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反) 두 나라설
우리는 더 이상 이원적인 서구 신학의 사고의 틀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국가, 영과 육, 인간사와 구속사의 이원적인 분리는 헬레니즘적인 사고의 유산이지 히브리 성서에는 낯선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주의는 일면 분석적 해석학의 전통을 밟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권력욕과 관심을 관철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루터의 두 나라설은 종교귀 족들의 타락한 권력욕을 방지하려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뒷받침하는 봉건주들과의 정치적 협상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두 나라설 전통의 희생자일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정치는 인간의 삶 전체 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제3세계에서 그러합니다.
두 나라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로 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마르 12, 17; 마태 22, 21; 루가 20, 25)라는 말과 바울로의 권력에 복종하라는 권고가 담긴 로마서 13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로 된 그것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의 가부를 물은 데 대한 반응으로서 강조점은 후자, 즉 물음과 상관없는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라는 데 있다고 보며, 로마서 13장은 권리의 근원을 밝히고 그것의 오용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