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윤리생활의 근간으로 내세움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하나의 유명론(唯名論)에 머물지 않게 하고 역사적 대상과 직결시켰다(루가 10, 25~37). 이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빼고 하느님을 생각하거나 사랑할 수없으며, 이웃을 외면한채 하느님에 이르는 직통로는 없게 만들었다. 종교에는 제율(祭律)과 윤리율(倫理律)이 있다. 제사종교일수록 제율이 중심이고 윤리율은 이차적이거나 전혀 없는 경우도 많다. 제율은 개인의 이기욕과 직결되어 있다. 화복을 주관하는 신에게 공양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행복의 추구행위이다.
유다교에도 크게 이 두 가지 계율이 있다. 제의(cult)적 계율과 윤리계율이 율법에서 거의 반씩을 차지했으며, 생활에서도 그 양자 모두의 실천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두 행위는 분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아웃과 원수 된 관계와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지니고도 경건하게 신을 경배하는 행위로 제단에 제물을 바치고, 제의식을 준수하고, 신을 사랑하는 길이 그대로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에게 와서 이 두 계율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계명(단수)을 묻는데(마르 12, 28 이하), 예수는 하느님 사랑(신명 6, 4~5) 만이 아니라 이웃사랑(레위 19, 18)을 동시에 제시했다. 유다교에서 이 둘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따로 있는 것인데, 예수는 이들을 유기적으로 결부시켰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나 원한을 가진 인간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부터 해결하라고 명령한다(마태 5, 23~24). 제물만이 아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는 것은 신과의 교류이기 때문에 사적인 행위로 신비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라"고 한다(마르 11, 25). 유다교에서는 이른바 속죄를 위한 제의행위가 있다. 그 죄의 성격이야 어떻든 제율(祭律)대로 '의무'를 다하면 사죄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과 인간(私)의 문제다. 그런데 예수에게서는 그러한 사죄의 길은 완전히 부정됐다. 위의 예도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지만 바로 그 다음의 해석이 이 사실을 뚜렷하게 제시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훌륭합니다(마르 12, 33).
이것은 제일 큰 계명을 묻던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나, 예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대답에서는 예수에게 묻던 자는 하느님 사랑과,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구별했을 뿐 아니라 분명히 제의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사해주실 것이오, 만일 너희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다(마르 11, 25~26).
이것은 기도와, 형제와의 화해를 명한 다음 연속되는 말이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에서도 하느님과 형제의 관계를 일치시키는 것을 우리는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루가 11, 4).
이상에서 하느님은 단순히 유명론적 절대 가치기준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선 그 하느님은 명령하는 의지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행위의 수직적 가치기준이 아니라 역사적 횡적 관계에 선 가치 기준을 제시한다. 그게 바로 '사람'이다. 이로써 사람과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서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와 휴머니즘의 만남의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막연한 휴머니즘과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이웃이 누구냐?"를 밝힐 때 뚜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