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사람이란 언제나 무엇을 인식할 때에는 구상화(具像化)를 한다. 가령 처음 만나서 불과 몇 가지밖에 못 보고 못 느꼈는데도 그런 몇 가지 요소로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상을 만든다. 독일어의 '아인빌둥'(Einbildung)은 '상상'이란 뜻으로서, 실상과는 거리가 있으나 하여간 상을 만든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첫인상이니 무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하찮은 근거에서 세운 상을 깨는 데는 의외로 많은 시간과 다른 실증(實證)이 필요하다. 가령 목소리, 눈매, 억양, 또는 걸음걸이 따위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 거기에다 그의 고향 또는 출신학교, 전공 정도쯤까지 더 알게 되었다면 그런 것을 종합해 그의 인간성을 판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남의 눈을 조심하게 되는데, 그 남의 눈이란 것이 의외로 피상적임을 간파하지 못하면, 외적 매너랄지 거울을 자주 마주하는 것같은 소갈머리 없는 외식(外飾)에만 매달리는 자기가 되고 만다. 그따 위의 일반 평가에 부심하다가는 제 볼 일 볼 새 없다. 그 따위로 평가하는 눈들은 멸시해버려도 된다. 오히려 그런 평가를 재빨리 다시 평가해버려서 그 와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실리적이다. 그런 평가들은 실제로 과녁을 찾지도 못했고,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해치거나, 또 돕는다고 말해도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일류나 최고급품 따위만 찾는 버릇은 대부분 이 따위 것 때문에 걸린 병인 것이다.
이같은 병이 걸렸던 20대에 나는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해방을 맞았다.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던 그에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코르사르(Korsar)사건'이다. 『코르사르』는 그때 코펜하겐에서 발간되던 주간신문으로 풍자와 악의로 남을 괴롭힘으로써 한몫 보는 악덕 신문이었다. 그런데 이 신문이 어떤 계기로 키에르케고르를 비난하는 데 열을 울려 거의 매주마다 키에르케고르의 희화(戱畫)를 게재하고, 그의 저서와 사생활을 조소하고 폭로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분연히 대항했다.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는 대중은 그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관객적(觀客的) 흥미에 들떠서 양쪽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사회라는 것에 눈을 떴으나 곧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눈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려버렸다. 그때 쓴글이 「현대의 비판」인데, 그 논술의 초점은 바로 대중에 대한 비판이었다. 여기서 그는 무엇아나 새것 또는 싼 것을 그대로 소화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비창조적인 것을 '대중성'이라고 해부했는데, 결론은 '대중은 허위이다'라는 것이다. 저들은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거듭하는 호소마저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이해를 기대할 수 없는 무리라는 것이다.
나는 대중성에 이러한 일면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대중의 눈에 비친 나'에 고민하는 정도의 '나'에 해당하는 범위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본다. 하여간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과감한 결론으로 인해 '남'이야 어떻게 보든 내 소신과 양심에 족하면 된다는 자리에나 자신을 정착시키는 것은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런 결단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나!'라는 우리의 속담으로 잘 표현된다고 생각된다. 그럼 정말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되는가? 내 양심에 떳떳하면 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남이야 어쩌든'이란 말을 할 수 있는가?
내 양심상 떳떳하다고 해서 양심을 최후의 교두보처럼 내세우나 그것은 상대적이다. 양심이란 '더불어 안다'라는 유럽 고어(古語)의 원뜻에서 보듯 어떤 것과 자신을 관련시키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기존질서 또는 지배하는가치관을 전제로 할 때, 나는 양심상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하는 경우, 나는 법이나 현존윤리가 인정하는 것을 침해하지 않았으며 의무를 완수했다는 뜻이 되리라. 그러나 기존질서 자체가 바로 비인간적이고 오늘의 가치관이 집권자의 불의한 욕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확실한 경우에는 오히려 위에서 말하는 양심에 안주하는 것은 실은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할 수 없는 비겁함을 정당화하는 악덕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둑질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술취한 놈이 자동차 핸들을 잡고 거리를 질주하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있는 현장에서 난 저렇지 않으니 부끄러울 게 없다고 떳떳할 수 있을까? 단순히 힘없다는 이유로 인권이 유린되고 자본주의 횡포 앞에 자기가 일한 대가를 못 받고 배를 꿇고 있는 현장에서 나는 그런 기업주가 아니니 양심에 부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