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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1. 자유와 '안'

근세 이후 자유라는 말을 많이 써 왔다. 프랑스혁명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기치가 서구에서 시작된 이래 이 개념이 민주주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도 불어왔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은 원래 희랍에서 온 것이다. 자유는 노예의 상반 개념이다. 그것은 도시에서 누리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자유란 한 폴리스(Polis) 안에서 그 곳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서구에서도 자유하면 시민의 자유를 뜻한다. 그것은 어떤 봉건주 밑에 있던 노예 신분이 탈출하여 시 안에 자리를 잡으면 얻는 권리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무엇 안에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시민(市民)이라는 관념을 가져보지 못한 나라에서는 왜곡되어 개인의 자유,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만 남고 '안'(in)이라는 제한이 없어지므로, 권리만 있고 의무를 무시하는 혼돈을 가져오기 일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에는 자유라는 말과 이른바 탈출(Exodus)이라는 말이 거의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다. 어떤 '안'에 있던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이 바로 자유함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회가 질식할 만큼 구조화되어서 그런 것에서 뛰쳐나오자는 것이다. 기득권의 확립으로 이 사회는 굳어졌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이 완전히 구조화되고 그 구조의 핸들은 소수인 특수층이 쥐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말로는 만인(萬人)의 자유라지만 사실은 자유는 특권층에게 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자유라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는 자에게는 자유가 없다. 아무리 행동의 자유를 말해도 이 구조 사회는 꼭 정해진 철로를 달리는 기관차 같은 자유이다. 그것도 조종하는 것은 권력층이다. 또 사상의 자유를 말하나 매스컴이 이 사상을 마음대로 조종한다. 그런데 그 매스콤은 경제와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 이런 것을 뼈져리게 느낀 서구의 젊은 세대는 이 사회 구조와의 대결로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했으나, 그것이 되지 않으니까 탈출이라는 길을 택했다. 이른바 반문화(Counter-culture)라는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이 아닌 어떤 밖으로 뛰쳐 나갈 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보면 탈출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선 사람은 생명을 받는 순간 엄마의 뱃 '속'에서 10개월을 지낸다. 10개월 동안 이 생명은 자라서, 아니 어쩌면 투쟁해서 그 어두운 뱃속에서 밖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면 그때는 가정 '안'에 옮겨지는 것이다. 여전히 '안'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정 안의 말과 전통을 배우며, 그것에 완전히 포위된다. 이 생명이 자라면 가정 안에서 학교라는 것 안에 옮겨진다. 거기서 또 꼼짝 못하고 그 학교 안에서 그 규율과 선생 아래에 갇혀야 한다. 이렇게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16년 이상을 갇혀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안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참 기쁘다. 그때부터는 술, 담배를 내놓고 마시고 피울 수 있으며, 영화관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다. 그러나 그러한 희열을 느낄 새도 없이 대학 사회 안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대학 사회는 외적 구속은 덜 할지 몰라도 정신적, 사상적으로 포위해 버린다. 무슨 학설, 무슨 주의 따위가 권위로 절대 진리인 양 포위한다. 대학교도 4년간 지나면 지긋지긋하다. 거기서 탈출한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이른바 직장이라는 사회로 나간다.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사회 안'의 일원이 된다. 즐거운 것 같으나 오히려 대학 생활보다 더 답답한 생활의 반복이다. 돈을 쓴다는 것과 돈푼이라도 번다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출근, 퇴근 등이 더 엄격하다. 이것은 이른바 정말 생존경쟁 속(안)이다. 거기는 돈이나 지위라는 것이 내 행동과 직결된 세계다. 이것에만 국한하면 질식한다. 그는 비록 육체나 시간으로 거기 매여 있지만 어떤 형태로나 거기를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오직 정신적인 길 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사상적으로 민족아시아세계로 탈출한다. 그것도 물론 탈출이 아니라 실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 범위가 넓혀지면 넓혀질수록 자유한 듯 하면서도 자기는 점점 더 작아진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완전독점하고 있으며 그의 처소인 어머니의 뱃속은 모두 그를 위해 있다. 거기서 나와 가정에 들어서면 벌써 혼자는 아니다. 그래도 거기서는 왕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면 점점 작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사회로 나오면 기계의 부분품, 그것도 언제나 갈아 치울 수 있는 부분품이 된다. 그것을 전 민족, 전 세계로 확대하여 생각하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이래서 내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인간은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시 밖에서부터 안으로 그 영역을 세계민족직장가정으로 좁혀 들어간다. 결국 이래서 가정에 낙착된다. 가정, 그 아내, 그 자식밖에 더 깊은 관계는 없다. 까닭은 거기서는 그래도 왕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잘 안될 때는 히스테리가 나온다. 처음에는 혈연에서 정신에로 확대했는데 다시 정신에서 혈연에로 귀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이라는 데서 떠나려고 하나 언제나 '안'에 있다는 사실이요, 그 '안'을 넓히면 넓힐수록 자유할 것 같으나 오히려 고독에 사로잡히게 되어 다시 그 '안'을 좁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그 범위를 넓혀서 세계 운운하는 사람도, 또 그것을 좁혀 가정을 단위로 하는 사람도 결국 '삶을 실패했구나' 한다. 즉 여전히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으며, 밖에 있는 듯하나 안에 있기에 언제나 불안하다.

넓혀도 좁혀도 거기에 참 본향(本鄕)은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감옥에 갇힌 죄수나 세계를 무대로 하는 방랑객이나 별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은 오히려 제한 속에 있을 때 참 삶을 느낄 수 있다는 비유로서 감옥에 있는 자가 거미가 액체를 몸에서 뽑아 그물 뜨는 것을 보고 향락하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에게는 밖이 없다. 언제나 '안'밖에 없다. 우리가 탈출할 밖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안'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동해 보아도 본질상의 변동은 오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서 계장이 되고 과장이 되어도 거기에 질적인 변화는 전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다른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이동이 아니라 어디에서 있든지 그 자리에서 아래거나 또는 위로 새 세계를 뚫어야 한다. 가물어서 물이 없으면 자꾸 헤메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땅을 파고 아래로 들어가 물줄기를 파는 것이 가장 영리한 것처럼, 선 그 자리에서 그 아래를 파고 들어가야 한다.

2. 대립과 결단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대립 속에서 결단함으로 해결된다. 사람은 계속 모순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삶을 심화시키거나 확대하면 할수록 모순율은 커진다. 아무 문제 없는 듯이 힘차게 달리다가도 언제나 어떤 대립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좌절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말하면 죄와 의, 미움과 사랑, 진리와 거짓 따위이겠지만,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와 너는 친한 것 같으나 언제나 대립된 두 주체가 된다. 그게 확대되면 상하 계급, 그룹 사이의 대립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바로 그 대립을 그대로 승인한 것이 사회구조이다. 단적으로 여러분은 일류교니 이류교니 하는 대립 속에서 가장 쓴 맛을 경험했을 것이다. 사실 시험제도로, 몇 점 차이로 일류, 이류, 합격, 낙제를 당연하게 판가름하는데, 사실 이처럼 된 제도는 참으로 해괴한 것이다. 인간은 이런 구분으로 결코 그 우열이 판가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립, 분열, 구분의 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벌써 부조리를 경험하게 되며, 그 부조리 앞에 계속적인 컴플렉스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이같은 사회 안에서의 대립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 안에서 고통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나와 너의 대립성은 본래의 인간성이 아니다.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는 그 엄마와 나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의식하기 시작하면 나와 너라는 것이 구분되며 거기서 일어나는 분열이 사람을 괴롭힌다. 너와 나와의 대립성이 어디서든지 다시 통합될 때만 우리는 비로소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것은 죽임이 갈라놓은 것을 다시 통합하는 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바로 너와 나의 다른 것, 대립된 너와 나가 다시 통합되어 바로 이 대립성이 한 '안'에서 해소되며, 나와 너가 '우리'로써 통합되는 현실이다.

그러면 다시 본문을 보자. 본문은 이렇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유대사람이나 헬라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속했으며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너도 나도, 희랍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일류교생도, 이류교생도, 계장도, 장관도, 미국인도, 한국인도 다같이 하느님의 아들이다. 다 한 선조의 자식들이다라는 뜻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 안'이라는 바로 대립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손과 발이 외적으로는 대립될 수 있으나 한 몸의 지체임을 발견할 때 그것은 한 몸의 두 기능이라는 차이 밖에는 없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때 밖에서 규정한 그런 대립은 우스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이것은 우리의 삶의 원천에 돌아감이다. 이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원천이 천지라는 못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 몸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이다. 내 몸에 그리스도의 몸을 입었다! 이것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그의 십자가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고통은 바로 대립성의 극복이다. 나는 그 십자가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은 더 이상 객체가 되지 않고 내 일로 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뜻을 몸으로 터득하는 자는 바로 그 몸에 그리스도를 입은 자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나의 미래가 약속된 것, 나의 궁극적 상속권 즉 하느님의 아들의 상속권이 주어짐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적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반드시 궁극적인 방향, 도달점이 하나라는 것을 믿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길이며 또한 목표다.

'그리스도 안에'란 신비한 경지이다. 형제는 분열되어 있다. 형이 그 동생을 원수처럼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마주 앉아 대립성을 해소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것을 눈치를 챈 어머니가 언제 한번 이 둘을 오게 해서 늙은 젖가슴을 내밀며 하나씩 빨라고 했다. 어떤 아버지는 이같은 형제에게 칼을 들고 들어와 우선 자기 팔을 찔러 피를 내고 두 아들의 팔에 상처를 내고 그것들을 서로 맞대었다. 이 순간 둘의 대립성은 그대로 해소되었다. 그 대립된 관계는 그대로인데 그 엄마의 젖, 그 아버지의 피에서 하나임을 경험할 때, 이기고 지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기에 저들은 그 자리에서 얼싸안고 재회의 감격에 울었다. 이것이 새로 남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보라 새 창조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은 곧 형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란 바로 대립된 너와 나의 본향을 뜻한다. 그것을 함께 경험할 때 너와 나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학교를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것을 권고한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어떠한 대립성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또 그 사람만이 궁극적으로 상대적인 제약에서 얻은 콤플렉스에 눌려 삐뚤어지지 않고 언제나 전인적으로 살 수 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세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 속에서 절대로 떠나지 말아라. 비록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외적으로 나타난 대립성이다. 그것을 어떻게든 넘어서 그 안에서 통합의 경지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여러분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빈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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