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복음서 중에 예수의 수난사는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 속에 무리(ochlos)의 거동은 묘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수를 처형시까지 이끄는 그 무대에 나타난 것은 유다 종교지도자와 로마의 권력자이다. 이들은 모두 그 무리의 소리에 의존한다. 그무리는 무명의 무리이다.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도 나타나있지 않다. 그런데 저들은 일제히 같은 소리를 지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 무리는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를 부르며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초라한 예수를 '왕 중의 왕'으로 환영한다. 무얼 안다고? 그러기에 유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우매함을 한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예수는 저들이 가만있으면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응수한다.
이 말은 '무리의 소리', '민심'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나타낸 말이다. 돌! 입 못 가진 돌! 그것은 자기 뜻을 논리적으로 진술 못하는 무리와 같다. 그러나 저들은 저 돌들의 '마음'을 대신했다. 저들의 '우메'는 저 돌들의 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소리는 머리에서 입으로 나은 소리가 아니요, '몸부림'이다. 그래서 순수하며 그래서 천심이요, 천성(天聲)이었다. 저들은 오히려 영리하기 때문에 입을 다문 지도층을 뒤로 밀쳐놓고 이 역사의 소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소리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무리의 소리는 순식간에 '예수를 십자가에! 십자가에!'라고 변조됐다. 우리는 저들의 변조(變調)에서 그 우매함을 한탄하기 전에 어떻게 그처럼 순식간에 변조 화음의 대합창을 할 수 있었나하는 데 놀랄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 입성 때는 환영, 환희의 대합창! 그런데 이번에는 일치해서 증오와 저주의 합창을 한다. 제1악장에서 제2악장으로 넘어간 합창인가? 지휘자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저런 합창이 가능할까?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십자가처형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꼭 있어야 할 드라마로 해석한다. 그러하면 그들의 합창의 지휘자는 하느님 자신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저들은 신의 뜻을 합창한 것이다. 그를 '왕 중의 왕'으로 알고 환성을 올린 것도 이 무명의 무리뿐이었으며,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이 무리뿐이다.
저 무리(ochlos)는 '진리'를 죽였다. 그렇게 보면 저들은 진리의 반역자들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다시 새겨들으면, 진리는 죽어야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진리일 수 있다는 영원한 진리의 선포인 것이다.
유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순간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저들은 이 무리를 선동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실상은 저들이 그 무리에게 아부한 것이다. 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빌라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민중의 입을 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 무리와 로마정권(빌라도)을 대결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뿐이다. 빌라도의 눈에 이 무리쯤은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무리의 소리에 따라 로마의 법을 유린하면서까지 예수를 처형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 무리는 로마정권을 이 일의 공범자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 십자가의 사건을 세계사적 사건이 되게 한 것이다. 그렇게 만든 주역은 바로 이 무리였다. 그러므로 이 무리는 다음의 제3장의 합창을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