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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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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내가 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나를 너와 대립시킬 때 확실해진다. 이것이 자연스런 과정이다. 내 민족이라는 민족의식을 강조하려면 언제든지 한 민족을 적대자로 가상하였을 때 민족의식이 나타난다. 어떤 단체나 집단이 내적으로 견고해지려면 다른 단체나 집단을 적대화함으로 자기를 견고히하는 방법이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파가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종파를 적대시하고 공격함으로써 자기를 유지하려 하고 작은 종파일수록 다른 종파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기 고집만 주장한다.

유대 민족도 자기 민족 혹은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배타적이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되었다. 그들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은 성전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들은 배타적일 수 만 없는 정세에 부딪쳤다. 따라서 '이웃이 누구냐?'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에 와서 커다란 혁명이 일어났다. 과거 유대교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가능했다. 예배나 제사 즉 의식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직통로는 없다고 주장했다. 무슨 방법을 통해서도 이웃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향한 길은 막힌 것이다. "너희가 기도하는 중에 형제와 화해할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해결하고 오라." 기도 자체는 이웃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느님 께로 향한 통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 만나는 일도 오직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이웃이 누구냐?'라는 유대인의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존재성 자체를 무시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있는 듯한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마치 인간은 홀로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이제부터 이웃과의 관계를 가질까하는 그런 순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람은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나는 이웃이 누구냐 묻기전에 이미 이웃과의 관계를 갖고 있다. 단 하나, 내가 이웃과의 관계를 가졌는데 참 이웃이 못되는 것은 딴 곳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 할 때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중심이 되면 저 사람이 내게 유익한가 손해를 끼치는가를 따져본 후에 유익하면 내 이웃이 되고 아니면 내 원수라는 결론밖에 나올수 없는 그런 태세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 질문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예수의 질문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를 주목하라. 여기서 우리는 처음 질문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 반해서 예수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음으로 "나"를 중심한 질문에서 "너"를 중심한 질문으로 바꿔놓았다. 즉 관심을 "나"에게서 "너"에게 옮겨왔다.

만일에 "이미 불한당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일 수 있느냐"고 유대인의 형식대로 듣는다고 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며 그에 따른 행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령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이 지나가며 잠깐 발을 멈추어서 "저 사람이 내 이웃이냐?"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 사람이 유대인이 아닐 경우에는 내 이웃이 아니라고 지나쳐 버릴 것이고, 만일 내 이웃이라는 결론이 내릴 경우에는 "저 사람은 내 이웃이니까 도와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런 결론에서 그를 도와준다면 그것은 여기 구체적인 산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복종했을 따름일 것이다. 따라서 수난당한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매개물에 불과하며 이웃은 아니고 만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다르다. 불행에 빠진 사람에 대해 전혀 그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를 도와줄 것인가에 대해 윤리적인 종교적인 물음보다 중요하고 급한 것은 지금 여기 수난당한 그의 요청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의 구체적인 처지에 필요한 것에 따라 도와주는 것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면이다. "이웃이 누구냐"는 벌써 이웃을 추상하는 사변적인 질문이다. 사변적인 결론은 아무리 맞아도 그것이 옳은 행위로 옮겨지기는 매우 힘들다. 사마리아인은 수난 그 자체를 직접적인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도움으로써 그 자신이 불행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 이웃은 딴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곧 이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내 이웃인가 묻지 않고 사랑으로 행동함으로 내 자신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된 것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특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웃이란 것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고 기계의 부분처럼 비인격화와 인간소외의 시대에 직면했다. 따라서 불신만이 조장되어 가고 있다. 특히 한국은 지금 토마스 만이 『부덴부르크의 일가』에서 그린 1대와 같은 시대에 속하고 있다. 1대는 악착같이 돈을 벌자는 것이고 토마스 만에 의하면 이때처럼 잔악한 불신의 시대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경제가 중심이 되어 속이는 게 일이고 되도록 이윤을 더 남기자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풍조에 휘몰리고 있다. 이런 때 이웃이란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해도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하는 이때에 어떻게 이웃에 대한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할 일은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사해동포니 한 피로 됐느니, 세계는 다 한 형제니, 혹은 박애주의니 이런 막연한 개념만 가지고는 안 된다. 불신의 이유는 구조적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어느 누가 막힌 곳을 뚫고 들어가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나와 너 사이에 얼음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누가 내 이웃인지 가려낼 수 없다. 이런 마당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누가내 이웃이냐"라는 사변적인 태도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이냐?"로 과감히 전환하는 일이다. 종교적인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에게 행위로 그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 뿐이다.

어느 누가 말하듯이 지금은 어떤 장소를 정해 놓고 종이나 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릴 그런 때가 아니다. 시대는 너무 단원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들이 내게 찾아와서 내 이웃이 되는 때를 기다릴 수는 없고,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와 비슷하게 된 후에 이웃을 삼는 것이 글자 그대로 세속 속에 찾아가서 그들에게 이웃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 되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즉 우리는 사랑하려 해도 그런 자유가 없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에게 보자.

예수는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종교나 윤리에서 어떤 규정을 받고 있는지는 아랑곳 없이 굶주리고, 가난하고, 수난당하는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용서하는 의지 곧 "모든 사람의 관계를 원점에서 재출발하려는 의지"라는 단 하나의 믿음으로 이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혼란이 일어났다. 예수는 윤리 또는 종교의 입장 혹은 낡은 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파괴자, 즉 죄인으로 규탄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 질서를 파괴했고 이 세계를 형성하는 모든 선악의 기준 즉 의를 파괴했다. 여기 예수의 수난이 따랐다. 그러나 이 책임을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그 책임을 십자가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그는 과감하게 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이웃이 되는 일이다. YWCA 그 자체도 그야말로 교회라는 울타리에서 밖으로 뛰어 나와 한 사람 한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려는 운동의 하나인 줄 안다. 이것은 하느님은 용서한다는 대전제 밑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내가 그 행동을 통해서 세계 질서를 파괴했을 때 혹은 낡은 질서에 혼란을 일으켰을 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게 수난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박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낡은 질서의 관념에 의해서 올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싸우는 이웃이 되는 주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동이고 사람의 운동일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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