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였으며, 어디까지 왔는가? 민중신학은 민중을 객체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으키는 민중사건에 대한 체험을 언어화하여 증언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민중신학이냐고, 그것은 민중사건을 증언하되 신학적 논리와 언어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여기 민중사건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 신학이론 또는 언어가 있는 것을 서로 접목하자는 것이냐, 아니면 민중사건을 신학의 세계로 흡수해버리자는 것이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자체의 유산이 있다. 그 유산 가운데는 하느님, 교회, 그리스도 등과 같은 커다란 주제들이 있다. 그런데 그원천은 '성서'라는 책이다. 물론 성서라는 책 한권이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제들은 성서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즉 그것들은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집단이 그러한 주제들을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체현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사건으로 증언, 고백해 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바로 성서이다. 성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종족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것이다. 그런데 이 특수가 보편과 통한다. 그것은 유다 종족에 국한되어 있고, 이미 히브리화한 그런 주제들이 전인류의 것으로 확산된 데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로마제국을 정복한 그리스도교는 그와 더불어 변질되었다. 일약 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강자의 이데올로기화했는데, 그 언어는 그레꼬 로마의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변질 되었는지는, 무수한 노예를 부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형제사랑을 말할 수 있고, 약탈과 도살의 목적으로 십자군을 일으키고, 무자비한 폭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의 이름을 거리낌없이 들먹일 수 있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강자의 이데올로기화한 신학이 부리는 마술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바로 이러한 신학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해석하도록 강요받아 온 것이다. 한국의 교회를 지배한 신학은 이같은 유산을 갖는 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