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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4

안병무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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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송기득

(목원대학교 교수)


1. 한산촌에서


내가 안병무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벌써 서른 해가 훨씬 지난 어느 여름이었다. 그 때 나는 목포와 가까운 곳에 ‘한산촌’이라는 결핵요양소를 차리고서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안 선생이 그곳에 온 것이다. 내가 함께 일한 여성숙 선생과는 대학생 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터여서 이 분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환자들에게, 특히 죽음의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을 이기고 ‘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말씀을 해달라는 것이 초청의 이유였다.
밤이면 환자들이 안 선생의 주위에 모여 앉아 ‘말씀’을 들었다. 환자들이 물으면 안 선생이 대답을 하는 식으로 모임이 진행되었다. 삶의 문제에서 사회, 역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제가 다양했다. 환자들 가운데는 대학생이나 대학 출신도 있어서 제법 ‘대화’가 이루어졌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이미 나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던 ‘걱정회’의 회원들이었다. 삶의 여러 가지 걱정거리 내놓고 서로 생각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삶의 걱정을 덜어보자는 것이다. 걱정회는 일명 ‘청석회’(靑石會)로 일컬어졌는데, 바위에 낀 푸른 이끼처럼 강인하게 살아간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안 선생이 있는 동안에는 푸른 이끼가 더욱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안 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글을 썼다. 『역사와 증언』이 아마 이곳에서 쓴 첫 번째의 책일 것이다. 그는 성서를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사로 이해하고 여기에 대한 증언이 곧 성서라고 말했다. 이 주제로써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내가 많이 배운 것이다. 나의 성서 이해는 거의 안 선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안 선생은 성서에 관한 한, 특히 공관서에 있어서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다. 나는 이 점을 행운아라고 여기고 있다 . 아마도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실존주의스러운 성서 풀이로부터 민중신학다운 성서 풀이에 이르기까지 나는 안 선생으로부터 큰 배움을 얻은 것이다.
내가 안 선생과 가까워진 계기가 있다. 안 선생이 독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에게 글 한편을 써 보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가?”(1967)란 주제였다. 나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객관스러운 평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글을 휴머니즘을 바닥에 깔고 조금은 부정과 비판의 자리에서 썼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현실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꼬집었다. 그는 나의 이 글에서 신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대화의 상대로 삼아 주지 않았는가 싶다. 이 대화를 통해서 그의 신학적 사고와 사상은 나의 ‘신학적 사고와 사상에 좋은 길잡이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나의 ‘신학하기’에 결정스러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안 선생이 한산촌에 왔다갔다 하면서 나는 안 선생과 ‘사람으로’ 친숙해졌다. 나의 사람다움과 신학하기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는지, 안 선생은 나를 시골구석에 묻혀 두기가 아깝다고 여겨서 한국신학대학에 강의를 열어 주었다. 과목은 철학 쪽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학문하는 쪽으로 이끌려고 했다. 목포에서 서울로 왕래하는 길이 너무 멀어서, 그리고 시간이 사흘이나 걸려서 두세 해를 다니고는 그만 두었지만, 안 선생이 나를 생각한 것은 지극했다.
이 무렵, 안 선생은 내게 독일로 유학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유학을 권한다는 것이다. 안 선생의 성격상 먼저 권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나는 며칠 뒤에 말했다. “저를 이처럼 생각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지만, 저는 이대로 결핵환자들과 더불어 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스러웠다고 느껴진다. 내가 나의 끝 삶을 대학 강당에서 교수로 보낼 줄 알았더라면, 나는 독일에라도 가서 박사 학위를 땄어야 했다. 하기야 대학에서는 “박사”가 가르친 것이 아니고 “교수”가 가르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박사과정의 훈련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 밤, 한산촌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주감이 좋아서 술을 나눈 적이 있다. 술 몇 잔에 거나해졌다. “야, 목포에 가서 한잔 더 하자.” 안 선생이 제안했다. “그럽시다.” 우리는 의기가 투합했다. ‘사라센’이란 술집에 들렀다. 술따르는 여인이 곁에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많이 마셨다. 잔뜩 취했다. 여인들이 자고 가란다. “선생님, 자고 갈까요?” 내가 물었다. “그건 안돼.” 호령이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심야의 목포 거리를 비틀거렸다. 안 선생은 연방 “정아야!”를 불러댔다. 안 선생 곁에서 술 따르던 여인의 이름이었다. 동생의 치료비가 필요하니 자고 가라던 여인이다. 그는 그녀에게서 술따르고 몸파는 ‘민중’을 본 것인가? 그가 “정아야!”를 불러댄 것은 예수처럼 그녀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한 데서 오는 회한의 절규였을까?
안 선생을 안 지 두서너 해가 지났다. 한번은 서울 집에 들렀다. 안 선생 조카되는 분이 귀띔해 주었다. 며칠 전에 안 선생은 술을 잔뜩 마시고는 책을 한 아름 안고서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갔다. 책을 쌓더니 성냥을 그어댔다. 책을 모조리 태우겠다는 것이다. “책을 태우자! 책이란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술에 취한 손이라 성냥을 제대로 긋지 못했다. 식구들이 뛰어나가 말렸다. 결국 책을 태우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으로는 이미 책을 태운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민중’이 죽어 가는데, 인간의 실존 해명이나 하는 이론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부르주아 신학, 그게 해방을 갈구하는 바닥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불트만, 틸리히, 그런 사람의 신학 곧 서구 신학이 억눌리고 짓밟히고 수탈당하는 한국의 민중들에게 도대체 어떤 뜻이 있다는 말인가?
그에게는 이 무렵 이미 ‘민중의식’이 굳혀지고 있었고, 나아가 민중신학에 대하여 발상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었던 글이 현존에 실렸던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1971.8)이란 설교였다.
안 선생은 이미 「現存」을 발간하고 있었다. 1969년 7월에 창간호를 냈다. 나는 그의 글을 정독했다. 성서와 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현존』 9호까지를 읽고 여기에 나타난 안 선생의 생각을, “철학적 실존과 신학적 현존”이라는 주제로 정리, 평가했다. 이 글이 『현존』 10-11호에 실렸는데, 안 선생에게, 그리고 허혁 박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무렵 나는 중앙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안 선생이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는데, 신학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논문으로 학점을 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안 선생이 중앙신학교를 그만 두고 한신으로 옮겼을 때 , 나도 학교를 그만 두고 말았다.
내가 한산촌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그는 방학 때를 틈타 한산촌에 자주 왔다. 환자들을 격려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다. 그가 필생의 과제로 생각했던 역사의 예수 연구는 한산촌에서 많이 다듬어졌다. 나는 어느 여름에 그의 원고를 정리한 적이 있다. 이것이 『해방자 예수』였는데, 이것은 뒤에 『갈릴래아의 예수』로 발전했다.


2. 『현존』에서


나는 한산촌에서 일하는 동안, 『현존』지에 많은 글을 썼다. 철학적 에세이는 물론, 철학과 신학 쪽의 논문을 많이 쓴 셈이다. 특히 틸리히 신학, 그의 인간론과 존재론에 대해 정리, 소개했다. 낮에는 노동하느라고 글을 주로 밤에 썼는데, 그것도 호롱불 밑에서 졸면서 쓴 것들이어서 내용이 실하지 못했다. 그런데, 안 선생이 특별히 배려해서 『현존』에 실어 준 것 같다. 나를 키워 주고 싶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바람에 나는 『현존』 독자들에게 꽤나 알려졌다.
나는 1975년 늦가을에 서울로 이사를 했다. 한산촌을 경기도 양평으로 옮기기 위해서 집을 지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나는 그 일을 돌보아 주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로 옮긴 중요한 이유는 『현존』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직함은 편집장이었다. 그러니까 1976년 4월호(70호)부터 내가 『현존』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현존』지가 폐간될 때(1980,113호)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 선생이 「3·1 구국선언사건(명동사건)」에 얽혀서 감옥에 가게 되었다(1976). 함석헌, 김대중,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 선생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선 것이다. 나는 혼자 『현존』존지를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안 선생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현존』지를 계속 내야 했고, 주간의 글을 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 선생의 설교 원고를 찾아 글로 정리해서 안 선생이 쓴 것처럼 현존에 실었다. 그 대표적인 글은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71호)이었다.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일년 동안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주간의 이름으로 글을 내보냈다. 정보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 글을 보더니, “내 생각을 많이 발전시켰어”라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거의 참석해서, “『현존』은 잘 꾸려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라는 뜻을 눈짓으로 보내곤 했다. 그는 늘 웃음으로 “수고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안 선생이 감옥에 들어간 몇 달 뒤에 부인을 통해서 내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현존』지 강단에 실렸던 글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그 책이름이 『성서적 실존』(1977)이다. 안 선생은 이 책 머리말에서 “이 글을 골라서 배열하여 책이 되기까지의 일체의 수고는 송기득 씨가 담당했는데, 도대체 그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한 장본인이다”고 적고 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투쟁에 나선 그를 이렇게라도 돕는다는 것이 내게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현존」의 일을 한다는 것 또한 내겐 여간 떳떳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현존」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안 선생을 돕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안 선생이나 서남동 선생에게서 발단한 민중신학의 메시지를 널리 알림으로써 이 땅에서 억눌리고 짓밟힌 소외계층 곧 ‘민중’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이루어지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한다면 현존의 뜻은 큰 것이다. 그리고 학문과 사상 쪽에서는 민중신학을 ‘한국신학’으로 정립하는 데, 그래서 민중신학이 마침내 세계신학으로 굳혀지는 데 「현존」은 대단한 구실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안 선생의 공헌이다. 그의 신학이 곧 민중신학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가 참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이었겠는가?
나는 「현존」을 하면서 생각한 게 있었다. 우리 나라 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바르트나 불트만의 사상을 소개하면 그것은 ‘신학’이고, 우리 나라 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면 그것은 신학이 못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70년대만 해도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신학자들의 신학을 정리·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는데, 그것의 첫 작업이 함석헌, 안병무, 서남동, 유동식의 사상과 신학이었다. 그것은 이들과의 대담을 통해서 정리한 것을 「현존」에 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안 선생의 신학은 내게 큰 관심이었다. 까닭은 그가 민중신학을 창시했다는 사실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창조로운 사고를 함으로써 독창스러운 사상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병무의 신학’을 정리, 소개하기로 하고, “안명무의 민중구원론”(1982)을 썼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두 번째 글이다. 그러나 이 보다도 네 해 전에, “역사의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1978)라는 주제로 대담한 것을 정리해서 현존에 실은 적이 있다. 안 선생의 예수론을 거의 망라한 것인데, 무려 36쪽에 달하는 긴 글 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가 주최한 민중신학 세미나에 참석해서 “민중신학의 정체”를 발표했는데(1988), 이 글은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신학에 바탕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안병무 민중신학의 ‘전도사’의 구실을 한 셈이다.
「현존」은 1980년에 전두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창작과 비평」, 「씨알의 소리」와 함께 폐간당했다. 113호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다섯 해 동안 「현존」을 통해서 안 선생을 도운 것이다. 내가 『현존』 일을 그만 두면서 저절로 안 선생과의 만남도 뜸해졌다. 때마침 나는 한산촌의 일에서 손을 떼고 밥벌이를 위해서 여기저기 뛰느라고 몹시 바빴다. 밥벌이라야 대학강사가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한산촌을 그만둔 데는 안 선생과의 의견 차이가 그 주요 원인이었다. 안 선생은 한산촌을 ‘수녀원’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졌고 나는 그냥 오갈 데 없는 결핵환자의 보금자리로 남게 하려고 했다. 결국 한산촌은 안 선생의 뜻을 좇았고 나는 한산촌을 떠났다.
그 뒤 안 선생은 내가 한신대학에서 전임으로 강의할 수 있도록 애를 많이 썼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안 선생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도 문제는 있었다. 우선 나는 ‘박사’가 아니지 않는가?


3. 대학 강당에서


내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오면서 안 선생과의 교류는 뜸해졌지만, 신학자인 안병무와는 더욱 가까워졌다. 목원대학 신학과 교수로 초청되면서 신학강의를 하게 되었는데(1985), 내가 이곳에서 창설한 과목 가운데 「한국신학」(학부)과 「민중신학연구」(대학원)가 있다. 「한국신학」이란 과목에서는 주로 민중신학을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학부에서나, 대학원에서 민중신학을 강의하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강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학부에서 「예수론」을 강의하면서, 안 선생의 『갈릴래아의 예수』를 교재로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자주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목원대학 신학과 학생치고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접촉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대학원에서 열리고 있는 「민중신학연구」에서는 안 선생의 『민중신학이야기』를 텍스트로 삼아 읽힌다. 그래서인지 석사과정에서 민중신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다루는 학생이 더러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소개하기 위해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최근동향”이라는 긴 논문을 썼다(1988). 그의 『민중신학 이야기」 안에 있는 내용을 정리, 소개하면서 논평한 글이다. 그는 이 책에서 비록 대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성서, 예수, 하느님, 교회, 죄, 성령,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민중신학의 골격을 갖춘 것이다. 그의 논문은 아직도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민중신학이 완전한 체계를 갖추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민중신학의 체계화는 나와 같은 그의 후학들의 몫이다.
나는 신학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빚진 바가 많다. 특히 ‘역사의 예수’를 이해하는 데 그가 제시한 자료는 거의 절대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는 더욱 그렇다. 내가 최근에 쓴 논문, 곧 “예수,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1995)와 “민중 메시아론”(1996)은 그의 예수론에 바탕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예수론을 내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안 선생에게 진 빚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민중신학을 강의함으로써 신학교수의 구실에 보다 충실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민중신학은 내 신학 강의에 생동성을 주었으며, 학생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준게 사실이다. 민중신학을 강의할 때는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을 강의할 때보다도 학생들이 내게 감사하면서 “도전적 강의”라고 호응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서도 안 선생에게 제일 고마워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민중신학을 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민중신학, 그것이야말로 나는 ‘참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따르는 최선의 길이라는 데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민중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을 모색한다는 뜻에서 더욱 그렇다. 민중이 예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민중을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진짜 신학에 내가 참여한 것이다. 민중해방을 추동한 예수를 몰랐다면, 아마도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떠났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길을 안병무 선생이 가리켜 준 것이다.
안병무 선생과의 만남, 한산촌에서, 『현존』에서 그리고 대학강단에서 이루어진 안병무 선생과의 만남, 그것은 내 신학하는 길에서 오랫동안 보람과 긍지와 고마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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