳤다. 강의 내용은 명쾌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강의실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이끄셨다. 안 선생님의 강의가 이처럼 활력있고 신선한 비결은 어디 있을까? 내가 안 선생님께 강의가 활력있고 신선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안 선생님은 강의를 할 때마다 같은 제목의 강의라도 반드시 강의 노트를 새로 작성한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내용이라도 새로 쓰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안 선생님은 뛰어난 머리와 말 솜씨를 지녔지만 강의를 위해 정성을 다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강의시간이 활력차고 생동감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안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늘 유머가 넘치고 활력이 있었고, 진지하고 심각했다.
나는 지금도 안 선생님이 1975년에 1차 해직을 당하고 마지막 강의를 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학생들이 잘려 나가고 안병무, 문동환 두 교수님이 해직당했다. 활기차고 공동체적인 정으로 뭉쳤던 학교가 깨진 것이다. 그 때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수들과 학생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 아픔을 감수했다. 학기 중에 갑자기 안 선생님이 해직되어 강의를 중단하게 되자, 한 학기 강의를 압축해서 저녁시간에 1주일 간 강의를 했다. 그 때 청강생들이 몰려서 1강의실이 꽉 찼고 안 선생님의 명쾌한 열강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 들어온 지 몇 달밖에 안 되어서인지, 또 안 선생님이 담담하고 태연하게 강의를 해서인지 안 선생님의 해직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요한복음을 꿰뚫는 신학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성서신학의 깊은 세계로 빨려 들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심오한 신앙을 가졌으면서 세상의 악과 이원론적인 대결과 투쟁 속에 있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들었다. 저녁의 어둠 속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악한 세력과의 대결을 생각하며 안 선생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에 새겼다.
1980년 1월부터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의 번역실장으로 일하면서 안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예배를 통해서 성경을 한 장 읽고 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생각을 나누었다. 미리 준비한 말씀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말씀하셨다. 안 선생님의 빛나는 통찰과 마음을 꿰뚫는 말씀이 내게는 귀한 양식이 되었다. 성서에 대한 해박하고 깊은 지식과 통찰을 익힐 수 있었다. 안 선생님의 지적인 날카로움과 기민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신학연구소에서 안 선생님을 자주 뵈었지만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늘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 시절이 2차 해직이 되고 광주사태가 나고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안 선생님은 한번도 기가 꺽이거나 추레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분노하거나 유머를 즐기셨지 힘 빠진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았다.
안 선생님은 진지한 학자셨지만 결코 꽁생원은 아니었다.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엄격하셨지만 활달하게 거침없이 사셨다. 사소한 예의와 형식에 매이지 않으셨다. 안 선생님은 파격적인 유머를 즐기기도 하셨다. 언젠가 안 선생님을 따라서 모친상을 당한 박형규 목사님 댁에 문상을 간 적이 있다. 빈소에서 절도 하고 박 목사님과 인사도 나누고 응접실에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 기독청년운동과 사회선교에 힘쓰는 친구들이 여럿이 자리를 같이 했는데 갑자기 안 선생님이 박형규 목사님에게 욕설이 담긴 진한 농담을 풀어 놓고 박 목사님의 돌아가신 모친과 관련해서도 진한 농담을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지만 안 선생님이나 박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렇게 하시니까 그저 “이래도 되는가 보다”하고 듣고만 있었다.
81년 3월 하순에 서대전 경찰서 형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 수사에 협조해 달라면서 출두하라고 했다. 나는 큰 일 없으려니 생각하고 연구소에 들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전으로 친구들과 내려갔다. 그때 고생 많이 하고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대전에서 내가 관여했던 한울모임의 신앙인들이 광주사태에 분노하고 전두환을 비판하고 기독교공동체를 추구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이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했다. 지루한 재판 과정이 이어졌는데, 대전에서 첫 번째 재판할 때 안 선생님이 법정에 오셨다. 재판이 끝나고 포승줄에 묶이는 나를 안 선생임은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안 선생님의 안타까와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또렷하다.
83년 8월에 출소한 나는 대전에서 며칠 몸을 추스리다가 연구소에 들렀다. 안 선생님과 직원들이 내가 올 때까지 애찬식을 미루고 계셨다. 애찬식을 한 후 배나무집에서 안 선생님, 박영숙 선생님 그리고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마치고 나오는데 안 선생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면서 통장과 도장을 건네 주시며 “이기적으로 쓰시오!” 하셨다. 안 선생님은 독일교회의 후원으로 그 동안의 내 봉급을 그대로 적립해서 9백만 원에 이르는 돈을 마련해 주셨던 것이다. 나는 안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와 정성을 깊이 느꼈다. 84년 6월에 번역실에 근무하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나는 안 선생님이 건네 준 돈을 이기적으로 살림집 전세 얻는 데 썼다.
안 선생님은 이랬다 저랬다가 없고, 늘 분명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셨던 분이다. 높고 맑은 지성을 지니셨으면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사셨다. 안 선생님은 글씨 하나를 써도 똑똑하고 힘 있게 쓰는 분이었다. 뜨뜻미지근한 것, 흐리터분한 것을 참지 못하신 분이다. 그러면 그렇고 아니면 아니지 어중간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한마디로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
안 선생님은 일생 함 선생님과 남다른 관계를 맺었고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셨다. 함석헌 선생님도 높은 뜻을 지키며 사신 분이지만 안 선생님과는 다른 데가 있으셨다. 함석헌 선생님은 일상생활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분이 아니셨다. 그래서 누가 판단을 구하면 흔히 “글세…하신다고 해서 ‘글쎄’가 함 선생님의 별명이 되었다. 함 선생님이 말년에 병을 얻고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마침 88올림픽이 열리고 세계평화축전이 있었다. 이 때 주변의 권고로 함 선생님이 세계평화축전 행사에 참가하셔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평화를 위한 삽질을 하셨다. 일생 동안 평화를 위해 헌신하시고 평화를 사랑하신 분이니 함 선생님이 마지막 인생길에서 다 잊고 노태우와 함께 평화의 삽질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이 일에 대해서 분노하셨다. 함 선생님이 서울대 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해 계신 데도 안 선생님은 함 선생님을 찾지 않으셨다. 당시 한백교회에서 안 선생님께 함 선생님 안부를 전하면 노태우와 삽질한 일에 대해 분개하시면서도 “병원에 가 함 선생님을 뵈야 하는데 …”하셨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함 선생님을 찾아 뵙고 동양사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나는 안 선생님이 누구에게 아첨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또 누구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늘 꼿꼿하고 당당한 민주인사요 정말 대쪽같은 학자였다. 오산학교에서 거행된 함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안 선생님은 함 선생님의 약력을 보고하고 그분의 생애와 사상을 회고하셨다. 그 자리에서 첫 마디가 “나같이 하찮은 것이 어찌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였다. 나는 그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에 내가 아는 안 선생님은 결코 그렇게 말하는 분이 아니었다. 안 선생님은 자기를 구기는 분이 아니었다. “나같이 하찮은 것”이라는 한 마디에서 안 선생님은 참으로 함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셨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안 선생님은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를 굽히거든 구기지 않지만 예수 앞에서는 자기를 무너뜨리는 분이었다. 87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 나는 두 해 동안 한백교회에서 안 선생님과 예배를 함께 드렸다. 예배시간에 내가 대통령선거의 좌절과 아쉬움에 대해서 기도했다. 나의 기도를 이어서 안 선생님이 기도하셨다. 그리고 나서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은 문제가 안 된다. 다른 사람의 비판 이전에 내가 나를 더 심하게 비판하니까 … 나는 예수만 생각하면 언제나 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안 선생님은 예수 앞에서는 늘 녹아지고 예수와 하나되어 사셨다.
안 선생님에게는 삶과 믿음의 열정이 중요했고 실존적인 고백, 결단, 행동이 중요했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나 논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안 선생님 댁에서 직원 회식이 있었다. 박영숙 선생님의 훌륭한 음식 솜씨 덕에 실컷 잘 먹고 자연스럽게 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2년 반 동안 교도소에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도 있고 또 민중신학과 관련해서 안 선생님은 “예수와 나의 일치”를 강조하셨고 나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접근을 강조했던 것 같다. 내가 눈치없이 사회과학과 해석학, 신앙고백,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늘어 놓자 안 선생님은 불같이 노하셨다. 이론적인 체계는 예수와 민중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개념과 논리로 포장함으로써 자기 정당화와 자기 안주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사상체계는 예수와 민중을 추상화한다는 것이다. 안 선생은 속에서 늘 타오르는 불같은 게 있어서 “예수, 나, 민중이 하나로 꿰뚫린 삶”을 추구하셨다. 안 선생님에게는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인식과 실천이 중요했던 것 같다.
또 안 선생님은 예수와 민중을 갈라 놓는 교리나 교권을 싫어 하셨다. 교리는 그리이스 로마의 종교사상과 철학개념에서 생겨난 것이고 히브리즘과 예수운동과는 낯선 것으로 단정하셨다. 교권을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인간적인 지배욕의 표현으로 보셨다. 예수와 민중을 위해서 교리와 교권을 철저히 비판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했고 박봉랑 박사님 밑에서 칼 바르트 공부도 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신앙고백적 내용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84-5년 무렵에 안 선생님과 제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신학의 주제들을 놓고 대화와 토론을 벌였다. 그 때도 나는 교리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다 안 선생님의 노여움을 산 일이 있다. 교리는 비성서적, 비민중적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리의 기본 내용은 헬레니즘의 종교사상에서 왔다기보다는 민중의 신앙고백과 성서의 기본 흐름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고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안 선생님은 학문적으로 엄한 편이어서 빗나간다 싶으면 엄하게 책망하셨다. 그래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실 때도 있었다. 함 선생님 돌아가신 후 한백교회에서 내가 설교를 했는데 예배 마친 후 안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잘 했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또 1회 민중신학회 대중 강연회에서 서광선 박사님의 발제 ‘민중신학의 정치적 패러다임’에 대해서 논찬을 했을 때도 “잘 했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나는 이 때 샐리 맥페그의 일원적, 생태학적인 신 이해에 대해서 한국 민중의 인격적 하나님 신앙이 정치적 저항과 해방운동의 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주장이 혹시 안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뜻밖에 격려를 해 주셨던 것이다.
안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전화를 한 일이 있는데 세 살 짜리 딸이 옆에서 “아빠,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고 깜짝 놀라시면서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했는데 마침 아이가 심한 감기 끝에 중이염이 겹쳐서 오래 치료 받느라고 틈을 내지 못했다. 말년에 안 선생님을 돌보아 드렸던 조카 따님이 안 선생님이 내 딸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일러 주었는데도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못 가 뵙고 말았다. 빈소에서 조카 따님이 안 선생님이 생전에 마당의 잔디밭을 바라 보시면서 “박군의 딸이 여기서 뛰어놀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면서 눈물을 흘리기에 나는 “미뤄서는 안 되는 일도 있군요” 하고 못 가 뵌 것을 후회했다.
돌아가신 해 연초에 길이 멀어 미리 전화로 세배를 대신했는데 다행히 박봉랑 박사님 댁에 세배갔다가 민중교회 친구들을 만나 차를 얻어 타고 안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갈 수 있었다. 민중교회 사람들을 보고 신이 나고 기운이 나셨는지 밥을 함께 먹고도 한 시간 이상 열띤 이야기 마당을 펼치셨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민중신학이야기, 신약성서를 민중의 말로 풀어 옮기고 있다는 이야기로 대화가 끝날 줄을 몰랐다. 안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하신 박영숙 선생님이 오셔서 “이분들도 가셔야 한다”면서 말리셔서 겨우 이야기를 접으셨다. 저 지칠 줄 모르는 삶의 정열, 새로운 신학작업에의 몰입, 늙음과 죽음을 넘어서 인생길을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 안병무 선생님은 지금도 그렇게 밝고 힘찬 모습으로 인생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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