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와 같은 민중의 강인함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수난 속에서 서러움과 한을 지니면서도 꼿꼿이 일어서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울까요?
조금 차원이 다른지는 몰라도, 요즈음 저는 생명력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요. 민중이라는 것은 참 생명이다, 그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권력이나 재산이나 지위와 같은 '가진 것'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다 떼어버리고 나면 죽어 버리고 말아요. 민중은 외적인 장식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요.
민중은 생명운동을 위해 제 문제를 제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요. 민중은 '가진 것'으로 해결하지 않아요. 자본으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으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삶 자체로 밀고 나간단 말이지요. 함석헌 선생님께서 '씨알'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는 데, 저는 요즈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씨알'이라는 말을 '생명'이라는 말로 바꾸면 어떻겠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함 선생님은 '순수생명', '맨 사람'이라는 말도 사용했는데, 생명은 그야말로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 생명의 근원이 민중이라고 봐요. 그토록 짓눌러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민중,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겉으로는 체념하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강렬하게 자기의 삶을 이끌어나가고 개척해나가는 민중, 민중 아닌 것들은 다 항복하고 스스로를 팔아먹어 죽어 없어지거나 겨우 연명하지만 민중은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제힘으로 살아가는 훈련이 되어 있거 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민중이 아닌 것은 결국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가진 것'에 의해 살아가는 허상에 불과해요. 반면에 민중은 생명 자체, 때묻지 않은 생명 자체이지요. 약을 먹지 않고 건강을 지켜 온 사람처럼, 수난이 오면 울수록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자꾸 커지고 자활하는 능력이 생기는, 바로 그것이 민중이라는 생각이 요즈음 자꾸 들어요. 함 선생님은 그것을 '씨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민중이 자꾸 도전을 받으며 이에 투쟁하면서 민중성을 실현한다는 바로 그 점을 함 선생님은 별로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 방금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나왔는데요, 선생님은 '생명'과 '민중'을 서로 직결시키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에 대응하고 투쟁하면서 실현되는 '민중성'을 양자의 매 개념으로 설정하셨습니다. '민중성'이라는 말은 선생님께서 최초로 사용한 개념 같습니다. '민중'과 '생명', '민중성'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글쎄, 아직 발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건네 주는 이야기들이지만…… 그저 예화 정도로 들어 줘도 좋겠어요. 창세기를 보면, 선악과와 생명나무 이야기가 있잖아 요?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지요. 물론 생명나무를 따먹지 말라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지혜의 열매를 따먹은 겁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어쨌든 허락이 된 거예요.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을 인간의 자율에 말겼단 말예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경우가 달랐어요. 하느님은 인간이 생명 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결사적으로 막았어요. 생명나무까지 따먹으면 인간은 영원히 살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과 똑같이 되니까, 생명 나무에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불칼로 가로막았던 거예요. 결국 인간은 생명나무에는 손을 못 댄 것이지요. 저는 오랜 옛날 사람들이 어떤 원초적인 경험을 그렇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요.
생명나무 이야기는 성서를 종으로 흐르며 나오지요. 잠언에도 많이 나오고, 묵시록에도 한 번 나온단 말이에요. '생명'과 예수를 연결시킨 것은 요한복음이에요. 마르코복음은 민중과 더불어 움직이는 예수를 현상적으로 기술했고, 따라서 민중의 본질을 마르코복음으로부터 밝히기는 어렵게 되어 있어요. 아무튼 마르코복음이 역사지평에서 움직이는 예수를 주로 그렸다면 요한은 그것을 넘어서려고 고민한 것 같아요. 민중이 뭐냐, 그 뿌리가 뭐냐는 물음에 대해 요한이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한 것 같아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말도 있지만, '생명의 물', '생명의 밥' 등 '생명'과 관련시켜 예수를 말하는 대목이 요한복음에는 많이 있지요. 요한은 이런 식으로 예수의 뿌리를 밝히려고 노력한 것이지요. 결국 예수는 생명이다, 따라서 예수는 죽었다가도 죽지 않고 살았다,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다른 말로 하면, 죽지 않는 게 생명이라는 거죠. 죽었다는 것은 현상적인 것이고, 생명은 실제로 죽지 않는 것이지요. 죽지 않는 것, 그리고 못죽이는 것, 바로 그것이 생명이지요.
에제키엘서를 우연히 읽다가, 37장을 주목하게 되었어요. 37장은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뼈가 모이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생겨 생체는 형성되었지만, 아직 생명은 없어요. 그래서 "루아하야, 불어라" 하고 외치자, 루아하가 생체와 접촉을 해서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과정이 막연한 게 아니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되었다는 겁니다. 그 생명들은 군대를 이루어 자기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여기서 '루아하'는 '생명'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역사에 적용해보고 싶어요. 역사의 표면에는 피상적이고 필요 없는 것, 죽은 것, 썩은 것이 깔려 있는데, 그렇게 보면 역사는 죽은 것 같단 말이지요. 그 역사가 생명과 부딪치면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 생명을 '민중'이라고 봅니다. 에제키엘 이 본 것처럼, 민중이 살아 움직이면 다 죽은 것 같은 것들이 산 것이 되어 목적의식을 가진 민족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민중은 결국 성서에서 말하는 '루아하', '프뉴마'에 해당하고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기'(氣)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움직여서 작동하지 않는 한은 제대로 된 민족이 생기지 못하고, 어떤 목적을 갖는 공동체적인 생명체가 탄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생명의 특징은 계속 도전을 받고 이 도전에 대항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에요, 민중이 루아하의 역할을 하듯이, 민중성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민족이라는 것에서도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지, 그 이전에는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 한국 민중은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민중성을 풍부하게 갖게 되었어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한국 민중은 가난과 수난 속에서도 도전을 많이 받았고 심지어 죽음과도 같은 도전을 받으며 점점 강인해졌기 때문에, 민중은 한국민족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지위를 갖게 된 것이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중은 민족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