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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학적 문제 정리

먼저 신학적으로 문제되는 몇 가지 주제를 정리하겠다.

첫째는 자살문제이다. 전태일의 분신을 놓고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자살에 대한 자세가 뚜렷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보수교단에서는 자살은 교리를 위반한 행위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위한 추도예배 등을 거부했다. 이것은 자살은 죄라는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인 도식을 아무 사려 없이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과 타살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실연을 하고, 도박을 하다 재산을 들어먹고, 또는 병고에 시달려 목숨을 끊거나 하는 것은 자살임에 틀림없다. 나도 그런 죽음에 대해서는 '죽을 바에야 돌 하나라도 걷어차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나 개인에 갇혀서 이기심이 충족되지 않아 목숨을 끊는 것은 생명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문서에서 보듯 전태일을 위시한 분신행위나 그외의 방법으로 자해한 경우가 정말 자살인가? 전태일은 분명히 자기 손으로 기름을 붓고 성냥을 그었다. 그러나 그가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없도 만든 것은 다른 강한 손이다. 저들은 거대한 불의를 고발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 입이 너무 작았으며 그 글은 너무 약했다. 그것은 이 사회가 그들의 말이 전달될 수 없을 만큼 단절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주권자들이 환호하는 민중들의 입을 틀어막았을 때 예수는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기의 온몸을 하나의 돌로 삼아 절규한 것이다. 한 덩이 숯이 되어, 한 점의 고깃덩이가 되어 절규한 것이다. 그들은 손에 바늘 하나 들지 않은 대신 자신의 몸을 불의와 싸우는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 무기는 상대방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체념 속에 죽어가는, 그러므로 불의에 대한 감수성마저 마비된 민(民)을 깨워 일으키는 폭탄 역할을 한 것이다.

예수는 타살되었나 아니면 자살했나? 외적으로 보면 분명히 예수는 로마제국과 그 앞잡이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의 증언자들은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예수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으로 돌입해 들어갔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는 그가 죽임당할 것을 거듭 예고하면서도 그의 죽음을 만류하는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그 길을 관철한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투는 분명히 자살자의 고루이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는 피살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살의 의지가 앞서고 로마제국은 그 의지의 하수인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추념하는 예배도 거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 너,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행위이다.

둘째로 정리해야 될 또 하나의 시각적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는 신앙고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그래야만 하느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런 신조를 거부한다. 유다교는 성전중심의 종교가 되면서 성전만이 하느님이 임재하는 자리라는 교리를 세웠다. 이것으로 성전의 의미는 극대화되었으나 전지전능하고 무소부 재한 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세기에 와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선포했다. 이로써 하느님은 제도적 교회 안에서만의 하느님이며, 그 밖에서는 무능한, 따라서 제한된 실체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교회와 세상을 갈라놓음으로써 하느님은 교회 안의 신일 뿐, 세상에서의 주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게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하느님이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구획 안에 갇혀 있어야 만하는가? 시편 기자는 그의 신앙을 이렇게 노래로 고백한다.

내가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에 올라도 지옥으로 가도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더라도 거기 하느님의 손이 뻗쳐 있다.

하느님이 관여하는 영역은 인간의 제도나 생각으로 만들어낸 어떤 제약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예수는 돈 한푼에 팔리는 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경우에까지도 하느님이 간여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영역 속에서도 하느님이 역사한다는 이 신앙을 인정한다면,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간여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겠는가!

이와 관련해서 분명히 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일회성'(Epha Pax)이라는 교리적 주장이다. 그리스도사건의 일회성에 대한 주장은, 그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써 거듭되는 제사를 철폐했다는 의미에서는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사건의 절대 성을 수호하기 위한 교리가 되면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마비시키는 중요한 독소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사건의 핵심은 그의 십자가처형 사건과 부활사건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의 일회성을 강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예수사건은 2천 년 전이라는 시간과, '골고타'라는 공간과,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세력이라는 정치사회적으로 한정된 사건에 묶어 놓게 된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호메트교도들이 메카를 향해 절하듯 우리는 2천 년 전의 시점을 향해, 그리고 예루살렘 밖의 골고타라는 지점을 향해 절할 것인가? 우리는 예수를 '화육(化肉)의 신'으로 믿는다. 그런데 만일 단 한 번, 이 화육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화육의 사건은 과거에서 끝나고 만다. 지금 어디서 육이 된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민중들은 죽임당한 예수가 부활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한 예수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만나는가? 사도들이 만나듯,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듯, 토마가 그의 옆구리를 만져보듯, 오늘도 그렇게 만날 수 있는가? 루가는 그렇게 자주 만나던 예수가 40일 만에 승천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그를 어떻게 만나나? 여기에 세 가지 대답이 있다.

첫째, 신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는 것으로 '성령'이 바로 변신한 그리스도의 실체라는 고백이 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을 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2, 1~13) 예수를 처형한 예루살렘, 그를 흉악한 범죄자로 처형하여 그의 핏자국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을 때인 오순절에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갈릴래아 민중들이 용감하게 예루살렘에 모여든 것이다. 거기서 저들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그렇게 무력했던 갈릴래아 민중들이 다시 일어난 사건이다. 천민인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예수의 죽음을 등에 업고 증언자로서 소리를 높여 새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성령사건은 민중의 궐기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부활은 민중사건에서 재현된다는 뜻이다.

둘째로, 예수는 수난자 가운데 거듭 현재한다는 신앙고백이다. 저 유명한 최후심판의 비유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투옥된 자들의 현장이 바로 현재의 예수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 히브리서 13장 12~13절이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

이 히브리서를 쓸 때에는 이미 예수가 죽임을 당한 지 70여 년이나 지났는대, 영문 밖에 도대체 누가 있다는 것인가? 처형당한 예수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가증언했듯이 고문당하고, 채찍에 맞고, 결박당하고, 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에 켜이고,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현장이 바로 영문 밖이며, 그것이 현재의 그리스도의 현장이다. 즉 수난현장이 바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자리이다.

셋째, 또 하나의 모델은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순교자 서술에서 볼 수 있다.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파노이다. 스데파노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고 돌에 맞아 죽는다. 그러나 그가 성문 밖으로 끌려가는 것도 예수와 똑같고, 옷을 벗기우는 것도 같으며,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간구도 같다. 바로 그의 순교 현장에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다. 루가는 스데파노의 이같은 수난 속에서 그리스도사건의 재현을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울로의 경우이다. 그는 예수처럼 한사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간곡히 말렸듯이 에페소의 장로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예루살렘행을 말렸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뜻을 결행한다. 마치 예수처럼!

예루살렘에서 바울로는 유다인들에게 체포되어 죽음 직전에 있을 때 파병된 로마군병들에 의해서 그의 무죄가 확인된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다는 바울로를 필립보 가이사리아의 로마 감옥에 2년여 동안을 감금했다가 로마로 호송한다. 로마의 법에 의해서 무죄라고 인정받은 예수가 로마권력에 의해서 처형되었듯이 바울로도 그렇다. 루가는 확실히 바울로의 수난사에서 예수의 수난의 재현을 본다. 바울로는 자신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그의 부활에 참여하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이처럼 단 한 번이라는 신조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러 형태로 거듭 오늘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저들은 증언한 것이다. 교리상이나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요한이 말한 대로 우리가 보고, 보되 눈으로 보고, 눈으로 보되 자세히 보고, 자세히 볼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런 사건으로서 우리의 경험영역에서 계속 일어나 예수는 확실히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나?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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