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이"라고 번역된(마르 10, 13) 원문은 "그들이"인데 그것은 그 전에(10, 1) 모여든 '민중'을 지칭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거부했다. 이것을 본 예수는 "노하시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마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어린이를 기준으로 삼아 "누구든지 한 어린이의 심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어린이의 심정"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론(定論)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분명한 것이 있다. 즉 그 말이 지칭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윤리나 도덕성은 아니며, 종교성은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효용성'은 물론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의 '공적'과는 상관이 없다. 있다면 '어린이'라는 것 자체가그대로 인정되되 새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전형적 기준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은 제자들의 태도에 반영된 유다교의 어린이관의 배경에서 보면 그 성격이 민중의 경우와 같다. 어린이는 바리사이체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까닭은 바리사이체제란 계율을 알고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 즉 성인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다 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멸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가 새로운 가치기준이 된 것이다. 그러면 가치란 무엇에서 성립되는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죽을 수 있는 대상이 뚜렷한 경우이다. 민중 또는 어린이 자체의 가치를 어떤 기준에서 물으면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효용가치를 찾게 된다. 그럴 때 그것은 물화(物化)된다. 이에 비하여 저들을 위하는데서 삶의 의미(보람)를 느낄 때, 저들은 비로소 나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