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병 치료가 단순히 마술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성을 지닌 것임을 보았다. 예수는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마저도 제약하고 방해하는 현실을 직시했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결과적으로 그것과 도전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으로서라 기보다 인간해방의 집념에서 온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저항이 바리사이즘과의 충돌로 대두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안식일논쟁(마르 2, 24ᆞ3, 2)에서 그 성격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이 안식일법에 위배된다고 예수에게 항거한다. 이 고발은 단적으로 인간 부재의 입장이다. 지금 '굶주린 인간'의 문제가 체제(Status quo)수호라는 과제 앞에 완전 묵살된다. 이것은 인간과 체제의 양자택일에서 후자의 입장에 확고히 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선언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 "사람의 아들(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바로 상극의 입장이며, 이것은 비인간화하는 체제에 대한 충격적 선언이며, 동시에 인간해방의 절대성을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이같은 입장을 전반에 펴면 유다교의 골격이며 내용인 율법은 그 효력을 완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질서 파괴를 위해 도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인간을 구속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인간을 돕고 사랑하는 자유마저 구속하는 것은 그 어떤 성격의 것이든 용인할 수 없다는 의지를 뚜렷이 한 것이다.
어떤 관념에 노예화되지 않은 정상적 사람이면 한 손 오그라진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것이 상정이다. 그런데 바리사이파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수가 그에게 접근할 때, 그 불쌍한 자가 병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안식일법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전제 앞에 압 살되었다. 그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서 재삼 명기할 것은 '법'에 대해 '사람'이 극대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체제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도 본래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사람이 그 체제를 위해 있기를 강요당한다. 이런 역현상이 어떻게 생기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사람, 즉 지금 여기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니 민족이니 하는 추상개념이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서 그것이 체제와 직결됨으로써 카프카의 「성」처럼 되고, 사람은 그 성 밖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다수', '보편' 따위를 공식화하는 경우, 그것이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이름만 빌려 인간을 억누르는 것이 되기 쉽다. 99마리 양이라는 것이 '다수' 또는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절대 우위를 고집할 때 주체적인 존재, 즉 잃어졌다는 사건에 놓인 한 양을 쉽게 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냉엄한 현실 앞에서 예수는 바로 '99'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1'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선택한다. 이것은 선호의 여유있는 선택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횡포와의 대결을 의미하며, 여기에 예수의 해방운동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예수의 관심이 결정적으로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쏠린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과 그의 가르침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행태는 그의 경향성이 아니라 뚜렷한 선택의 의지의 표현이며, 해방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를 위해서가 아니라 ……를 위해'라는 양자택일의 양식은 중요시해야 한다. '모든 것 또는 만인을 똑같이'라는 전제에서는 해방이란 발상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계급과 대립시켜 전자의 편에 선 것은 예수의 입장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차이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파악하여 그 계급성이 추상적 보편개념이 됨으로써 그같은 개념형성의 한 분자가 됐으면서 실은 그런 집단개념 아래 역사적 존재의 인권이 무시되고 비인간화된다는 점, 둘째는 위와 연결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정치조직화하고 이른바 독재체제화하여 프를 레타리아계급에 속한 개개인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들의 이름을 도용한 소수의 통치자에게 바쳐버림으로써 철저한 피통치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99마리의 횡포가 한 마리를 죽여 버리는 현실이 재현된 것이다. 이것은 바리사이즘의 현대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