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의 죄인'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을 그 어떤 잘못이 막중해서 오래오래 기억되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 뜻은 좀더 깊은 데 있는 것으로 안다. '역사의 죄인'이란 말은 '역사 앞에 죄인'이라는 뜻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 경우 역사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의 과정이 아니라 어떤 실체성(實體性)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역사는 심판한다'는 말을 쓰기도한다. 이런 경우에는 역사를 어떤 정적(靜的)인 원리 따위로 보지 않고 어떤 다이내믹한 의지로 파악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역사철학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신념처럼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은 나의 삶에 대한 파악과 직결된다. 삶에 연습이 없듯이 역사에는 반복이 없으므로, 그것은 언제나 1회적 사건으로 매듭지어진 것으로 점철되어 하나의 선(線)을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현실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유일회 성(唯一回性)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되는 일은 특수 하며, 그때에 주어진 일을 그 시점(時點)에서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일의 결과가 이미 결정이 나는 것으로, 아무리 잘못을 후회 해도 다시 만회할 기회는 오지 않는다.
L교수가 식민지시대의 잔재가 아직도 그대로 위세를 부린다고 한 탄하는 글에서, 오늘날 일본이 우리를 그처럼 깔보기는 하지만 우리의 내적 정신자세나 사회ᆞ경제 구조가 일제 식민지의 연장 이상이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그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해방 후 반민족행위 처벌법과 그 의지를 집행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바로 그때의 역사현실에서 막중한 과제를 담당했음을 말했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그때 반민족ᆞ친일주의자들의 처단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오늘 우리 역사의 천추(千秋)의 한처럼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역사적 시점과 그런 일들이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그 시대의 주역들이 이유야 무엇이든지 이 역사적 과업을 이행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역사의 죄인이며, 역사는 그들을 심판했으며, 그여 파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경우 역사라는 거울 앞에 당시의 친일분자들의 모습이 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처단하지 못한 자들의 죄가 오히려 더 무거우며,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 민족무대에 선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나는 친일파가 아니었으니 깨끗하다"고 입방아를 찧을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있는가? 해방 직후의(자유당 당시) 역사의 중심과제는 역시 '민족'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잃었던 땅, 잃었던 주권 등 흩어지고 흐려진 민족의 것을 되찾기 위해 내세운 자명한 과제였다. 그런데 그 과제가 이행되지 않았기에 오늘 날도 그 문제는 그대로 있으며, 그것은 우리 앞에 거울이 되어 우리의 정체를 계속 폭로하며 심판한다. 그것은 분단의 간 비극사를 거쳐서 통일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앞에 놓고 우리를 힐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