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 김지하는 「금관의 예수」라는 희곡을 썼다. 무대는 어느 가톨릭 교회당 앞이다. 그 중앙에 시멘트로 된 예수상이 서 있는데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다. 그 아래 거지들이 누워 있다. 때는 추운 겨울 새벽이다. 이때 배가 많이 나온 신부, 사장 등이 지나가자 그 거지들은 구걸을 한다. 그러나 그 거지들은 멸시와 천대, 거절만을 당할 뿐이다. 다음은 경찰이 지나간다. 그는 도와주기는커녕 저들을 그곳에서 추방하려고 하며 저들을 그대로 묵인해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그들이 지나가버린 후, 거지들 중의 하나가 이렇게 탄식한다.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어, 이젠 정말 못 견디겠어.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로 가야 되나, 나는 어디로…….
이렇게 절망적인 독백을 하다가 그의 시선이 시멘트로 된 예수상에 와 닿는다. 그는 그 예수상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려다가 말고, 다시 비판의 눈으로 응시한다. 그는 그 예수도 먹고 입고 살아갈 집을 가진 자들에게나 구주가 될지언정 자기 같은 거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중얼거린다. 그는 드디어 큰소리로 외친다.
흥, 예수님이 입이 있어야 말을 하지, 시멘트가 무슨 말을 한담. 저렇게 시멘트 콘크리트를 잔뜩 처발라놓으면 예수님이 살아 있다 해도 말을 못하겠지. 저 시멘트 콘크리트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챗 잘해보라지. 시멘트 콘크리트건, 구리덩어리건, 금덩어리건 그 저 천년 만년 갈 것으로, 그저 단단한 것으로 골라서 부서지지 않게 튼튼하게 예수를 만들어…… 그 아래서 잘들 해처먹어라.
그는 이렇게 절규하면서 제 슬픔에 겨워 운다. 그런데 그의 머리에 어떤 액체가 떨어진다. 비가 오나? 아니다. 쳐다보니 바로 시멘트로 된 예수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자기에게 떨어진 것이다.
정말로 눈에서 눈물이 흐르네,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이 시멘트 콘크리트는 이상한 콘크리트인가 보구나.
그는 예수를 유심히 응시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예수의 머리에 금관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가 그것을 어루 만진다. 그것이 정말로 금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 금관을 훔쳐서 팔면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충동에 그 금관을 벗긴다. 그때 그에게 한 소리가 들린다.
네가 그것을 가져가라.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막한 이 시멘트 감옥 속에서 나는 너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고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서,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서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와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서 구원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금관을 쓴 예수의 말이다. 놀란 거지가 묻는다.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에 대해 시멘트의 예수는 바리사이적인 사람들이 그를 독점하기 위해 그를 감금하여 그와 가난한 자들의 관계를 차단시켜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때 거지는 다시 묻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올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너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핍박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된다.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자, 가까이 오너라, 가까이 와.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내 몸을 자유롭게 하라. 내 몸에서 시멘트를 벗겨내라. 내 머리 위에는가시관으로 족하리라. 내겐 금이 필요없고, 금은 네게 필요하다. 금을 가져다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
그러나 이때 지나가던 배 나온 신부, 사장, 경찰 등이 다시 나타나서 그 금관을 빼앗아 예수의 머리 위에 다시 씌우고 그 거지를 절도 범으로 잡아간다. 이로써 그 시멘트의 예수는 다시 이전처럼 표정도 없고 말 못하는 한갓 시멘트덩어리가 되고 만다.
김지하는 가톨릭에 속한 평신도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열심있는 신도가 아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가르침이 그가 처한 현장과 너무도 먼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없도록 '교리'라는 장벽으로 차단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시멘트로 가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만들어낸 그리스도론이다. 그의 머리에 씌워진 금관, 그것은 바로 예수로 하여금 기존교회를 옹호하도록 만든 이데올로기이다. 한국은 가톨릭 200주년, 신교 100주년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서구에서 형성된 도그마에 의해 화석화된 예수만 제시했으며, 이로써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고뇌를 같이하는 예수는 가두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1970년대에 독재치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가 예수의 금관을 벗김으로써 우리는 그의 눈물과 말을 듣게 되었다. 이 사실을 달리 말하면, 시멘트에 감금되었던 예수가 민중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의 금관을 도로 빼앗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가 복음서의 민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상황과 때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재래의 그리스도론을 통해 본 예수는 바로 시멘트에 갇힌 예수로 보였다. 이 시멘트에서 예수를 해방 또는 구원하는 일이 성서학을 하는 자들의 절실한 임무로 받아들여졌다. 그 일은 책상 위에서 지적 분석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중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노력한 내용을 요약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