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왔나?"
"무엇이 우리 역사의 맥(脈)인가?"
이런 물음은 한국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현장에서 힘없이 망연(范然)해질 때에 언제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비명 같은 것이다. '역사의 주체요 담지자는 민중이다'라는 고백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래이다.
우리의 역사를 왕실을 싸고돈 지도층이 이끌어왔다면 이 민족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 됐으리라. 중국 대륙에서 기침만 하면 감기를 앓고, 손짓 한 번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가져다 바치고, 침묵을 하면 찾아가 무릎 꿇고 손을 모아 처분만 기다렸으며, 그곳의 세력권이 바뀔 때마다 저들의 옷을 갈아입고 제도를 바꾸고 자기 말과 글마저도 외면하고 저들이 준 말을 재빨리 갈아타고 재빨리 움직이며 아부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유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들에게서 우리 역사가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 땅을 자기 집 문턱처럼 넘나 들던 자들에게 이미 동화됐지 이날까지 자기 것을 고집하며 남아났을 까닭이 없다.
'민중이 언제 역사상 주체가 된 일이 있느냐'라고 정면으로 대드는 글을 본다. 그러나 이런 알맹이 없는 질문에 반응해야 할 의무는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반론자도 대답을 가지지 못한 회의론자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의 담지자를 일컬어 민중이라고 한다면, '민중이 누구냐?'고 물을 수는 있어도 '그들이 언제 역사의 담지자였느냐?'고 묻지는 못할 것이다. 왕실을 싸고돈 정상배들 또는 양반계급이나 군인들이 우리 역사의 담지자였다고는 못할 것이다. 결국 이런 질문은 역사의 담지자와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것과를 일치시키는 우매함에서 나온 것이다.
민중이 역사의 담지자라고 선언했으나 민중에 대한 정의는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개념에 대한 정의없이 어떻게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느냐는 다그침도 있었으나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 개념이란 어떤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틀인데, 그것을 앞세우면 개념 싸움 때문에 그것이 말하려는 실체에는 접근도 못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며, 설사 그럴싸한 개념이 설정된다고 해도 그 개념이 실체를 박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민중이란 집단체이다. 그것은 산 실체이다. 그러므로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
민중은 관조의 대상일 수 없다. 민중은 구경꾼에게는 언제나 가리어져 있다. 민중은 민중사건에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그 실상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내가 여기저기서 만난 민중사건을 증언한 것이다. 나는 정치적 폭거 밑에 짓밟히는 자의 편에서 인권을 생각하다가 민중을 만났다. 그리고 권력의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되었다. '민족ᆞ민중ᆞ교회'는 우리 역사와 민중운동 사이에 힘줄이 생기고 혈맥이 통하더니 마침내 시체가 거대한 실체로 살아나는 경험을 말한, 민중신학을 공개한 첫 강연이다. 이 강연은 감옥에서 막 출소한 동료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한 것으로 5천여 명이 운집했는데, 약속된 교회의 본관문은 강권자에 의해 잠겨지고 200명도 수용할 수 없는 교육관에 일부가 들어와 앉고 그외의 사람들은 모두 마당에서 마이크를 통해 듣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마다 수백 명의 감시자의 눈이 매섭게 돌고 있었다. 나는 이 현장에서 민중의 실체를 발견했다.
고문당하다가 이제 시체가 되어 관 속에 넣어진 채 그대로 매장터로 달리는 길을 가족과 동료들이 몸으로 막고 아옹다옹 싸우는 현장에서 세상 죄를 지고 죽음에로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았다. 그에게 참여하여 맨주먹으로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절규하는 저들에게서 나는 꼭 같이 그 양을 보았다. 그 양은 바로 고난의 역사의 한복판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는 예수를 가리킨다. 나의 이 증언은 자기 제자들에게 고백한 세례자 요한의 민중 발견의 증언이다.
이 글들은 하나하나 우리 역사의 피어린 배경을 갖고 있다. 재주도 없는데다가 당시의 언론탄압에 위축되어 정곡을 피하는 어눌한 표현 이 너무나 많다. 나는 이 글들을 정리하면서 그때 전개되었던 삼엄한 공포 분위기와 이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내대던 민중의 투쟁 현장을 영상으로 보듯 되살리면서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그 처절한 현실 앞에 이 따위 죽은 글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이 글 사이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민중의 산 모습이 얼마나 엿보여질 지……!
1992년 가을
안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