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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6, 26-33
1. 두려움

이 본문에 세번이나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권고가 반복된다. 두려움이 없는 인간! 이것이 성서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이상형인가? 희랍의 스토아철학이나 동양의 도인사상은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勇'이라는 것이 대덕목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것과 정반대의 권고가 많다. 신약성서에서만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살라는 권고가 무수하다(가령 사도 9, 31. 로마 11, 20. 고후 7, 1. 필립 2, 12 등).

그 중에 필립비서의 말씀인 '두려움과 떨림'은 키에르케고르가 한 책의 표제로서 신앙인의 특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아들 이삭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떨림의 처지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그것은 종교(신앙)적으로 보면 아들을 '바치는' 복종의 행위나 윤리적으로 보나 애비의 입장에서 볼 때 용서 못할 살인자, 그것도 이유없는 살인행위다. 그 사이에서 두려움과 떨림만이 있올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다. 죽음은 미지의 현실이기에 그 앞에서 사람은 두려워한다. 사람은 결단함으로써만 행동할 수 있다. 결단은 선과 악이 흑백처럼 뚜렷하게 구별된 것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중에 하나를 결단할 때 하나를 얻는 대신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보편과 특수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둘중 하나에 복종하려면 다른 하나를 유린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불가피하다. '종교적' 절대성이나 양심을 인정하는 한 삶과 두려움을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두려움 없는 인간을 이상으로 한다는 것은 초인사상, 말하자면 절대 자율적 존재, 즉 스스로 신이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성서는 이런 초인을 모른다. 그런데 본문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면 우리는 두려워 말라와 두려워하라의 틈바구니에 있는 셈이다. 그러면 무엇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며 그것은 두려워하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 어떻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가?

2. 역사적 공포의 대상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된다. 마태는 이 말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할 때 한 말씀과 연결시킨다. 예수는 제자들이 가야 할 상황을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내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전제한다. 양을 이리 속에 보내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러므로"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연결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막연한 자연적 상황이 아니다. 그 두려워할 대상은 바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며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고 갈 것이라고 한다.

'법정'이란 유대 민족의 자율적 최고의회이다. 이것은 로마의 허용 아래 대제사장을 머리로 하여 제사족속,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 등 71명으로 구성된 지배체로서 군사문제와 대로마 정치범을 제외한 모든 입법과 사법권을 부여 받은 기관이다. '회당'은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국민전체를 계몽 훈련하는 계몽적 조직체이다. 총독은 헤게모니(권력)를 손에 잡은 점령 세력의 대표이며, 왕들이란 헤로데가 제왕들이며 이방의 제왕을 지칭했을 수도 있다. 하여간 권력과 종교가 야합한 지배층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그들의 횡포는 마침내 불신 세계를 이루어 "형제가 형제를 죽는 자리에 넘겨 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자리에 넘겨주고 또 자녀들은 부모들을 대적하여 죽게 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그때 진행되는 역사적 상황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서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세계 속으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한 것이다.

본문의 "그러므로"는 세가지 사실을 전제 내포한 접속사이다. 첫째 열두 제자를 파견할 때에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그런 '세상'에 파견했으며 또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출전 전사들처럼 나갔다. 둘째, 그럼에도 저들은 어디서나 진리를 증거할 수 있었다. 셋째, 그러니 너희들도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루가복음서에도 12장 2-7절이 본문의 말씀이 있으나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말씀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므로" 열두 제자들의 정황과 연결시켜 그리스도들의 정황을 나타낸 것은 마태의 선 자리를 드러낸다).

이같은 '사람들의 세상' 안에 있지만 두려워 말라고 한다. 무슨 근거에서?

3. 공포에서의 해방

첫째,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마르 4, 22. 루가 8, 17). 이것은 '진리, 정의, 선은 반드시 승리하며 이에 반해서 불의와 악과 거짓 따위는 반드시 망한다', '사필귀정이다' 또는 '역사는 반드시 공죄(功罪)를 가려낸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이같은 신념은 중요하다. 이것은 반면에 저들이 받는 박해가 공정한 이유때문이 아니라 참을 거짓으로, 의를 불의로 뒤집어 씌우는 박해의 때를 반영한다. 이것을 저들이 약세이기 때문에 저들의 정당한 주장이나 증언이 무자비하게 밟혀 버리고 그 증거 마저도 소멸되는 정황을 반영한다. 이런 현실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고 한다. 까닭은 그들의 진의(眞意)가 반드시 밝혀지고 그 진의를 왜곡했던 세력의 음모가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신념은 역사나 자연의 법칙을 믿어서도 아니요, 역학적 성쇠의 필연성을 믿어서도 아니다. 아니! 이것은 천하를 심판하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은 반드시 시비를 가려낸다. 그는 그러한 때를 약속했다. 그 때는 알곡과 가라지를,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내듯 진위를 가려내는 때다. 그러므로 어두움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몸'(Soma)이란 육체이다(이것은 바울의 개념과 다르다). '영혼'으로 번역한 것은 이차적으로 육체와 상반되는 영(pneuna)이 아니라 푸쉬케(pschike)다. 푸쉬케는 천하보다도 귀중한 것(마태 16, 26)이며 비록 사람이 몸을 죽일 수 있을지라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가는 이 말 대신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함으로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뚜렷하게 나타냈고 마태오의 푸쉬케란 말 대신(마태 16, 26) 전인(全人: holon heauton)이라고 했는데 오늘의 개념으로 하면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인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 육체를 괴롭히고 죽일 수까지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인간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람들에게 인간의 육체를 죽일 권한이 부여됐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저들이 아무리 박해를 해도 인간의 어느 부분 이상을 침범할 수 없는 한계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만으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강조점은 그 다음에 있다. 그것은 몸과 푸쉬케를 함께 없앨 수 있는 이는 하느님 뿐이라는 신앙이다. 세번씩 두려워 말라고 반복했는데, 여기서 동시에,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한 번 나온다. 두려워할 이는 오직 한 분! 그는 바로 인간 전체를 살리고 죽일 권한을 한 손에 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인 이를 향한 두려움이 상대적인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논리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두렵다. 그 박해가 두렵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이가 있다. 그에게 내가 직속돼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와의 단절은 나의 영원한 멸망이기에 두렵다. 이런 두려움 앞에서 '사람들'이 주는 두려운 말에 위축되는 것은 정말 두려워할 이를 망각한 데서 온 비겁이다.

두려움의 소굴은 바로 내 마음이 집착된 바로 그것, 그곳이다. 돈에 애착하는 자에게는 바로 재산이 두려움의 소굴이다. 명예에 애착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것이 두려움의 소굴이다. 그것은 내 삶의 보장을 찾는 대상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나의 부분임을 알 때 나는 비겁에서 해방된다. 내 전체와 관련된 이를 두려워하라! 그런 순간 내게 절대처럼 보이던 두려움은 도깨비처럼 사라진다. 존 녹스의 묘비에는 "여기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교자가 누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느님을 궁극적인 주권자로 아는 자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인간됨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티머 감독이 헨리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설교하려고 단위에 섰을 때 '파티머야 왕이 임석했으니 주의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파티머야 만왕의 왕이 여기 계시니 주의 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헨리왕의 비위를 거슬릴 수 있는 말을 피하겠다는 비겁자일 필요가 없었다.

셋째, "참새 두 마리가 한 푼에 팔리지 않는냐? 그러나 그중의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반 푼에 팔리는 새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죽일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몸을 죽일지라도'라는 것이 가정임을 드러낸다. 참새에게 '푸쉬케'는 없다. 그래도 그런 것들 마저 하느님의 주권에서 그 생사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육체를 죽일 권한도 그에게만 있다는 신념은 너무도 딩연하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 맹목적인 주장 같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런 '억지'를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차원과 다른 믿음의 차원을 본다. 비록 악한에게 우연하게 맞아 죽는 경우라도 그 까닭은 설명할 수 없으나 하느님이 간여하지 않고 된 일은 아니라는 이 신앙!

산상설교에도 이같은 내용이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무위의 상징으로 새나 꽃들을 내세워 저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너희는 새나 꽃보다 귀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은 부분적인 것 때문에 삶의 공포 속에 있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강조하고 위로했다고 이해하면 잘못이다. 새나 꽃과 인간을 동시선상에 놓은 것이 아니다.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는냐!'는 비교형이 아니다. 보다 귀하다고 번역한 원문 diaphero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번역에 '하물며 너희야!'는 그 뜻에 적합하다.

이것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은 현상적으로 자연의 일부이나 그의 운명은 하느님께 직결됐다는 확언이다. 이런 신앙에 선 자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 용감하라

그런데 이 권고와 위로의 말씀의 배후에 적극적인 뜻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맡은 사명을 과감히 하라는 명령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두운 데서 너희에게 말한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다. 이것은 원래 잠언적인 말이었음은 루가 12장 2-3절, 마르코 4장 22절 등에서 보면 알 수 있다. 그 본래의 뜻은 역시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다는 것인데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비록 조용히 적은 무리 속에서 시작된 증언이지만 장차 온 천하에 파급되리라는 예언과 같은 것이 됐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을 명령형으로 바꿈으로써 박해받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10장 18절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 갈 것"을 예언하고 그 다음에 "그들과 이방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게 될 것이다"고 한다.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와 직결된 것이다. 즉 박해의 때와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27절은 바로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즉 지금까지 극히 적은 무리들 안에서 비밀처럼 간직했던 것을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천하에 증거하라는 것이다. 해야 할 말, 증거해야 할 진실이 박해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할 때는 아니다. 감추어 봐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밀로 간직하고 '어두운데서' 공개 될까 봐 친밀한 사람들에게만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대낮에, 높은 데서 다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외치라!

이것은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중요한 비결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것, 들은 것, 본 것이 참일진대 그것을 천하에 증거하는 '투사'로 나설 때 공포는 사라지는 것이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속에서 해소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의 굴 속에서 나오는 길은 참을 참으로 대담하게 증거할 때만 가능하다. 어두움 속에서 중얼거리는 것을 밝은 데서, 귓 속에 속삭이던 말을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천하에 외칠 때다. 헤게모네! 왕들, 법정에 끌려갈 장은 곤욕의 장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밝은 데', '지붕 위'로 알고 그것이 천하에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는 장소로 알라. 그러면 두려움은 없다. 인도인의 해방을 위해 싸우던 간디의 외마디 소리는 "용감하라! 감옥에 들어갈 각오만 해라!"였다. 그보다 시편 119편은 두려워 말라, 두려워하라는 사이에서 두려움을 박차고 일어서는 믿는 자의 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는 겉과 안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자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끝없이'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의 은신처요 방패이기에 당신의 언도(言渡)에 꽉 매달립니다.
너 악인아 내게서 물러가라.
나는 나의 하느님의 계명만 지키리라(113-5절).

당신은 이 땅위의 악인들을 버리기에
나는 당신의 증거를 사랑합니다.
내 피부는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당신의 심판 앞에 안절부절 합니다.
나는 당신의 왕과 의를 이루려 애쓰오니
나에게 폭행하는 자에게 내맡겨 두지 마소서(119-21절).

나는 입을 벌리고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습니다.
까닭은 당신의 언도(言渡)를 사모해서입니다(113절).

내 비록 하찮은 존재로 멸시를 당하나
나는 결코 당신의 지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141절).

주여, 나의 탄원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나에게 당신의 말씀을 볼 통찰력을 주소서!
나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소서! 나를 당신의 약속대로 해방하소서.
내 입술은 주를 찬양하고 또 하리이다.
까닭은 당신이 그 법도를 내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혀는 당신의 말씀을 노래하고 또 하리이다.
까닭은 당신의 분부는 모두 의롭기 때문입니다(169-73).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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