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에게 특정한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정해진 기도는 고백과 같은 것으로 예수 당시의 종파들마다 기도문을 갖고 있었다. 그 기도문은 이렇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당신 나라가 임하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그날 그날의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루가 11, 2~4).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마태오 6장 9~13절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다만 마태오의 것은 다른 본문과 마찬가지로 훨씬 수사적이고 설명적이다. 루가의 본문이 원형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정설화된 것이므로 루가에 따르는 것이 좋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 다음에 "그날 그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가 바싹 뒤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과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하라는 기도의 구체적인 것으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한다. 하느님 나라를 쉽게 피안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많은데, 예수는 그것을 그날그날 먹는 양식이 주어지는 현실과 직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날 그날의 양식이 해결되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무도 물적이고, 세속적이다. 예수는 가난을 알고 배고픔을 안 분이다. 복음서에서도 그가 배고프고 목이 말랐다는 이야기와 그를 따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흘씩이나 굶었다는 이야기는—그 마당에 예수가 홀로 먹었을 까닭이 없다—그가 굶주림의 현장에 살고 있었음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의 공생애 출발 이전에 광야 40일 동안의 시험이야기가 있는데, 그때 그는 40일간이나 굶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굶주림의 문제가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로 등장한다.
저 돌들로 하여금 떡이 되게 하라(마태 4, 4; 루가 4, 3).
이것은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환상이다. 굶주린 민중과 더불어 사는 예수에게 저 돌들을 떡으로 만들었으면하는 소원은 일차적인 것이었으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마태 6, 25; 루가 12, 22)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다는 것과 날마다 그날 그날 양식을 달라는 것이 직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일 년, 한 달 아니 단지 이틀분의 양식을 저장한 사람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날 그날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절실하다. 그들은 거리의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사갈 것을 기다린다. 그야말로 노동시장, 인간시장이다. 한국에도 이러한 노동시장이 엄연히 있다. 저들은 그날 그날 고용될 것을 기다린다. 바로 그것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일 수밖에 없다. 누가 그를 고용하지 않으면 그날의 양식을 얻을 수 없다.
노예들에게도 이 기도는 현실이다. 노예는 의무만 있지 권리는 없다. 야무리 일을 많이 했어도 그 대가로 먹을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양식을 얻는 것은 그 주인의 마음씨에 달린 것이다. 그 주인은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다. 그런 그에게 날마다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그 주인에게 그날 그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날 그날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게 했을까? 왜 이틀이나 사흘분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모세가 광야에서 히브리를 이끌고 갈 때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저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모세의 간곡한 소원에 야훼는 '만나'라는 것을 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날 그날 먹어야 하는 것이며, 저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축하면 썩어버렸다. 예수의 이 기도에는 이 히브리의 '만나 이야기'(출애 16, 1~36)가 모델이었을 수 있다. 거기에 물론 예수의 고유한 해석이 따랐을 것이다. 먹을 것을 저축해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저축한 그 물질이 '너'를 대신함으로써 '너' 없는 나의 삶을 가능하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저축이 있을 수 없다. 숨을 쉬는 것도 저축할 수 없다. 그때 그때 반복해야만 숨이고, 그런 숨이 사람을 살려낸다. 예수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저축도 하지 않는 새나 꽃의 존재양식을 내댄 것이라든지, 일년 내내 충분히 먹을 것을 쌓아 두고 물질의 보장에 안도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은 위와 같은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날 그날의 양식을 주소서!" 이것은 "나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소서"라는 말이거나 나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소원은 아니다. 가난한 자의 목표는 그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날 그날의 양식이나 희구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부자가 될 길이 없으니 이런 기도나 가르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런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까닭은 부자가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이웃과 하느님에게 범지할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팔레스틴은 갈릴래아 지방을 빼면 박토였고, 비도 고르게 내리지 않아 자주 흉년이 들었기에 양식은 언제나 부족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가난한 층이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보나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도 비록 적은 수이지만 엄청난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라삐의 기록에는 일 년의 수입만으로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먹여 살릴 만한 부자가 네 명이나 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목축에서 얻은 수익의 십일조로 바친 송아지가 무려 1만 3천 마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의 축적은 권력을 등에 업고 남의 것을 뺏는 일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합법적으로 차곡차곡 늘려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여유있는 지주가 수확하여 먹고 쓰고 남은 곡식을 곳간에 저장해두었다가 우리의 보릿고개와 같은 때를 맞아 외상으로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였는데, 그 값이 평소의 16배에 달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의상 곡물을 빌린 사람은 결국 가을에 거둔 곡식을 몽땅 바쳐야 했거나, 그것도 모자라 빚더미에 울라앉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 두세 해를 넘기면 가진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마침내 가족을 노예로 팔아넘겨 풍비박산이 되었다.
부자란 쓰고 먹는 것이 남아도는 사람이다. 또 남은 것이 하나의 자본이 된다. 그는 자기 힘 외에 '자본'이라는 힘을 빌려 이웃 위에 군림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도 된다. 그 자본에 남을 예속시킬 뿐 아니라 자신도 예속된다. 자본으로 자기 힘을 확대하려던 것이 자본에게 예속됨으로 비인간화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부자들을 그렇게 비판하고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주라고 했을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것에는 "나를 굶지 말게 해주소서"라는 소원과 더불어 "자본의 노예가 되지 말게 하소서"라는 말도 포함된다.