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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14; 6, 53
1. 주검

언젠가 구라파에서 강연을 마친 다음 질문을 받았다. 그중에 한 사람이 한국은 여러 종교들이 수백 년 또 천여 년을 공존하고 있다는 데 당신은 어떻게 불교 유교와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특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나의 강연 내용과는 동떨어졌으나 내가 서구의 사고를 비판한 탓에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비교종교학 따위에 별관심이 없고 또 잘 모르는 남의 신앙 세계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개입할 의사가 없기에 그런 생각은 별로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는 느닷없는 질문이 된 셈이다. 그런데 언뜻 대답할 단서가 생각났다. 그날의 강연은 독재정치와 관련된 생명의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생명과 상반되는 죽음의 문제가 떠올랐다. 잠깐 생각끝에 나는 이렇게 대답해 보았다.

가령 '死'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 것을 전제하고 비교적 강조점이 다른 것을 지적한다면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유교는 '주검'(死體)의 문제에 더 관심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문화권에서보다 죽은 자의 시체에 대한 의식이 발달됐습니다. 의식만이 아닙니다. 그 시체를 묻은 다음에도 자식은 3년을 그를 추모하여 그 묘 곁에 초막을 짓고 고행하기도 하며, 두고두고 제사를 지냅니다. 물론 그 무덤 쓰는 데도 최대한의 배려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불교는 '죽음'의 문제에 관심의 초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일생을 생노병사로 집약하는데 결국 생의 다음은 죽음에로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이 죽음이 인간고(人間苦)의 마지막 단계요 또 무상의 근원적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종교적 사변이나 교리는 이 '죽음'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을 넘어서느냐에 있습니다. 니르바나는 결국 이 죽음을 넘어선 해방된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죽임'에 관심의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징이며 모든 신앙이나 교리의 바탕이 십자가인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죽임당한 사형틀이 아닙니까?

얼떨결에 한 이 대답은 오래 전 일이지만 그 후에도 이 생각은 오래 남아 있었다.

나는 무수한 주검을 본 세대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그랬는데 주변의 가까운 이들의 주검도 많이 보았다. 시체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해도 일단 주검이 되면 얼굴을 덮어 버리지 않나. 그것은 위생적 동기도 있겠으나 주검은 보기 싫은 것이다.

많은 주검 중에 몇 년 사이에 연로한 어른들의 주검을 봤는데, 그중 나를 통곡하게 한 것은 함석헌 선생의 주검이다.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누인 그에게 많은 조객들이 몰려왔다. 입관한다는 날 나는 교통사정으로 허겁지겁 바로 직전에 도착했는데 측근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재촉해서 들어선 그 앞에 그의 시체가 이미 뚜껑만 안 닫은 채 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나는 통곡을 했다. 그것은 그의 입을 두터운 가제로 곽 막은 것과 그의 손발을 꽁꽁 묶은 것을 봤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부러진 바늘 하나 갖지 않은 채 오직 저 입으로 그리고 저 손으로 난폭하고 부도덕한 정권을 쉬지 않고 질타한 바로 저 입과 저 손을 저렇게 봉하고 비끄러 매다니! 바로 그게 너무도 원통하고 또 무상해서 통곡했던 것이다. 이미 병실에서 운명했을 때는 그 시체의 볼을 만지고 손을 잡아보고 이별의 조용한 눈물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번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 그 눈물은 그 시체에 무슨 정감이 가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신과 이틀밤을 함께 지냈으나 그 시신을 볼 마음이 일지 않았다. 이런 심리를 변명해서 사람들은 사람이 죽을 때 정을 거두어 가기 위해 무섭게도 여기게 하고 추하게 보이기 도한다고 하나 시체에 대해 매정해지는 것에 대한 변명이리라. 어쨌든 유교 전통으로 그 후손들은 얼마나 고달픈가. 무덤을 고르는 데서부터 장례과정 그러고도 두고두고 없는 재산 쪼개어 매년 밤새 제사를 지내야하니. 그런데 그런 수고는 여자들이 온통 맡아하건만 여자는 제사의 예를 돌리는 데서까지 제외된다. 이것은 정말 사람을 강제하는 풍습이다. 사람을 혈통으로 꿰매기 위해하는 것인데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조상숭배를 자손들의 화복과 관련시키는 미신까지 만들고 있다. 이거야말로 남자 위주의 발상에서 나온 것인데 그렇다면 그 수고는 남자들만 하면 될 것 아닌가.

2. 죽음

죽음은 확실한 사실이요 또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공자가 사후에 대해 묻는 이에게 차가운 대응으로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죽음 다음의 일을 어찌 아느냐고 잘라 말했는가 하면, 장자는 삶은 기(氣)가 모이면 있고 사(死)는 기가 흩어지면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나 그것은 죽음을 설명한 게 아니라 기를 말한 것이요, 대부분의 종교들은 죽은 후의 다른 양식의 새로운 삶을 환상적으로 설명하거나 죽어도 죽지 않았다는 설명을 위해 온갖 설명을 꾀한다. 그러나 그중 공자의 대답이 가장 정직한 것이다. 죽어 보지 않는 한 그 다음을 알 길이 없으며, 죽었다 되살아온 사람들의 얘기가 무성하나 그들 역시 아주 죽어 보지는 못한 혼미 속의 의식작용을 말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죽음이고, 그것으로 이 삶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하는 것은 삶을 설명하기 위한 확실한 거점을 찾다가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들의 한계다.

나는 죽음에 대해 관심 없다. 그것이 지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까닭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정력을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기른 탓인지 모른다. 아주 죽지 않기 위해 세상에 없는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사람들을 만방에 보내 죽게 한 진시황은 미친놈임에 틀림없지만, 되도록 죽음을 뒤로 미루어 보려고 오래 살 수 있는 짓이라면 무슨 짓도 다한다는 요새 돈푼깨나 모은 놈들의 꼴은 정말 못 봐주겠다. 산 사슴의 뿔을 자르고 솟아나는 피를 마신다지 않나. 손에 대기도 끔직해하는 지렁이를 구워 먹든지 삶아 먹지 않나, 심지어는 곰쓸개즙을 먹기 위해 산 곰의 배를 갈라놓고 입을 대고 핥아먹는 놈들까지 생겨나니, 이러다 가는 살기 위해서 사람인들 안 잡아 먹으랴! 결국 죽지 않으려는 욕심이 눈을 멀게 하고 인간되기를 포기하게까지 한다. 그래봐야 결국 죽음은 못 피할 것을!

3. 죽임

문제는 '죽임'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임당한 사건에서 출발했다. 그 증거물로 십자가를 걸고 다니고 교회 건물마다 그것을 내 걷고 심지어 장식품으로까지 둔갑하고 있다. 그것이 '죽임'이라는 사건을 상징하지만 점차 그 뜻마저 잊어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예수를 죽인 로마제국도 망하고 물론 빌라도도 없어졌으나 그 일은 그것으로 일단락된 게 아니다. 그 죽임당함의 사건을 나자렛 예수의 개인에게 일어난 것으로 묶어 두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 사건은 우선 집단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개인에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인류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어째서, 긴긴 인류 역사에 계속 사람 죽이는 일이 연속됐는데 하필 그의 죽임당함이 그토록 큰 문제로 두고두고 우리에게 절대적 물음으로 다가오는가! 그것은 물론 그를 따르던 민중들의 특이한 인식과 운동에 기인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죽임의 사건을 계속 있어 온 다반사로 처리(체념)하지 않고 이 사건을 철저히 물고 늘어진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전략은 전례가 없던 것이다. 그때 젤롯당이라는 반로마결사대가 있었다. 저들은 죽이는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죽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죽이는 싸움에서는 강자가 이기는 것이기에 저들은 결국 로마라는 죽임의 세력에게 몰살당함으로 장엄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죽이는 강한 세력에 맞서 싸울 힘이 없으니, 없었던 일로하고 굴종하고 타협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리사이파다. 그에 반해 예수의 민중은 전혀 다른 전략을 폈다. 한편으로는 저들과 정면 충돌을 피하고—그래봐야 승산도 없고 궁극적 해결의 길이 없으니—전체가 그 죽임의 증인으로 나섰다.

단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우리는 예수가 죽임당한 것을 본 증인들이라는 것이다. 정치범으로 죽임당한 사건의 증인으로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 그들도 불온분자로 처형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증인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 죽임당했다고 명시함으로 그 죽임의 장본인 즉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잘 나타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이 식민지의 반란분자를 처형하는 처형대였으니까! 그러니 결국 우리는 로마가 예수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그들이 가는 곧마다 퍼뜨린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국한된 사건만이 아니라 인류와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즉 로마가 우리를 모두 죽이려는 것을 예수가 대표로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는 인류를 죽이는 악마의 세력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한 말인데, 저들은 약자들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말할 때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공적으로 대표성을 지니지 않은 예수의 민중들은 이런 직설적인 말을 주저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음이 틀림없다. 그런 흔적이 복음서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저들은 그들의 처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었으나 로마가 살인 집단이라는 것을 쉬지 않고 반복했던 것이다.

그들은 집요했다. 저들은 모이면 애찬을 나누었다. 그것은 예수의 죽임을 이긴 부활을 축하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죽임'의 사건과 결부시켰다. 예수는 떡을 자기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를 자기의 피라고 하면서 나누어 먹게 했다. 그것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뭘까? 결국 그의 죽임당함에 참여한다는 뜻이 아닌가. 바울은 바로 그렇게 이해하고 '나는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죽임당한 사건에 참여한다는 뜻 아닌가. 그것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도 죽임당함으로 화신(化身)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것은 동시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죽인 세력에 대해 산 증인으로 계속 고발하겠다는 결의요, 그것은 동시에 살림의 운동이 아닌가! 부활의 증인이란 결국 살림운동이요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 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

4. 오늘의 죽임의 현장

우리는 모두 죽임의 목격자들이다. 그 죽임은 한두 사람씩이 아니라 집단적 학살의 목격자다. 광주의 학살이 바로 그런게 아닌가. 우리는 시퍼렇게 살아 청운의 꿈에 부푼 학생들의 죽임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강경대의 죽임의 목격지들이다. 그런데 박종철이 죽임당한 것은 연막에 가리워질 수도 있었다. 한 젊은 의사의 양심적 증언이 아니었던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장에서 고발되지 않은 묻혀진 죽임당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강경대 군은 평화적 시위에 가담했다. 도망가는 것을 여러 전투경찰이 집단적으로 짓이겨 죽인 사건이다. 김귀정은 정말 압살당했는가. 그러나 죽인 자는 없는가. 우리는 70년 11월 13일 전태일 사건 이후 연이은 분신 또는 투신 '자살' 사건의 목격자들이다. 그런데 한때 저들의 죽임당함을 계속 증언하다가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이 정부 밑에서 강경대 군의 죽임당함을 계기로 다시 분신 '자살' 사건이 연속된 것의 목격자들이다. 정말 저들이 자살했나! 그래서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가! 저들은 정신이상자들인가. 그렇지 않고야 왜 느닷없이 분신자살을 하나! 아니다. 자살이 아니다. 저들도 죽임을 당했다. 저들을 막다른 골 목에 몰아넣은 권력집단이 바로 저들을 죽인 장본인이다.

숨이 막힌다. 기가 막힌다. 제 편 아닌 무리들이 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권리주장의 순이 나오기가 무섭게 잘라 버리고, 국민이 기를 펴고 기지개를 펴려고 하면 사정없이 기를 눌러 버린다. 그러므로 기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운동도 모두 숨통부터 막아 버린다. 이 땅이라고 인물이 없으랴마는 운동의 선봉에 설 만하면 공안정국의 협박으로, 악법의 악용으로, 어용여론의 재판으로 매장해 버리고, 그 일만을 전담하는 기관들이 있어 국민의 세금을 감시도 받지 않고 그것을 위해 마음대로 쓴다.

산업사회를 만든다고 노동자들을 마구 착취하고, 강대세력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의 비호를 받아 성장시킨 것은 극소수의 자본가다. 그 결과 국민 사이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이웃과 이웃을 소통하게 하던 모든 작은 길들은 자본가를 위한 고속 도로에 의해 차단되듯 인간관계는 날이 갈수록 차단되고 사람의 유일한 젖줄인 대지와 물과 공기가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은 원수가되어 간다.

한마디로 우리를 죽이는 힘은 예수를 죽일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죽이고 있다. 누가, 어떻게 이 죽이는 힘을 막을 수 있을까!?

5. 제2의 창조

요한복음은 중요한 선언을 한다. 신(logos)이 육(肉)이 되어 우리 안에 사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 14). 이것은 제2의 창조 선언이다. 제1의 창조는 창조자가 초연한 자리에 있으면서 말씀으로 세상을' 쟁이'처럼 만들었다. 그러므로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질적 거리가 있었다는 신조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 창조자는 위에서 축복도하고 벌도 주는 군림하는 힘이다. 그런데 요한은 바로 그 말씀으로 존재한 신이 육이 되었다는 것이다. '육'이란 우리 동양에서도 가장 천하고 무상한 것의 상징으로 쓰여지는 말이었지만 희랍에서도 그러했는데, 더욱이 그때 한참 성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육'을 인간의 감옥처럼 인식하여, 파괴하고 그것에서 탈출할 때만 구원을 받는다는 신조를 유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이 바로 이러한 육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육'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육+알파다. 그런데 그 알파가 빠진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닌 가장 더럽고 미천한 층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신은 신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흡수되었다. 바로 그렇게 된 그 육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이것은 신이 고고하게 군림하는 자리를 버리고 회로애락의 현장에로 왔다는 것이다. 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살림운동에 가담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그는 맨 밑바닥으로 온 것이다. 아니 밑바닥이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사건 이 민중의 사건이라면 하느님은 민중으로 살림운동의 현장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예정됐다. 그것은 죽이는 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민중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민중은 위에서 말한 대로 바로 이 사건을 중심으로 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 민중이 바로 그 신처럼, 예수처럼 '죽임'당함에 가담했다는 의식이다. 그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원한에 찬 죽임당한 자들이 됐다. 그런 그들이 죽임당한 것은 인류 전체가 당한 것이요, 그들을 죽인 장본인은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것을 천하에 계속 쉬지 않고 퍼뜨림으로 죽이는 세력과 대결해 나갔다. 최후만찬을 그들은 그렇게 인식한다. 그러므로 최후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결사대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바울이 이 경험을 언어화했다. 나는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날마다 죽고 있다. 그것은 그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라고 반복해 말한다. "그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살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요한의 이해처럼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의 싸움임을 잊지 않을 때 바른 인식에서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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