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부터 약 9년 동안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영국 등에 체류했습니다. 그때 적(籍)은 신학부에 두었으나 강의는 별로 듣지 않고 다각도로 책 읽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때 독일의 학문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 언어와 더불어 논리성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그것에 포로된 상태였지요. 그러나 지금 와서 회고해보니 마치 피안의 어디엔가에 가서 머무는 듯했던 느낌입니다. 그 까닭은 독일의 아카데미즘이 독일내의 삶의 현장을 차단시켰을 뿐 아니라 실은 신학이 독일 교회 현실을 볼 수 있는 길조차 차단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삶의 현실과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지성적 사변의 작업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특히 역사의 예수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얻으려고 독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독일을 떠날 때 내가 그전에 지녔던 예수상은 전부 파괴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 하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안고 귀국했지요. 심지어 나는 케리그마의 배후를 묻는 것은 불신앙이라는 경고까지 받고 온 것입니다. 예수의 삶의 현실을 경험하려던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텅 빈 동공처럼 남아 있게 된 셈이지요.
나는 이것은 서구 신학 전통이 몰고 온 필연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중세기의 신학이 복음서들과 그 안에 전승된 예수사건을 거부했습니다. 루터는 이른바 '사도직(使徒職)의 복음'이라는 것을 성서해석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복음'이 종교개혁 이전의 법왕의 자리를 대신한 셈이지요. 루터의 이 시각은 예수의 사건을 보는 데에 있어서 오직 십자가에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울로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바울로의 해석영역을 아주 축소했습니다. 루터에게는 십자가로의 집중과 '믿음으로만'(sola fide)이 유일한 성서해석의 열쇠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복음서에 전승된 예수사건을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 또는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imitatio Christ)에 무관심하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이른바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입니다. 사람 둘은 이 시대를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환기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방법은 확실히 많은 의문점을 풀게 하고, 성서지식을 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비록 성서전승의 역사를 설명했으나 성서의 텍스트의 상호관련성을 사정없이 난도질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복음서 연구에서 분명해집니다. 이방법에 따른 복음서 연구에서는 예수의 사실이 거의 파괴되거나 소외됐습니다. 예수의 사실들 대신 케리그마가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볼 때 많은 점에서 루터가 말하는 '복음'에 해당됩니다. 결과적으로 역사비판학적 방법은 루터에게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럼으로써 복음서들이 파괴되었고,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불가지론이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독일 신학은 사실상 역사의 예수를 제외했으면서 단지 예수 사실을 전제했다고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로의 입장 인, 주님을 육에 따라(κατάσ άρκα)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후 5, 16)를 재확인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역사의 예수를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로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까?
예수의 사건만큼 우리에게 강력히 도전해오는 것은 없습니다. 케리그마 이전에 예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신학의 대전제입니다. 오랫동안 신약학계를 대표한 불트만의 노력은 결국 내용적으로 이 사실을 괄호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왜 독일의 신학이 그렇게 빨리 참 역사의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추궁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를 정신 또는 의미화해버리는, 케리그마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은 전통적, 보수주의적 전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구 신학은 그 성격을 볼 때 일반적으로 일종의 '로고스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 신학은 이른바 '하느님 말씀의 신학'으로 성격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해석할 때 케리그마적으로 왜소화시키는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서구 교회는 선교를 설교와 일치시키고 거기에 모든 과제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가톨릭은 새크러먼트 행사(sacrament, 성례전)에서 하느님을 경험하는 모멘트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신교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이 하느님의 현재성을 경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 외에는 하느님을 경험할 어떤 시간도,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말의 신학'은 예수의 이름으로 된 말에만 관심하고 그 내용을 소중히 다루었으나 그것은 결국 케리그마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을 한 예수 자신의 삶의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묘하게도 일면 석가와 상통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석가는 임종시에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믿지 말고 내가 말한 진리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서구 신학은(특히 불트만의)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을 중시합니다. 이 복음의 서설은 '로고스'(λόγος)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고 시작됩니다. 루터는 이 '로고스'를 '말'로 번역했습니다. '말의 신학'은 특히 그 구절을 크게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요한 1장 14절이, 즉 "말이 육(肉)을 이루었다"가 중요하게 보입니다. 불트만은 이 구절이 요한복음의 핵심이라고 보며, 육이 된 로고스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말이 육이 됐다는 것이 한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사건이란 역사화를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불트만은 그런데 이 사건과 우리의 경험영역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인지'(Gnosis)를 내세우며 그 인지는 무엇 보다도 육이 된 사실과 연관시킵니다. 그런데 이에 모순되는 것은 이 인지는 정신적이거나 또는 감정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고 맙니다. 육이 된 것은 정말 실존하는 역사적인 실체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트만이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후 비역사화시켰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신학은 이 하부구조를 밝히는 데 과제가 있다고 합니다. 서남동에게 사고의 계기를 많이 만들어준 김지하는 "밥은 하늘"이라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 파악은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이 됐다는 서술과 아주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서구 신학은 계시의 상부구조로서의 로고스, 즉 하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육을 이루었다는 사건아 핵심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표현 대신에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2, 6~11)는 하느님이 종이 된 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우리의 밥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신학의 과제는 바로 이 사건에 동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는 사람은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명령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사건은 단순히 2천 년 전에 한 번 일어나고 결말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에 언제나 그리스도는 현존합니다. 또 이 과거의 사건은 교회가 늘 독점하는 기념탑이 될 수 없고 이 사건은 계속적으로 역사의 현재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민중의 삶 속에서 이런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며 담지자입니다. 그것은 육신이 되는 데 필요한 현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은 계시의 하부구조이며 역사의 담지자입니다. 그러나 이 민중은 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현 체제에서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비인간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생산한 것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이 소외현상이 바로 요한복음 서문의, 모든 것이 로고스를 통해서 만들어졌는데 이 만들어진 것들이 창조주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말과 상통합니다(요한 1, 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