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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때, 한국 민족은 부패와 무능으로 몰락 전야에 있는 왕정(王政)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민중은 일본인들에 대한 민족감정으로 팽만해 있었기 때문에 이 민족의 대리행위를 해 온 이왕가(李王家)의 몰락에 대해 분개한 것은 사실이나, 왕조 자체가 망하는 일에는 오히려 개가를 불러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것에게 마냥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고혈을 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서구의 세력을 후광으로 하여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저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민중에게 가을 숲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초기 선교사들도 저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의식했다. 네비우스의 선교정책론이나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결정은 이 사실을 반영한다.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민중들이었다. 그러므로 엘리트주의자들인 도산(島山)과 춘원(春園) 등이 교회에 모인 민중을 혹평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우매무식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31절 봉기에 체포된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보면 반수 이상이 문맹이다(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무교육이 31.4퍼센트, 가정 또는 서당 교육이 19.2퍼센트이다. 직업별로 보면 학생 10퍼센트를 뺀 나머지는 농부 아니면 모두 천직 또는 무직자들이다). 교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계층이었던 것이다.

저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너무도 낯선 것이었으리라. 그들이 선교사들의 설교에 매혹되었을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교회로 모였다. 그것은 이론으로 설복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통해서 막연하게나마 짐작되는 새 세계(서구는 전에는 모르던 새 세계이다)를 감지하고 거기에서 올 새 가능성에 희망을 건 데 기인했을 것이다. 이것은 계층적인 한을 풀려는 염원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른바 '좋은 세상' 이 오기를 바라는 열망의 발로였다. '좋은 세상'이란 따지고 보면 민족적, 사회적 열망이었다. 침략한 일인들, 그 앞에 무능한 썩은 정부 밑에서 시달려야 했던 민중이기에 그들은 그렇지 않은 자주적 정부, 그리고 저들같이 민중을 학대하지 않고 '쌀밥에 닭고기'를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럴때만 비로소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 선교사들이 전한 그리스도교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당 갑니다"로 요약되었는데, 이것은 아직도 보수계에 그대로 유효한 그리스도교회로의 초대장 내용이다. 그 민중의 염원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저들은 '옳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렸지 '천당'에 가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저들의 한은 이 땅에서 유린당한 염원이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기에 저들의 염원은 「심청전」에서의 심청의 부활 이야기, 「춘향전」에서 출세한 이도령의 부패관리 숙청과 그 밑에서 고난당한 춘향이의 행복으로 집약되었으며, 그런 이야기는 민중의 공감을 사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의 그리스도교회는 천당으로의 초대장만 남발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정책으로 하여 계속 강조했는 데, 그 배후에는 국제정치적 음모가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몰려든 민중은 그런 것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저들은 주어진 때와 장소를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저들에게 가르쳐지는 교리적 내용에 대해서 그들의 입과 속마음은 다르게 움직였다. 그것이 31 봉기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다. 저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말로 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거부했다. 아니 그것이 저들의 실존적 자기표현이었던 것이다. "만세!" "만세!" 이 외마디 소리가 바로 당시의 민중언어를 집약한 것이다. 저들에게는 31 독립선언서나 재일 한국 유학생의 독립선언서도 별 의미가 없었다. 단지 목이 터져라고 부르짖는 "만세! 만세! 만세!"로 족했다.

그러나 일인들은 더욱 잔인하고 교활하게 대응했다. 한국의 지주층 그리고 선교사들까지 협박과 유혹으로 동조시키면서 '체념'이라는 죽음의 병으로 민중을 몰아넣었다. 체념에서 출발한 전도자들에게 알맞은 말은 점령세력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역사화, 초현실화의 언어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한국 교회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이른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외세인 일인들의 착취행위를 돕는 것이 되었고, 이 사실을 안 총독부는 전국적으로 계속 모이는 수백 수천의 집회를 허용한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많이 모이는 집회에 아무런 사찰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와 같이 극히 단순화한 도그마는 계속 교회로 모인 민중을 세뇌하여 그들의 언어가 된 것이다. 우선 이러한 언어는 그리스도교가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불교가 닦아놓은 터전 속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배척당한 불교는 산으로 숨어버리는 대신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의 '체념적 언어'를 만들었다. 그중의 하나가 '천 당'이라는 말인데, '천당'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왔다. 성서에는 그와 비슷한 말도 없다. 세상의 무상을 노래함으로써 탈세속, 비역사화의 설법을 거듭한 것도 통속화된 불교의 '업적'이다. 이렇게 민중의 '체념적 언어'를 그리스도교는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 질수 있었다.

그 속에 담은 메시지에 대한 시비는 불문에 부치고,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보면 민중언어인 민담형식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민담은 무수하며, 전해지는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불교적인 요소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볼 것이다. 그만큼 불교가 상류층에서 백안시되는 대신 민중 속으로 파고든 것은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민중의 전이해(前理解)의 역할을 했다. 이에 못지않게 우리 민중에게 영향을 준 것은 샤머니즘이다. 무당의 언어는 민중의 언어이다. 그들은 '사설'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민중이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내용이다. 무당은 이런 말로써 가슴에 사무쳐 풀지 못한 민중의 한을 풀어준다. 그 방법은 억울한 자의 혼을 등에 업고 산 사람의 억울함을 토로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는 모두 소극적인 방법으로 민중을 달래거나 삶의 현실을 상대화하는 역할을 했으나, 그 언어 만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중언어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한국의 보수계 목사, 특히 부흥사들의 설교나 오늘날 양적 팽창을 자랑하는 새 종파의 설교를 보면 불교나 무교(巫敎)의 언어 선택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설교의 특징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중심으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화나 경험담 등으로 엮어나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활 주변의 이야기로서 민중을 실감나게 하는 언어이다. 그 내용은 두 가지 모순된 내용을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 듯이 뒤섞는다. 하나는 피안적 위로다. 그것은 탈세속, 무상의 불교적 모티프이다. 그 반면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헌금 따위를 잘 내면 화를 면하게 되고 출세하게 되고 부요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무교의 유산이다.

사람들은 저들의 설교에 신학적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민중을 매혹시키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여기에 대해 한편에서는 '성령의 역사'라고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신학적으로 보아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냉소한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된 입장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 현상은 사회심리학적 대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민중언어를 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의 교회 형성과 발전에는 이러한 민중언어를 구사하는 전도자들 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근본주의신학이 한국 교회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찰이다. 문서적 역사에서는 그랬는지 모르나 교회로 모인 민중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위와 같은 전도자들의 설교를 보면 절대로 보수적인 것도 근본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저들은 불교, 무교 그리고 유교의 윤리 등으로 마구 넘나든다. 복음을 강조 하기 위해 '순복음'이란 말까지 나오고, 성서중심임을 강조하기 위해 '성서……교회'라고까지 하지만 설교 내용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야말로 계속 '사설'을 내리엮는 것이다. 그 내용은 민중이 원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 점에서는 반성할 것이 많다. 그러나 이런 조류를 탄 교회의 양적인 비대가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승리라고 보면 그것은 너무도 피상적인 관찰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저들이 이끄는 언어가 본래의 민중의 염원에 호응하는 것이며 저들의 본래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보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그 언어는 체념을 바탕으로 한 방향에서 형성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형수도 체념을 해버리면 웃을 수 있다. 체념이라는 이 병에서 구해내지 않는 한 현재로는 위로를 줄지는 몰라도 결국은 마취된 상태에서 죽음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은 역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무교에서 죽은 혼이 다른 사람에게 접해서 소생했다는 것의 중요한 차이는 그 하나(후자)가 체념을 전제한 한풀이요, 다른 하나는 체념이라는 죽음의 병에서의 탈출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내의 민중언어를 쓰는 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민중을 의식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한국의 신학은 별로 호소력이 없었으며, 한국 교회 발전에 주역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신학작업은 민중과 완전 유리된 서구적 사고와 논리였기에 적어도 그리스도 인의 삶이나교회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이 점은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에서는 신학은 매우 활발했으나 그와 반비례해서 교회는 점점 비어만 갔다. 가까운 일본은, 우리와 비교할 때 신학이 주도하는 그리스도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끝내 민중 속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우리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도 그리스도인 수는 훨씬 적고, 농촌 등에는 거의 뿌리박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민중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민중을 비역사화하고 피안으로의 도피만을 유일한 구원의 길처럼 이끌어 움으로써 민족공동체와 그 운명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게토화 된 민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치경제적으로 볼 때에도 민중은 같은 민중이지만 교회 안의 민중은 교회 밖의 민중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민중이 되었다. 이런 역사가 길어질수록 교회 안의 언어는 저희끼리만 잘 통하는 것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회 언어는 민중언어이지만 특수집단의 언어가 되어 민중공동체와는 유리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1920년에서 30년 사이에 한국 땅에 마르크시즘의 바람이 불어오고, 또 한편 일본통치의 영구화를 꾀해 곳곳에 신사(神社)라는 우상이 세워질 때에도 저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역사의 추세에 대한 감각이 무디었던 것이다. 해방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회내의 설교는 여전히 피안적이었다. 그러므로 새 역사의 장을 여는 마당에 교회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모여들었던 젊은이들은 '교회의 민중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실망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이런 긴 잠의 기간이 419라는 큰 사건을 거치고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비역사적이 되어버렸으며, 또 비판정신은 무디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마당에 저들은 정부에게 이용은 당해도 비판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전통 교회는 그 나름의 민중언어를 사용했다. 이른바 '아녀자'들이 알기 쉽고 동감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 언어를 썼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교회를 고수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 교회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전통 교회의 민중언어에 대해 신학적 언어로 맞섰던 것이다. 그 언어는 거의 직수입한 서구 신학의 언어로서 그 선봉에 선 극소수도, 그렇다고 이른바 신학자들도 잘 소화하지 못한 언어이다. 설교자들은 4년 이상 이런 신학 훈련을 받고 현장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저들은 교회 회중의 언어와 자기가 배운 신학언어의 차이에 당황한다. 이런 딜레마에서 절충되어나은 언어가 지적인 냄새가 나는 에세이 같은 언어로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바르트가 어떻게, 불트만이 어떻게 해보다가 결국 그런대로 낙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언어는 지식층에게도 의미없고 더욱이 민중에게(교회내)는 전혀 '은혜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 밖의 민중언어는 물론 아니다. 여기에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교회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중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실패를 거듭해 온 이른바 진보적 교회계통이 낡은 언어로 급진하되 한술 더 뜨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신학에 대한 거부반응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런 반작용은 결과적으로 자기상실이요, 또 백번 노력해 봐야 지금까지 보수적 민중언어를 구사해 온 계열을 따라갈 수 없고, 따라간다고 해도 빠른 시일 안에 민중의 참 염원을 배반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새 시대를 책임질 교회의 언어는 게토화된 교회내의 민중언어권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은 민중공동체에서 볼 때 이미 그것에서 끊어진 언어이기 때문이다. 까닭은 그것이 비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길은 이른바 신학적 언어 채택이 결코 아니다. 아니! 민중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민중언어는 이야기체이다. 그것은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개념적, 논리적인 사변의 언어는 생존을 위해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인 민중에게는 상관없는 기표(記表)이다. 노동판에서, 논두링에서, 동대문 시장에서 그리고 옥중에서 어떤 종류의 말을 쓰는지 귀를 기울여보면 목사들의 설교용어가 얼마나 이방어적(異邦語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말 교회가 확대되기를 원하는가? 정말 사람을 되도록 많이 낚는 어부가 되고 싶은가? 좋다. 그러면 고기가 많은 저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야 한다. 그곳은 바로 민중이 사는 세계요, 그 그물은 바로 그 둘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여야 한다.

그러면 그런 민중언어를 어떻게 배울 것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과 살아보는 길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 이상의 방법은 모른다. 단지 구체적인 방향으로 다시 예수의 언어를 제시한다. 예수의 언어, 특히 그의 비유는 참 민중언어의 전형이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 안에서, 그렇다고 신학대학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민중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서 저절로 생겨난 언어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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