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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마태 14, 22-23

실존주의가 유행처럼 되었을 때, '고독'이란 말이 유행처럼 범람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회참여'라는 말이 유행으로 등장해서, '운동'이니, '정의 실현'이니 하는 말이 범람했었다. 그 다음에는 '인간화'라는 말이 휩쓸더니 최근에는 '자연화'라는 말이 점점 확산 되어 가고 있다. '인간화'는 기계 문명이 인간과 유리된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이었는데, 이에 대해 '자연화'는 기계 문명의 횡포를 도저히 막을 길이 없으니 더 타협할 수 없다고 보고 그것을 송두리째 거부하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을 다시 직결시킴으로써 다시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그 어디에도 융화될 수 없는 고립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즉 상황과 자기와의 일치가 도저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은 결국 고독한 존재임을 뜻한다. 인간 온 사회 자체도, 기계의 부분품도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것에 안주하지 못하고, 또 그것이 너무 커지면 그것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자기로서 살 것이냐를 모색해야 한다.

에덴 동산의 창조 설화는 역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하느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동반자로서 쌍을 만들었다. 이것은 홀로 있음을 극복하려 함이다. 신은 아담의 신체에서 여자를 만들었다. 이것은 남녀는 본래 한 몸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남녀는 현실적으로 하나가 아니고, 각기 홀로임을 나타낸다.

우선 아담과 하와가 함께 악마의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와가 홀로 유혹을 받는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함께 만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만난다. 둘은 각기 책임을 전가한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따로 따로 그 운명을 판결함으로써 그들의 나갈 길이 같지 않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결국 한 몸인 듯이 보이나 어쩔 수 없이 둘이며,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나 각기 홀로임을 나타내고 있다.

양성(兩姓)이 사랑하는 순간에 있어서는 이 '홀로성'이 극복된 듯이 착각한다. 그러나 결합된 다음은 오히려 그 '홀로성'이 더욱 증대된다. 창세기 설화는 범죄 이후 부끄러워서 자기를 감춘 것으로 인간의 고독성을 드러낸다. 부끄러움은 '나는 남에게 공개하기 싫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의 깊은 비밀은 홀로 간직하고 싶기에 그 일단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보면 내가 홀로임을 잊게 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은 나를 떠난다. 그 때 사람은 '나 홀로' 임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이 처리할 문제,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범죄한 경우와 같은 때에 사람은 끝없이 홀로임을 절감한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나는 홀로 나를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함께 아파줄 수 없으며, 또 그렇다고 해서 내 고통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는 정말 궁극적인 고독을 경험한다. 누구의 말대로 죽음의 입구는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오직 한 사람씩만들어가도록 좁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홀로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은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일, 저 일에 이 그룹, 저 집단에 휘말려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축제 다음의 적막, 함께 어울려 흥청이다가 저녁이 되면 각기 흩어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 제 갈 길로 들어설 때의 허전함, 그럴 때 없어졌던 듯하던 이 '홀로'는 나를 앞지르고 있다. 예술가들은 공연 뒤의 고독을 한사코 피하기 위해 제 몸을 망친다고 한다.

고독(loneliness)라는 말에 대해서, 정요(靜寥, Solitude)란 말이 있다. 고독은 홀로 있음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표시하는데 대해서, 정요는 사람이 홀로 있고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은 홀로 있기 싫어 몸부림치나, 반면에 홀로 있고 싶은 면도 있다. '나는 홀로 있고 싶다.' 이것은 홀로 있을 때 어떤 안정을 얻을 수 있겠기에 원하는 것이다. '혼자 걷고 싶다.', '혼자 듣고 싶다.' 그래서 자연을 홀로 즐긴다. 거기서 무언(無言)의 말을 듣는다. 또 홀로 예술을 감상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히 잡다한 일상성의 언어나 관계에 휘말리는 것보다 덜 외롭다. 나는 밤을 좋아한다. 온 식구가 잠이 들면 그때부터 정말 내 시간이 온다. 그것은 고독과 정요의 명멸(明滅)의 때이다. 어딘지 쓸쓸하다. 그러나 어딘지 호젓하다.

그런데 현대는 이 홀로 있으려는 것을 가로막는 시대이다. 정보(Information)와 통신(Communication)의 밀도는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루 종일 나에게 주입된 잡다한 것들이 나의 뇌리를 파고 들어 홀로 있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고독을 극복하는 길은 역시 용감하게 이 홀로 있는 시간을 자진해서 마련할 때이다.

여기 짤막한 기사가 있다. 예수는 하루 종일 군중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그는 제자들을 먼저 그 다음 행선지로 보내고, 그리고 그 많던 무리들을 보내고, 그리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서 날은 이미 저물었건만 거기 혼자 계셨다. 왜 그랬을까? 고독을 즐겨서 그렇게 했을까? 이렇게 한 이유로 고독을 즐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잘못된 말이다. 그는 정요, 즉 홀로 있으려는 것이다. '정요'에는 황야라는 뜻도 있다. 그는 그래서 산으로 오른 것이다. 거기서 그는 자연을 감상했나? 시를 감상했나? 아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거기 홀로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달라, 무엇이 주어져야 하겠다는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기도의 참 뜻을 모르는 것이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제 본 모습에로 돌아 가는 것이다. 즉, '인간은 홀로'라는 그 본향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는 예수에게 있어서 우리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뜻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집은 홀로임을 방해하나, 예수의 집은 철저히 홀로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그 홀로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예수는 공생애를 출발할 때 광야(Solitude)에서 정요(Solitude) 속에서 40일을 지냈다. 그 장면을 성서는 '산 짐승들이 있는 황야'라고 했다. 그는 하느님과 자연, 그 사이에서 이제 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단을 위한 순간이다.

악마가 온갖 특권, 무기를 공급하려고 한다. 돌로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떨어져 보라. 이 천하를 네게 주마. 이것은 홀로 제 길을 걸어야 한다는 인간의 본래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끝끝내 홀로이기를 강변한다. 홀로 제 길, 제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는 기도하러 갔다고 한다. 그것은 실은 나는 끝끝내 어떤 허구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내 길을 가겠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음을 말한다. 기도란 결국 얼키고 설킨 관계에 주는 공수표, 허구한 것에 속박되어 제할 일, 제 길을 상실한 자기를 도로 찾는 행위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제 홀로 해야 할, 제 홀로 결정해야 할 것도 이 핑계, 저 핑계로 결단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리 똑똑한 듯 해도 대체로 신기루 위에 제 몸을 싣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처리한다. 누가 어쩌니, 그가 어떻게 볼까? 내가 질 수가 있나? 결코 밑질 수는 없다 등등 결국 남의 눈에 의해, 남의 판단에 의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산다. 우리는 얼마나 쓸데 없는 말 한마디에 흥분하며, 하잘 것 없는 감정에 자기를 소모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힘을 의지하려고 파당을 짓고 거기에 의지하려고 분쟁을 일으키는가? 정치계를 보라! 사회상을 보라! 저 거리를 휩쓰는 저 인간들을 보라! 무얼 하자는 것들이냐? 무얼 의지하려는 것이냐? 결국 홀로인 것을 은폐하기 위한 저 위장술들을 보라! 우리라고 그 예외는 아니다.

홀로 있다는 것, 홀로임을 그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시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느님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한참 신이 나서 무엇인가 한답시고 야단하는 현장에서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어진 저녁, 침대에 홀로 누우려는 순간 그는 차고 나은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다. 정말 내가 홀로임을 알 때, 홀로 있을 때, 그때 하느님은 그를 만난다. 이 '홀로'란 가령 내가 무슨 중대한 일을 결단할 때, 홀로 '이것은 나만이 해야 할 일이다' '내가 결정할 일이다'고 할 때, 가령 형제간에 알력이 있을 때 주변에서는 자기 편이 되어 끝끝내 이기기를 호소할 때 더욱 '나 혼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또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포기할 때, 또는 은폐된 범죄를 고백하기로 할 때 그때 쏟아지는 고독의 눈물과 더불어 정말 그는 그 순간 기도한다. 그때 하느님을 그는 만난다.

예수의 경우는 결국 제자들을 보내고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홀로 산에 오른 것과 그의 생애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가 그의 길을 갈 때 그는 언제나 홀로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위에서 그는 홀로이다. 그러나 바로 홀로임을 알기에 그는 절대로 남을 원망치 않고 하느님 앞에 서서 참 기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가 산에 오른 것은 산에 있으려 함이 아니라, 산 아래 저 형제들, 저 사람들에게 내려감을 위해서이다. 그는 인간을 피한 게 아니라 참 인간을 인간으로 만나기 위해서 산에 홀로 있다.

인간 세계의 비극은 원래 홀로임을 잊은 데서 온다. 최근에 어떤 청년이 실연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고독 때문에 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홀로인데! 어떤 이는 파산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원래 홀로인데!

사람 사이는 원한 때문에 비극을 빚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언제나 근거없는 기대가 어긋나는 데서 오는 원망이다. 그가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내게 잘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전제가 어긋 나서 원한으로 번진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홀로인데! 바른 인간관계는 나는 원래 홀로임을 분명히 알고 출발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원점에서 재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주고받고할 수 있다. 따뜻한 마음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남의 도움이 당연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이런 것에 감격이 없다. 그러나 원래 홀로임을 아는 자에게는 이런 것은 모두 은혜, 선물로 보여진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내 권리는 아니다. 그것은 필연이 아니다. 우연이다. 내게 친구가 생기 고, 공동체가 있고, 재산이 주어지고 등은 모두 원래 홀로인 나에게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반면에 내게 어떤 사랑하는 마음, 너를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내 소양이 아니다. 그것도 우연이다. 성서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내 사랑이 아니고, 하느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삶 전체를 선물,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윤명혜 양의 난파선은 이른바 고독한 인간상을 잘 그렸다. 주인공 고윤화는 미국 시민이 된 한국인이다. 그것은 벌써 고향이 없는 고독상을 말한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자를 찾아 헤멘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집념에서 죠오지의 성실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는 죠오지를 사랑하나 그는 역시 미국인, 자기는 한국인, 그래서 그 사이에 오는 너와 나는 다르다는 갈등에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죠오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 그 때 그녀는 홀로 임을 더욱 실감한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 두가지 장면이 내게는 이채롭다. 하나는 그녀가 집념하면서 찾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나서 그대로 죽여버리려다 결국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버려둔 채 거기를 떠나 버리는데, 거의 저도 의식하지 않고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가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것을 알려준다. 그녀는 그렇게 행동하고만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비웃는다. 그녀는 자기 행위를 자기에 돌리지 않는다. 왠지 그렇게 해지는 것일 뿐이다. 또 하나는 사랑하는 죠오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이다.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 현상을 본 자를 찾아 헤메다가 만난다. 그녀는 죠오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에게는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만나서 내 외로움을 덜어 주는 이를 그리다가 아니 그저 그가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서 그녀는 '홀로'라는 위치에 그대로 있으면서 '너를 너 홀로대로' 두면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배운다. 나는 그게 바로 기도라고 생각한다. 윤명혜는 그녀를 '난파선'이라고 했다. 몸을 실은 배가 깨진 것인지, 그 자신이 깨진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너무 분주하다. 우리는 너무 얼키고 설켜서 사는 동안 자기를 잃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산으로 홀로 오르신 예수의 모습에서 다시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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