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도가 위에서 해석한 것과 같은 뜻이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의 기도이지 가진 자의 기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민중이 이런 기도를 거듭했으면 저들은 가난한 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밥술이나 장만한 사람, 직장이 보장된 사람들은 이 기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사실 일 년, 아니 일생 먹을 것을 쌓아놓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기도를 어떻게 반복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어떤 형태로든 나름대로 이 기도를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해석이든지 그것이 자신의 소유를 합리화하고 거기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 기도의 왜곡이다.
이 기도의 바른 해석에는 다음 사실이 절대조건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날 그날 먹을 것을 달라는가난한 자들과 연대함으로써 그 가난의 문제에 동참하게 하는 그런 기도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라고 오래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는 배부른 경험을 하고 있는 자이다. 그 만끽상태가 얼마나타락한 인간상인가를 체험했을 것이다. 아마 배를 가득 채우고 누워 곤히 코를 고는 돼지에게서 자신을 보았을 수 있다. 실컷 먹고 밥상을 물리고서 트림을 유별나게 하면서 평양감사 부럽지 않다고 하는 순간의 그 사람에게서 구역질을 느꼈을 수 있다. 배고픈 자가 가득한 세상에 만끽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만족해하는 자가 옳은 사람 일까? 세상이 문제투성이인데 자신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배를 하느님으로 삼고 있는 사람' 아닌가?
내게 일용할 배고픔을 달라는 것은 '너'의 고뇌, '너'의 결핍을 나누어 갖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가로막는, 가진 것을 버리게 해 달라는 기도일 수 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권했듯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이해할 수 없고 '너'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리움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자기 만족 속에서 죽어가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기도일 수 있다. 이 기도는 그러므로 배고픈 사람과 연대관계를 갖고 싶다는 소원의 표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아 있다"고 선언했다. "지금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분명히 편파적인 선언이다. 루가는 여기에다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가 있다"는 말을 대비시킴으로써 그 편파성을 더 뚜렷이하고 있다(루가 5, 24~26)이 가난하고 굶주린 자는 바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공동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마태오는 "마음에 있어서"(영에 있어서)라는 말과 "의를 향해서"라는 단서를 붙였다(마태 5, 3~6). 이로써 그는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영에 있어서 가난함은 물질적 가난과 다른 것이나 가난하다는 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지는 않으나 의를 향해서 주림으로 만끽한 자와 배고픈 자의 만남이 아니라, 무엇엔가 결핍 되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상태에서 연계될 수 있다. 영에 있어서 가난하라는 말은 쉽게 추상적인 도피처를 제공할 수 있기도 하나 오히려 그에게 더 어려운 주문이 될 수도 있다. 가지면서도 가지지 않은 듯이, 가졌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지속, 가졌으나 그것 때문에 가지지 않은 자를 향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을 가져야하는 그런 상태에 있으라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의 입장보다 훨씬 고뇌스럽다.
의를 향해 주리고 목마른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나(우리)의 배고픈 문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부조리, 불공 정한 분배구조 때문에 생산한 자가 살 길이 막히는 세상에 대한 진정한 분노를 갖게 되며, 마침내 그런 옳지 않은 세상을 바꿔놓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리라.
배부름은 우리를 타락하게 한다. 남아도는 시간은 우리를 썩게 한다. 초가 자신을 태우는 한 초의 생명인 빛을 발하듯, 사람은 자신을 넘어서 '너'를 위해 (애)태움으로 '나'로서 살 수 있다. 내게 먹을 것이 있어 배고프지 않고,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 참여할 수 없다면 그는 먹으면서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우리)에게 배고픔을 주소서. 너의 배고픔이 나의 배고픔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만끽해서 오는 비대함에서 풀려나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너'와 연대하여 진정한 '우리'로 살게 하소서.
■ 『살림』 1989년 5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