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토전서 1장 26장 이하를 읽어보면 고린토교회내에서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실제로는 소아시아 일대에 있는, 헬레니즘 영역 속에 있는 교회들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다행히 고린토교회에서 문제가 노출이 되어서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고린토전서 1장 26절 이하를 읽어보면 고린토교회에 처음 모인 사람들은 우리의 표현대로 '민중'이라고 볼수 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보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권력 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1, 26, 새번역).
교회의 처음 구성원들 중에는 지혜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가문이 훌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혜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자들을 택하셨고, 유력한 자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없는 자들을 택하셨다(1, 27).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없는 자들은 곧 '민중'이다. 고린토교회뿐만이 아니라 헬레니즘 영역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바로 이 민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고린토교회의 처음 구성원은 예수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밥술이나 먹는 사람, 좀 괜찮은 가문의 사람, 권력의 주변에 있는 사람 몇몇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회를 지키는 사람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혹은 이 둘을 공존시킬 수는 없는가 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린토 교회의 분위기는 소수의 가진 자들, 소수의 유력한 자들, 소수의 지식층들의 횡포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바울로는 고린토전서를 쓰면서 처음부터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교회가 소수의 가진 자들의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 11장 17절 이하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음식 먹는 문제'의 핵심이다.
초대 교회에는 두 가지 형태의 만찬이 있었다. 하나는 '예식으로서의 성찬'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만찬'이다. 마르코복음 14장 17절 이하를 보면 두 전승의 만찬이 결합되어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시며 배반에 관한 말을 주고받으산다. 그런데 22절 이하에 보면, 또다시 떡을 들고 포도주를 들고 축사하시며 식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 나오는 식사는 '사랑의 공동식사'의 전승이고, 두 번째는 '성만찬 예식'의 전승이다. 초대 교회에는 일찍부터 이 두 가지 만찬이 다 있었다. 고린토교회에는 지금 '사랑의 공동식사'를 놓고 문제가 발생했다. 사랑의 만찬을 하는데, 교회가 특별히 돈이 있는 처지는 아니기 때문에, 밥술이나 좀 먹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어 교회에 가져와서 음식을 해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사랑의 만찬'에서 '나눈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사도행전에도 이와 같이 여유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해와서 가난한 자들과 나누어 먹는 '애찬'의 보도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고린토교회에서는가진 자들이 음식을 가져와서는 '사랑의 공동식사'의 의미는 다 잊어버리고 술과 음식을 저희들끼리만 나누어 먹었다. 즉 교회 안에서 우월감과 특권을 조성하고 못 가진 다수를 무시하며, 저희끼리 먼저 먹고 마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로는 분노를 표하고 있다. 도무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먹고 마시지 무엇 하러 나와서 먹느냐고 책망한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할 것입니까? 칭찬할 수 없습니다(11, 22).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이른바 바울로의 '몸'의 사상이 등장한다(12, 12~27). 바울로에 의하면 우리는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과 같다. 소수의 특권층 교인들이 생각하듯이 어떤 부분은 중요하고 어떤 부분은 미천하다는 생각은 몸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 몸은 구석에 붙어 있는 하잘 것 없는 부분이 아파도 전체가 아픈 그런 성질의 것이다. 머리가 발에게 자기가 더 소중하다고 발가락을 깔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에는 어느 곳이 비천하고 어느 곳이 우월하고하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비천한 것으로 하여금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고린토교회 안에서 자기가 조금 잘났고 유복하고 배경이 있다고 해서 횡포를 부리거나 우쭐거리는 사람들은 교회를 해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치기준을 버리라는 것이 바울로의 가르침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민중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옳은 몸이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로가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 가진 생각은 교회는 민중중십적인 유기체적 공동체가 될 때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