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우리 나름의 몇 가지 기본자세의 가능성을 제시하겠다.
첫째, 교회는 정당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권이 누구의 손에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교회 자체의 직접적인 관심사일 수 없다. 교회의 관심은 제도적으로나 행정상 그것이 민중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집결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것도 그런 의미의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임을 뜻한다. 이것은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길이다.
둘째, 그리스도교는 본래적인, 새로운 가치관 위에서 새로운 윤리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윤리의 거점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추상적인 감상을 지양하고 구체화해야 한다. 그것은 가난하고 눌린 오클로스의 편에서 그들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을 기점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에 뺏긴 그리스도교의 본래의 것을 도로 찾음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을 무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셋째, 오클로스를 위한 사랑의 운동이 조직화되어야 하고, 저들이 체념에서 희망으로 옮겨질 만한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청사 진은 그저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여야 한다. 조직 화는 연대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으로서 네가 당하는 일이 곧 내가 당하는 일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까닭은 저들을 억누르는 악이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노의 단순한 폭발이나 파괴적인 비판을 위한 비판을 지양하는 길이며, 정치ᆞ경제의 횡포를 견제하는 길이다.
넷째, 그리스도교회의 어떠한 운동도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에 폭력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 26, 52)는 예수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폭력의 악순환에서 이 역사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최후의 역사적 결정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의 길을 택하고 판정은 하느님께 기대는 신앙을 최후거점으로 해서, 곧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느니 예수가 십자가에 다소곳이 처형 되었듯이, 3ᆞ1운동 선언을 끝내고 투옥될 것을 기다려 손을 내민 33인들처럼, 김찬국ᆞ김동길이 투옥되었듯이 수난의 길을 선택하며 의의 증인이 된다. 그게 바로 무릎을 꿇고 사는 대신 선 채로 끌려가겠다는 민중의 소리요,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르 8, 34)는 예수의 지시이다.
■ 1975년 4월 민청련사건 석방인사 환영모임에서의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